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독립운동가의 성지 : 안동

by 김재완

파락호 : 재산이나세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어.

오늘날에도 이런 파락호들의 활약(?)상을 뉴스를 통해 종종 접하게 되는데, 100여년 전 안동에서도유명한 파락호 한 분이 계셨으니!

이분은 무려 200억원대의 재산을 노름으로 깔끔히 탕진하셨다고 알려진 분이야.


사실 이분은 1908년부터의병 활동 및 독립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분이셨으나, 19922년 일제에 3번째 체포를 당하신 후 돌변하셨다고 해.

“독립운동은 무슨 독립운동 나는 이제 승부사의 길로 접어들련다.”

하루가 멀다고 도박판에 출근하고 밤을 지새우니 뼈대 있는집안인 문중에서도 쓴소리가 끓이질 않았어.

“이보게! 정신 좀 차리게!이게 도대체 머 하는 짓인가? 그 많던 재산이 이제 바닥을 보이네!”

“어허! 인생 한방 인 거 모르십니까? 내 돈 가지고 내가 뭘 하던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자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진 건가? 그래도 한때는 독립운동을했던 사람 아닌가!”

그는 심지어 외동딸의 혼수비용까지 손을 대셨다고 하니, 그 딸은 그런 아버지가 부끄러워 제대로 외출도 못 했다고 해.


그런데!

1946년 김용환 선생이 60세를 일기로 사망하기 직전, 최측근이 그를 찾아와서 놀라운 사실을 말했어.

“선생님! 일본군을 속이기 위해, 노름꾼으로 위장한 사실을 최소한 가족에게는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많은 돈을 전부 독립운동자금으로 만주로 보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가족까지 속이지 않으면 분명히 그놈들에게 꼬리가 밟혔을 것이야. 그리고선비로써 당연히 해야 할 일인데 이제 와서 굳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겠나. 내 조국의 독립을 보았으니아무 상관이 없네.”


김용환 선생의 이런 비밀 프로젝트는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고, 외동딸은 1995년에야 아버지의 공로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게되었어. 이에 그녀는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라는 시를 남겼는데 일부를 소개하며 독자 제위 여러분의 심금을 울려 보려 해.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김용환 선생의 일생은 드라마 “미스터 션사인” 에서 변요한 배우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해.


안동하면 찜닭이나 하회마을을 떠올리는 분 들이 많은데, 이 곳은 독립운동가의 성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통계적으로도이를 증명하는데, 독립운동가 보유 1위 도시가 바로 안동이야. .


특히 경상북도 독립운동 관이 위치한 ‘내앞마을’은 1910년대당시 마을 인구가 700여명이었어. 그런데, 이 작은 마을에서 무려 17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니 이 엄청난숫자 무엇?

이중환의 택리지에서 ‘내앞마을’을 아래와 같이 묘사하고 있어.

“말간 비단 사이로 밝은 달이 비치는 형상과 같다. 가히삼남 사대 길지 중 한 곳이다”


안동지역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하면서 “혁신 유림”이라고 불리는 아래의 세 분을 빼놓을 수가 없어.

먼저 제일 큰 형님이시며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시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내신 석주 이상룡 선생을 소개할까 해. 이상룡선생의 생가인 임청각은 한때 99칸의 저택에 400여명의노비가 있었다고 해.

독립운동을 위해 전 재산을 처분하고 간도로 떠나기로 결심한어느 날, 선생은 모든 노비를 불러 모으셨어. 그리고는 안동지역에서최초로 노비 문서를 태우며 비장한 한마디를 던져.

“너희도 이제는 독립군이다.”

이상룡 선생은 간도로 떠나기 전 조상님을 모시던 신주를모두 땅에 묻고 가셨다고 해. 일제에 의해 훼손될 것이 두렵기도 했겠지만 조선 성리학의 심장과도 같은안동의 양반가에서 행하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을 거야. 그러나, 나라의독립을 위한 일이라면 재산도 전통도 후 순위라는 생각이 아니셨을까?

누군가 선비 된 도리로써 공부는 어찌합니까? 라고 던진 우문에는 아래와 같은 현답을 남기셨어.

“공자와 맹자는 시렁 위에 얹어두고 나라를 되찾은 뒤에 읽어도 늦지 않다”


문재인 대통령께서는 후보자 시절 안동에 들러 임청각의복원을 약속하셨다고 해. 일본은 이상룡 선생의 집안 정기를 끓겠다며 집을 허물고, 철도까지 내는 만행을 저질렀어. “미스터 션사인”의 김태리 배우의 집이 겪은 일이 임청각에 실제로 일어났던 거야. 김은숙작가님도 안동의 독립운동가 집안에 큰 감명을 받았음을 미루어 짐작 할 수 있어.


다음 분은 동산 유인식 선생님이야.

신간회 안동지회 회장을 지내기도 하신 유인식 선생은 성리학의정신적 지주를 자처하던 안동에서 애국계몽운동을 펼치신 분이야. 내천마을에서 협동학교를 세우시고 유림의개화에 크게 기여를 하셨어.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안동에서 애국 계몽운동에 대해 반대가 엄청났다고 해.

그 결과, 유인식선생은 존경하는 스승에게는 파문을 당하고, 사랑하는 아버지에게는 부자와의 관계까지 절연 당하는 아픔을겪으셨어. 일본과 싸우기 전에 지역 내 편견과 먼저 싸우셔야 했지만,이 모든 걸 이겨 내셨기에 역사 학자들은 이 분들을 혁신유림이라고 칭하고 있어. 물과 기름보다섞이기 어려운 것 같은 혁신과 유림이 나라의 독립이라는 목표아래 한 단어로 나오게 된거야.


이 혁신유림 트로이카의 마지막 분은 ‘만주의 호랑이’라 불리며 국민대표회의 의장을 지내신 일송 김동삼 선생이야. 이분도 안동 내앞마을에서 1878년에 태어나셨어. 집안의 어른들이 이미 의병장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식 선생의 협동학교에도함께 할 정도로 깨인 정신을 가지신 분이었어. 국내에서의 독립운동이 여의치 않자 이상룡 선생 집안을필두로 김동삼 선생의 친인척들이 모두 전 재산을 처분하여 만주로 떠나게 되셨어. 원래 안동에서 김천까지도보 이동 후, 기차를 탈 예정이었으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추풍령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해.


이후 김동삼 선생은 30여년간오직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살아오시다 1937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셨어. 만해 한용운은 평생 딱 한 번 눈물을 흘렸다고 하는데, 바로 평소존경하던 일송 김동삼 선생의 장례를 직접 주관했을 때라고 해. 김동삼 선생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해는한강에 뿌려졌는데.


“나라 없는 몸 무덤은 있어 무엇 하느냐. 내 죽거든 시신을불살라 강물에 띄워라. 혼이라도 바다를 떠돌면서 왜적이 망하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을 지켜보리라.”


우리가 흔히 한 분야의 뛰어난 인재를 보고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하다’ 라고 하는데. 이 세 분은 10년 주기로 안동지역에서 태어나셨어. 안동 아니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을 위해서 신이 내려주신 선물이 아닐까?

이 세분이야말로 보수의 진정한 가치와 품격을 제대로 보여주신것이 아닐까?


한사코 모든 것을 버리고,

기필코 나라의 독립을 이루겠다고 분연히 일어선 당신들!

결단코 잊지 않겠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의도된 실패 북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