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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도바다 Dec 07. 2016

클래시컬한 그를 만났다.

--지리산 쌍계제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클래식 음악에 관한 짧은 기억

     

그를 만났다. 그와 소주를 마시고 그의 방에 들었다.

녹차를 내어놓는다. 차를 조제하는 다기 받침상은 바둑판이다. 손놀림도 능숙하게 잘 우려낸 녹차를 나의 잔에 가득 따른다. 지리산 쌍계제다 녹차를 한 모금 마시고 혀끝으로 양치질하듯 입안 구석구석으로 녹차를 옮기고는 삼키지 않고 입 안 가득 남겨놓는다.

술기운 때문인지 아니면 그와의 모처럼의 해후여서 그런지 녹차의 향기가 상큼하고 파리한 겨울밤 별 같다.

그는 또 자연스럽게 CD를 걸고 음악을 깔아놓기 시작한다. 그의 클래식 감상 수준은 익히 아는 터라 그의 행동이 마치 클래식 음악처럼 클래시컬하다. 먼저 들려준 음악은 하이든 현악 4 중주 76 'Largo ntabile e nesto'이다. 그가 틀어 놓은 클래식 음악은 그의 좁은 방에 오랫동안 잔잔하게 머물렀다가는 싸늘한 밤하늘로 날아올라 별에 닿는 것 같았다. 그의 고단한 삶은 클래식 음악으로 천천히 풀리기도 하고 다시 옹골차게 매듭져 방안에 가득한 담배연기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알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기름진 부분을 이끌 수 있는 연령이며 동시에 가장 지치기 쉬운 사십 년의 지난한 삶을 그는 클래식 음악을 일종의 치유제로 사용하면서 조금씩 간신히 버텨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이하게도 그는 눈썹을 왕창 밀어 버려 하마터면 처음에 그를 못 알아볼 뻔했다. 

그는 지금 사회적으로 육체노동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있는 공사판에서 막노동을 하고 있다.

  
취기가 알맞고 그의 방도 따뜻하여 졸음이 몰려왔지만 평소 클래식에 심취해 있는 그가 선곡할 다음 곡이 궁금하여 애써 졸음을 쫓아낸다. 클래식 음악 한 곡을 듣고 금방 매료될 수는 없지 않은가? 그가 다음으로 선곡해서 틀어 놓은 곡은 '카치니 : 아베마리아'로 이네싸 갈란테가 부르는 곡이다. 우리는 조수미의 목소리를 천상에서 내려준 목소리라고 극찬하고 있지만 이네싸 갈란테의 목소리도 천상에서 내려준 아니면 구름 속에서 신이 부르는 목소리였다. 아베마리아를 열창하는 갈란테의 고음처리 부분에서는 내가 아득한 하늘 속에 아니면 구름 속에 붕붕 떠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갈란테라는 이름을 영원히 기억하리라.


 

  
   

다음 곡은 슈베르트의 피아노 트리오 Eb장조 op.100, D929 中 2악장이었고 그다음 곡은 메스콤을 통해 익히 알고 있는 천재 첼로리스트 장한나의 무대였다. 그녀가 연주한 곡은 F.J 하이든의 첼로 협주곡 C장조였다. 총주(협주 악기와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연주를 할 때)가 흘러나오는 부분에서는 짜릿한 전율과 가슴속 깊은 곳의 오래 묵은 뼈저린 아픔이 천천히 도지는 것을 느끼며 들었다. 클래식 음악에 귀를 열어 놓고 그 길을 취미로 삼는 사람들의 뜨거운 열정과 애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연주였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거리에서 아무 바나 식당에 훌쩍 들어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내가 그 가게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그 가게가 어떤 힘을 발휘하여 나를 끌어당긴 것은 아닐까, 라는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가끔 하곤 한다.

클래식 음악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도 수많은 예술장르 중에서 클래식 음악을 간택해서 듣기 시직 한 것이 아니라 클래식 음악의 마술적 힘이 자꾸 그들을 유혹해서 그들을 클래식 마니아로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여 보는 것이다.  


시간은 자정을 넘어 사위는 칠흑 같은 어둠이 엄습하고 길거리에 떨어진 낙엽까지 잠들었을 테지만 말이 없어 더욱 좋은 세상이 되고 음악이 있어 더욱 좋은 세상이 됨을 은근하게 자축하고 싶었다. 음악이라는 예술장르는 시공을 초월하게 만드는 이상한 전율과 끌림의 축제인가?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는 사람들, 그들은 분명히 음악을 들으며 술을 마셨을 테고, 더 이상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東窓이 환해지도록 오늘은 음악을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마음을 읽는다는 사람들의 관계가 있다. 그와의 만남은 음악을 매개로 한 만남이지만 그가 선곡한 음악에서 나는 그의 마음을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백아의 거문고, 伯牙絶絃> 처럼 그의 음악을 이해하면서 그의 고단한 삶을 위무해 주고 싶었다. 그가 틀어 놓은 음악에 대해 그는 최선을 다해 조용조용 설명해준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설명은 처음 듣지만 그의 해박한 클래식 음악에 대한 수준에 또 한 번 놀란다. 백치와도 같고 음치인 나를 위한 특별한 그의 마음 씀씀인 줄 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여러 가지 우문을 던진다. 무엇을 위하여 사는가? 시와 음악은 동격인데 시인이 음악을 듣지 않고 어떻게 좋은 시를 쓰겠는가? 시가 음악인가? 음악이 시인가? 시인이라고 자처하는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그러나 지금 음악을 듣는 이 시간의 소중함을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선곡은 계속된다. 베토벤의 3중 협주곡은 왜 악성 베토벤인가를 알게 하는 17'48"의 꿈같은 연주였다. 베를린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하는 바이올린 연주자인 안네-소피 무터는 그와 동갑이라며 마치 자기 친구를 소개하듯이 말한다. 연주하는 시점이 1980년이니까 20살 때였고 천재적 음악 재능은 어렸을 때 꽃 피우는 게 아니냐면서 방금 전에 들었던 장한나의 첼로 연주를 상기시켰다. CD타이틀에서 피아노 연주자인 마크 젤 쳐의 얼굴을 만지며 "얘가 마크 젤 쳐야" 하기도 하고 첼로 연주자인 요요마를 보고 내가 일본인이냐고 물으니까 그는 중국 사람인데 아시아 음악인으로서는 가장 성공한 음악가라고 음악이 흐르는 중간중간 연애 이야기하듯 알려준다. 그에게서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세상 사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장황하고 상쾌한 설명에 그저 고개만 주억거릴 뿐이었다.

   

경쾌한 음악을 듣자며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CD를 틀었다. 4분의 3박자의 경쾌하고 신명 나는 waltz 2를 들으니 무도회장에서 멋진 춤을 추는 나를 발견하는,  상상의 날개는 아름다워라.  


   


이제는 시간에 대한 관념은 없어진 상태였다.

그가 틀어 준 음악을 들으면서 세상의 온갖 소음으로부터 일상의 고단함으로부터 자꾸 바다로 밀어내는 이상한 바람으로부터 탈출하는 짜릿한 해방감을 맛보았다. 속으로부터 치밀어 오르는 울화 같은 욕망으로부터 초연해지고 어느 절터 요사채 뒷 뜰 쯤을 서성이거나 사천왕의 부릅뜬 눈을 놀란 눈으로 쳐다보는 한가로운 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를 옥죄는 것들로부터,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음악의 단순한 듣기 기능으로도 가능하다는 말인가? 나의 음악에 관한 짧은 기억은 사실 얼마나 신선한 일탈행동인가?

     

그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내가 건넨 빨간 책 한 권을 내어놓는다. '무라카미의 사랑에 관한 짧은 기억'이라는 책이다. 어느덧 틀어 놓은 ELLA FITZGERRAND의 'You don't know what love is'라는 재즈는 잔잔했던 그의 방을 파도치게 만든다. 재즈는 다민족의 아메리카 합중국을 가장 미국답게 만든 최대공약수이다.

그래서 재즈는 기지촌에서 산 초콜릿처럼 달콤하면서도 처량하다.   


사랑이 뭔지

블루스를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나이가 될 때까지 당신은 몰라요

그것을 잃어버리고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밤을 지새울 때까지

목숨을 걸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키스를 하게 될 때까지

눈물의 맛이 나는 입술을 알기 전까지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모를 거예요

빨갛게 부어오른 눈을 하고

잠 못 드는 밤을 무서워하는

그런 자신만이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때까지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모를 거예요.

     
그가 틀어 놓은 재즈 CD타이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다. (JAZZ is TIMELESS) 재즈를 들으면 세상은 없다? 나는 이렇게 고쳐 읽으며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모를 거예요>의 가사를 시낭송하듯 중얼거렸다.

     
LILLIAN BOUTTE의 <나를 사랑한 그>를 들었으며 윤대녕의 소설 <코카콜라의 여인>에 나오는 <내 마음의 블루>를 계속해서 들었다.

마지막으로 <지상에서 가장 슬픈 곡>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는 Tomaso Antonio Vitali 샤콘느 G 단조를 들었다.

 

  
이제 자야겠다. 클래식 음악의 찌릿한 여운 때문인지 초겨울 밤의 쓸쓸한 어둠과 파리하고 외로운 낙엽 때문인지 쉽게 잠들지 못했다. 늦게 잠이 들었으나 악몽 같은 개꿈 같은 꿈을 오래 꾸었다. 손으로 얼굴을 오랫동안 닦으며 세수를 하는 이상한 그런 꿈을 꾸었으니 말이다. 허허롭게 비어있던 나의 가슴 한 구석을 클래식 음악으로 꽉꽉 눌러 채웠던 그 벅찬 억압과 환희를 내가 어찌 쉽게 감당해 낼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나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믿고 싶은 문학적 자존심의 알량한 껍질을 손으로 벗겨 내려고 그렇게 오랫동안 세수를 한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나의 시간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나를 이 지상으로 밀어 올리고 걸어 다니게 하는 흥분과 감성과 충동과 질서와 모순의 모든 시간들. 그 시간들의 은밀한 갈등과 충격을 세세하게 분석하고 그 혼돈의 갈피 길피를 차분하게 한 번씩 느껴보고자 했던 짧은 하룻밤의 신비스러운 혼돈, 그리하여

"비웃어도 할 수 없어, 짧은 하룻밤이었지만 그때는 말이야,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뭔가 아름답고 안락한 것에 꼭 안겨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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