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조선시대 임금 효종 하면 조건반사적으로 북벌 이라는단어를 떠올리지.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실패한 작전 중에 제일 있어 보이는 게 사실 북벌이지.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통해 우리 국토는 그야 말로 초토화 되었어. 그래도 초강대국 청 나라에 복수를 하기 위해 작전명 “북벌”을 가동한 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어. 사실 북벌의 이면에는왕권 vs 신권의 대립이 감춰져 있어. 먼 소리냐고? 그냥 왕이 시키면 닥치고 돌격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역사를 돌아보면신권이 왕권과의 대결에서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했어.
이제부터 차근차근 설명해 줄 테니 어려워하지 말고 따라들오시길.
1649년 인조반정 후 조선을 제대로 말아먹은 인조의 뒤를 이어, 둘째아들 봉림대군이 31세의 나이로 조선 제 17대 왕으로 역사의전면에 나왔어. 그가 바로 우리에게 북벌의 대명사로 알려진 효종이야.그런데 말이야. 효정은 정통성 면에서 상당한 핸티캡을 가지고 있었어. 작가의 최애 인물 중 한 분인 소현 세자의 의문 가득한 죽음 위에 올라선 왕이기 때문이야.
조선시대 역사를 보면 정통성이 약한 왕들은 신권과 싸우기위한 고군분투의 연속이야.
“이대로 저들에게 조선을 넘겨 줄 순 없지. 국민의 지지도얻으면서 왕권을 강화 시킬 수 있는 핫 아이템이 없을까? 그 것이야 말로 신권약화의 특효약 일 것인데말이야. 그래! 국뽕 만큼 강력한 것이 또 어디 있겠느냐. 북벌이다. 북벌. 오랑캐에당한 치욕을 갚기 위해 온 전력을 왕권으로 집중 시키자는 데 감히 누가 반기를 들고 나설꼬”
“전하! 문제는 역시 송시열입니다. 황공하오나 송시열의 동의 없이 는……”
송시열(1607년~1689년)이 누구인가?
조선왕조 실록에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보다 많이 등장한조선후기 사상계와 정치계의 최대거두. 조선 성리학의 아버지. 이당시 객관적인 전력상 효종의 왕권은 송시열로 대표되는 신권에 적수가 되지 못했어.
효종은 이미 쓰라린 패배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송시열의 동의 없이 북벌을 시도한 적이 있었어. 무과시험을 확대하고 1만이 넘는 군사의 열무식을 여는 등 북벌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신하들에게 던졌어.
그러자, 모든사대부들이 들고 일어 났음은 물론이야.
“대감! 왕이 자신이 진짜 이 나라의 최대 권력자인 줄 착각을하고 있나 봅니다. 우리만 잘 먹고 잘 살면 되는데 북벌을 우리가 무슨 이유로 지지 합니까? 누구 좋으라구요. 더 이상 두고 보고 있다가는 버릇이 영 나빠 지겠습니다. 분부를 내려 주시옵서소.”
“내가 붓으로 참 교육을 좀 시켜야겠소이다. 겁 없는 왕에게는매 보다는 붓이지요.”
송시열은 북벌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따지는 상소를 올렸고, 이에 온 사림이 들고 일어나니, 효종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 날 수밖에 없었어. 조선의 왕이 누구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야.
효종은 2보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작전을 쓰기로 했어.
“전하, 망극하오나 현실을 직시 하시고, 저 들을 북벌 프로젝트에 중용 하시는 것이 상책이 온 줄 아뢰오. 지금은자존심 보다는 실리를 택하시는 것이……”
“조선은 누구의 것이냐? 왕의 것이더냐? 백성의 것이더냐? 성리학이 이 나라를……참으로 원통하도다.
다음 날 인사발령 통보가 내려졌어
“송시열과 송준길을 각각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로 임명하니, 제발입 닥치고 왕의 특명인 북벌에 열과 성을 다하기 바란다. 니 들은 신하고 나는 왕 이라규!”
여기에 추가로 1654년효종은 승지와 사관까지 빼고 송시열과 독대 자리를 마련해. 그 유명한 기해독대의 현장으로 가 보자고. 외견상 신하가 왕과 독대를 하면 신하에게 무척 영광스러운 일 인 것 같지만,실상은 효종의 일방적 구애야.
“송 대감! 그래 공직에서 불철주야 고생이 많소이다. 경들이 이리 열심히 해주니, 나도 몸과 마음을 경건하게 하기 위해주색도 끓고, 오직 북벌만 생각하고 있소이다. 남자 나이마흔이면 그야 말로 인생의 절정기 아니오! 여기 이 팔에 근육 좀 보시오. 앞으로 10년은 너끈하지 않겠소?
“북벌은 현실성이 너무나 낮은 프로젝트라고 이미 수 차례 고언을 올린 바 있습니다.”
“대감. 내 말을 들어보시오. 그게 그렇지가 않아요. 물론 전력상 우리 조선 군만으로는 쉽지 않은작전이오. 허나 우리 조선이 일어난다면 중원의 수 많은 영웅호걸(한족)들이 당연히 일어 날 것이요. 우리 시원하게 북벌 한 번 해봅시다. 송 대감!”
왕이 이렇게 까지 했는데도, 돌아온 송시열의 대답은 충격적이야.
수기형가 : 몸을닦고 집안을 다스린다.
한 마디로 왕 시켜줬으니 내면의 미나 기르면서, 조용히 지내라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참으로묘한 일이 일어나. 오비이락인 거야?
기해독대 2달후 오직 북벌만 생각하며 몸을 만들었던 숙종은 갑자기 승하를 하게 돼. 사망원인은 어이없게도 수전증이있는 의원이 효종의 귀 밑에 종기를 제거하기 위해 침을 놓았는데, 엄청난 양의 피를 쏟아내며 승하를하였다고 해. 그런데 이때 대궐 뜰에 있다가 바로 뛰어든 2명의신하가 있었으니, 정태화, 송시열이었어. 모골이 송연 해지는 느낌을 받은 건 나뿐만이 아니겠지? 실제로 효종암살 설이 존재 해.
효종 승하 후, 그유명한 예송논쟁이 등장해. 예송논쟁은 우리 역사를 붕당의 정치로만 몰아가는 일제식민 사관의 대표적인케이스야. 들어도 들어도 헷갈리고 이런 걸로 싸우고 앉아 있나 한심한 생각이 들 때도 있지?
예송논쟁의 요지는 당대의 성리학자들이 왕권을 어떻게 바라보느냐는거야.
송시열로 대표되는 성리학자들은
“왕이 우리 사대부 위에 있는 특수존재더냐? 천만의 말씀만만의 콩떡이다. 왕은 그저 우리 사대부 중에 서열 1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니라. 그러니 상복도 우리 사대부가 입는격식을 갖춰 입으면 되는 게야. 말.”
반대파는
“왕은 하늘과 같소이다.. 어찌 사대부를 비롯한 일반인들과같은 격식을 적용한다는 말이요. 이는 천부당 만부당한 말이외다.
“먼 개소리야! 왕은 그저 사대부 중에 1등이라니까 그리고 효종은 적 장자도 아니잖아. 그러니 3년복은 됐고, 1년 복으로 충분해.
효종 사망 후 15년이지난 1674년(현종15년) 3월 청나라에서 파견 근무 중인 요원들에 의해 한 편의 긴급한 보고가 타전됐어.
“전하! 오삼계의 난이 심상치가 않습니다.”
“오삼계라 함은 본래 명나라 장수였다가, 청나라 군사를 도운자가 아니냐? 그 자가 청 나라를 상대로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냐? 소상히보고해 보거라”
“오삼계는 청나라에 충성서약을 한 대가로 평서 왕 자리를 차지 하고 있었습니다.”
“거기까진 나도 알고 있다. 그 자 외에도 상가희, 경층층 등도 있지 않느냐?
“그런데 이 자들이 청에 눈치를 더 이상 보지 않고 세력을 키워 나가자, 청나라 강희제가 이 자들을 제거 하기로 하고, 철번령을 내렸습니다.”
“어차피 명나라가 뿌리인 자들이니, 가만히 있지 않고 난을일으킨 게로구나. 그래 현재 상황이 어떠하냐?”
“현재 난에 가담하는 세력이 많아져서 중원은 난리가 났습니다. 어쩌면북벌을 위해 선왕이 내려 주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옵니다.”
이것은 15년전 기해독대 때 효종이 예상했던 시나리오야. 북벌의 기회가 효종의 아들 현종에게 굴러 들어 온 거지.
이 때를 맞춰 재야의 거물 윤휴가 북벌을 강력히 주장하는비밀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그 내용을 풀어 보면
“우리 조선의 정예로운 병력과 신기에 가까운 활 솜씨는 천하게 소문이 나있습니다. 여기에 화포와 조총을 곁들여 1만의 병사로 북경을 향하고, 바다로는 명나라 부흥을 꿈꾸는 세력과 힘을 합쳐야 합니다. 중원의다른 자들에게도 격서를 보내 같이 일어나게 한다면 천하의 충의로운 기운을 격동 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상소문은 유시민 작가님의 항소 이유소 처럼 한양을발칵 뒤집어 났어.
그러자 북벌을 하고 싶지 않은 당시 기득권은 똥줄이 탔고, 청나라에 관한 상소는 무조건 받지 말라는 생떼를 쓰기 시작했어. 윤휴가북벌을 외치는 상소가 장안의 화제가 된지 한 달 후, 현종은 34세의나이로 승하를 하게 돼. 참으로 묘하지?
현종을 이어 숙종이 왕위에 오르고 재야에 있던 윤휴는관직에 오르게 되었어. 윤휴가 본격적으로 북벌을 주장하니 그는 그야 말로 송시열로 대표되는 집권층에게는꽃밭에 나는 잡초 같은 존재였어.
이유인 즉 슨 윤휴는 재야에 있을 때부터, 주자학을 유일사상으로 내세우는 기득권에게 딴지를 걸었어.
세상의 모든 종교는 위대해. 단지 그를 악용하는 하찮은 인간들이 사악 할 뿐이지. 세상에 나쁜종교는 없어. 다만 나쁜 스님, 목사님, 신부님 등이 있을 뿐이지. 특권층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성리학의일부분을 이용한 당시 기득권에게 윤휴는 두 눈을 부라리고 잘못을 지적했던 거야.
“대감, 윤휴 이 자 때문에 요즘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군사력 증강을 위해 전차와 화포 개발 프로젝트를 들고 오는 등 장난이 아닙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인간이 호포제를 들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군사력증강을 위해서는 양반도 천한 백성들과 같이 세금을 내라는 주장인데 어찌 이것이 가당 키나 합니까? 그저국방의 의무는 천한 것들이나 지는 것인데, 이 자는 도대체 양반인지 상놈인지. 원! 빨갱이가 분명합니다. 대감어찌 할까요?”
기가 막힌 것은 윤휴와 같은 정당에서도 윤휴를 과격분자취급 했다는 거야.
효종 이후 왕이 2번이나바뀌는 동안에도 절대권력을 유지하고 있던, 송시열은 결단을 내렸어.
“여보세요 들. 꽃밭에 잡초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말이외다. 뿌리를 뽑는 것이에요. 천한 잡초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뿌리를뽑아야 한다 이 말입니다.”
송시열의 압박이 아니어도 숙종은 윤휴와 북벌은 부담이었어.
“전하. 윤휴는 이제 버려야 할 카드 인 줄로 아뢰오.”
“오삼계가 죽고 나니 삼번의 난이 기세가 완전히 꺾였구나. 윤휴는아직도 북벌을 주장하고 있으니 청나라가 전열을 정비하면? 어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여름이 오기 전에 꽃밭에 제초작업을 마무리 하도록 하여라.”
1680년 5월20일윤후는 사약을 받았고, 그의 죽음과 함께 북벌의 꿈도 완전히 사라졌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