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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

by 김재완

2017년 7월 대한민국의 퍼스트 레이디 김정숙 여사께서 독일 베를린의 한 묘소를 참배했어. 이 묘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우리만 잘 모르는-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 선생님의 묘지였고, 여사님의 개념과 센스가 장착된 나무 한 그루가 화제가 되었어. 그 나무는 바로 윤이상 선생님의 고향인 통영에서 직접 공수해온 동백나무 한 그루였어. (동 베를린을 한자식으로 표현하면 동백림이 됨)


현장에서 있었던 여사님의 인터뷰를 잠시 인용하면,

“저도 음악을 전공했던 터라 평소 윤이상 선생님을 음악을 잘 알고 있어요. 그렇지만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대단한 음악가이신 선생님께서 생전에 일본에서부터 배를 타고 통영 앞바다까지 오셨다가 정작 고향 땅을 밟지 못했다는 얘기를 듣고 많이 울었습니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하신 선생님을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어요” 라는 취지의 인터뷰를 하셨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이름 작곡가 윤이상. 그가 얼마나 잘나갔던 음악가였는지. 왜 고국으로 오지도 못하고, 배를 타고 먼 발치에서 통영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었는지 그의 일생을 되짚어 보자고. 골 때리는 사건이 기다리고 있으니 억장이 무너질 준비들 단단히 하시길.


윤이상 선생님은 1917년 경남 산청군에서 태어나 통영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어. 어린 시절부터 모차르트 급 천재의 포스를 마구 뽐내시는데, 14세부터 독학으로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고 해. 나라 잃은 조선에서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겠어. 일본에서 음악 공부를 하고 20대 후반에는 귀국을 하여 누구처럼(?) 일본군으로 들어 간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다가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어. 이후 나이 마흔을 앞두고 유럽으로 건너가 프랑스와 독일에서 클래식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지. 지면 관계상 클래식 이야기를 오래 할 수 없다라고 말하고 클래식에 대한 식견 부족이라고 읽는다. 선생님에 대한 외국의 평가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위대한 음악가인지 짐작이나 좀 해보자고. 우리나라 이런 외국 언론이나 기관의 평가 굉장히 신뢰하고 좋아하잖아^^.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곡가 50인”

“현존하는 5대 작곡가”

“독일 연방 공화국 대공로 훈장 수여”

뉴욕의 한 공연장에는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작곡가와 함께 윤이상 선생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하니. 님 들이 상상하던 이상이지?


어떤 음악인들은 윤이상 사망 100주년 즈음에는 모차르트 급의 대우를 받을 거라는 평론을 하는 양반도 있긴 한데, 암 세상일 모르지. 내가 작가 될 줄 누가 알았나. 글을 쓰기 위해 윤이상 선생님의 음악을 집중적으로 좀 들어봤는데.

오! 놀라워! 너무 어려워! 본인도 클래식 들은 지 10년 정도 되기 때문에, 서당개 정도는 되는데, 너무 어렵더라고. 천재의 포스가 팍팍 느껴지는 음악이야.

그런데 말이야. 이렇게 잘 나가던 천재 음악가 윤이상을 고국에서는 상당히 변태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애정(?) 표현을 했어. 세계가 지켜 보는 가운데 독일현지에서 한국의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납치에 가까운 연행을 당하게 되는데, 이 당시 나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 지고 있었는지 이제 살펴 볼 시간이야.


1967년 5월3일 제6대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또 선출된(?) 그는 더 나은이 아닌 더 편한(?) 국정운영을 위해서, 같은 해 실시된 6.8 국회의원 선거를 조직적으로 잘 재단을 했어. 헌데 문제는 국민을 개 돼지로 알았는데 이것들이 생각보다 똑똑해서 막 짖어 되기 시작했어. 특히 공부하라고 대학 보냈더니 데모나 하는 등골브레이크 대학생들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고딩들까지!

시위는 일파 만파로 퍼져나갔어. 조작 또는 부정으로 심히 의심 되는 선거를 마친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전혀 예상치 못한 국면을 맞은 행정부는 전국에 휴교령을 내렸어.

그런데, 위대한 지도자(?)께서 내린 휴교령을 무시하고, 싸가지 없는 학생들은 7월3일에는 급기야 1만5천명이나 거리로 나와서 부정선거 규탄시위를 해댔어. 국정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참으로 골치가 아팠겠지? 총으로 다 쏴 버리기에는 너무 많아 애들이. 에이……설마 그런 생각은 안 했을 꺼야. 국민을 지키는 게 나라 하는 일인데 말이지.


아무튼 다음 날 정부는 크리스마스도 아닌 한 여름에 산타 할아버지처럼 전국에 조기방학이란 선물을 내려주셨어. 그런데 설상 가상으로 닥치고 공부나 해야 할 어린 노무 새끼들 + 우매한 어른들까지 합세해서 시위는 마치 어떤 광장의 촛불처럼 번져 나갔어. 그러고 보니 1967년 이면 영화 1987의 딱 20년 전이군.

정부는 과연 어떤 방법으로 이 난국(?)을 타개 했을까? 제일 좋은 건 부정선거를 안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래도 이왕 엎질러진 일이니 수습을 하긴 해야겠지?

“아……저 빨갱이 새끼들.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말이야. 전쟁 끝난 지 100년이 지났어? 나라에서 그렇게 한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건데, 하여튼 조선 것들은 등 따시고 배부르게 해주면 안 된다니까?”

(작가 생각 : 어린 시절 저런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항상 드는 생각이 저 인간은 극우주의 쪽바리 새끼인가? 왜 유체이탈 화법을 쓰는 거지? 아니면 뼈 아픈 자아성찰을 통해서 자신은 맞아야만 한다는 자기 반성의 결정체 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

“부장님 어떻게 할까요? 국면 전환용으로 큰 거 하나 터트릴 시점이 왔습니다. 딴다라들 연애 하는 이야기로는 사태 수습이 안될 거 같습니다..”

“그래. 그 짱구 좀 잘 굴려봐. 저것들 한 방에 잠재울 수 있는 획기적인 걸로 말이야. 시간이 없어. 이러다 임자랑 내 모가지도 온전치 않겠어.”

“제가 누굽니까? 흐흐흐 이미 잘 차려 놓은 밥상이 있습니다. 다음 달 초에는 부장님이 기자들 불러 놓고 그저 숟가락만 올려 놓게 해드리겠습니다. 딸랑딸랑.”

1967년 7월8일 중앙정보 부장 김형욱의 입에서 나온 말은 우리나라를 아니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어. 이 발표는 10일간 7차례나 이어지는데, 이 소식으로 부정선거 규탄 시위는 결국 잠잠해지고 말았어.

“아.. 아.. (이 씨x 이거 마이크 제대로 켜진 거야?)”

“(부장님.. 켜졌습니다. 지금 온 에어입니다.)”

“(그래?) 지금부터 동 베를린 간첩(조!작!)단 사건에 대한 브리핑을 시작 하겠습니다. 아래의 인물들은 동독의 수도인 동 베를린을 거점으로 북괴와 접선은 물론 북한을 오가면서 그 들의 지령에 따라 간첩활동을 통해 대한민국의 적화 통일을 꾀하였습니다. 각 분야별 주요인물로는 문화예술계 윤이상 이응로, 학계 황성모, 임석진 문화계 천상병 등 수도 없이 많습니다. 아이고! 씨발 여기가 무슨 빨갱이 천국이야? 아 이 멘트는 빼세요. 사회 문화계 전반에 걸쳐 무려 194명에 이르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간첩 사건이 일어났는데, 지금 데모나 하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효과는 만점이었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소위 잘 나가던 사람들도 간첩으로 잡혀 오는 판에 한국에 있는 학생이나 나 같은 서민 나부랭이들이 겪었을 공포감은 감히 짐작 하기도 힘들어. 이 당시 간첩이라는 족쇄는 조선시대 역적 보다 무서운 말이었어. 그런데 군사정부와 중정이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음악가 윤이상의 세계적 명성이었어. 독일정부는 물론이고 세계 각국에서 한국 정부의 비인도적인 처사를 맹비난했어.

“한쿡 정부 돌 머리입니까? 윤이상이 지큼 누군지 알코 저런 식으로 납치 하다시피 데려 간 겁니까? 한쿡은 국켝도 없습니까? 오! 한쿡 너무 미개합니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틀 절대 가만 있지 않을 꺼 에요.”

중정은 윤이상 선생에게 8.15 행사에 대통령이 직접 초청 했다는 거짓말로 귀국 시켜, 짐작 던지듯이 감옥으로 던져 버렸고, 그 보다 조금 아래라고 생각한 사람들은 서독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강제 납치 후 한국 감옥으로 수송 또는 중정 요원들이 여권이나 시민권을 가지고 협박을 하면서 강제송환 시켰다고 해.


그렇게 눈치를 보던 선진국들의 거센 항의에 쫄았는지, 국내 정치문제 해결이라는 과실을 따먹어서인지, 채 3년도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을 흐지부지 종결 시켜버려.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받은 사람들도 특사로 풀려나거나 강제 추방 형식으로 일단락을 시켜 버렸어. 윤이상 선생도 1심 무기징역에서 출발하여 2.3심을 거치면서 10년형을 받고 1969년 3월에는 서독으로 추방 되셔. 왜 그래쓰까? 건국이래 최고의 간첩단 사건이라고 연일 보도를 해 되더니 말이야. 이유야 간단하지. 첨부터 머가 있었어야지.


하지만 강제연행 후 취조 과정에서 가해진 각종 고문은 피해자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어. 1987년 보다 무려 20년 전의 일이야. 고문 과정이 더하면 더 했지 결코 덜 하진 않았을 거야. 정신적 피폐함은 물론이고 교통사고 후유증 보다 심한 물리적 고통이 평생을 따라 다니신 분들도 많다고 해. 심지어 자녀를 가지게 되지 못한 한 시인도 있었어.


이 분들의 억울함은 무려 40년이 지난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정부 때 과거사 위원회의 조사로 조금이나마 풀어지는데,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죄가 필요하다며, 다른 행정부가 인정을 한 거야. 피해자 분들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늦었지만 조금이라도 마음의 위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야.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어. 윤이상 선생님 1995년에 세상을 떠나셨어. 그래도 조국이라고 석방 후 고국 방문을 추진 하셨지만 군사정부는 윤이상 선생님의 사과가 먼저 라는 공식 입장을 발표하며 그의 귀국을 허락 하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야? 멀 사과 하라는 거지? 아무 의심도 없이 대통령의 친서만 보고, 중앙정보부 요원을 따라 귀국 한 후 구속 된 죄? 위대한 음악으로 세계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대한민국의 이름을 한껏 드높인 죄? 그도 아니면 없는 죄를 만들어 내지 못한 죄?


사실 윤이상 선생님은 박정희 대통령을 동백림 사건이 있기 3년 전인 1964년 독일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해. 간호사와 광부 파견 건으로 독일을 방문한 박정희는 독일 대통령이 마련한 클래식 공연이 빨리 끝나고 둘 만의 독대를 하고 싶었을 거야. 그런데, 윤이상의 광 팬인 독일 대통령은 윤이상의 곡 연주가 끝나자 둘 사이에 앉아 있던, 대통령에게는 질문도 안하고, 윤이상에게만 방금 연주된 곡에 대해서 줄곧 질문을 했다고 해. 설마………그 분은 이런 일을 마음에 담아 드실 분이 아니야. 그분의 따님도 어디 국민 스포츠 영웅 김연아 선수에게 서운한 마음을 가지거나 삐 졌겠어? 밑에서 일하는 분들이 더러운 노예근성으로 알아서 여느님을 까다가 괜한 오해를 받으셨잖아. 하여튼 문제는 밑에서 오바 하는 것들이야. 그냥 머 불편한 심기 정도 -눈에 띄게- 내셨겠지.


아무튼 이런 말도 안 되는 부당한 누명을 쓰고도, 그리운 너무나 그리운 고국 땅을 생전에 밟아 보지도 못한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 선생님을 위해! 대한민국의 퍼스트 레이디가 그의 고향에 있던 동백 나무를 가지고 묘지라도 방문을 한 거야.

윤이상 선생님은 ‘왜 이제야 왔소? 난 아직 대한민국에 삐쳐 있소이다’ 라고 하셨을까?’ 아니면 ‘내 다 잊었소이다. 앞으로 내 옆을 지킬 동백나무가 있어 마음 든든하오. 다만 다시는 나 같은 억울한 희생자가 안 나오게 잘 부탁하오’. 라고 하셨을까?


오늘 이야기는 동백림 사건의 또 다른 피해자 천상병 시인의 시 한편으로 마무리를 대신 할까 해. 위에도 언급 했지만 천상병 시인도 중앙정보부에 끌려 가셔서 전기 고문을 당하셨고, 심신이 모두 망가지셨어. 그런데 이 순박한 시인의 죄목은 멀까? 놀라지마!

<천상병은 간첩인 친구 강빈구에게 공포감을 조성해 막걸리 값으로 500원, 1000원씩 받아 먹으면서 수사기관에 일체 보고를 하지 않았다. 이에 불고지죄와 공갈죄, 반공법으로 체포한다.> 탁 하고 책상을 치니까 억 하고 죽는 대학생도 있다는 데 멀.. 두 군사정부는 참 묘하게 닮았어.


<소풍 / 천상병>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의 삶이 소풍이었다고.

그 소풍이 아름다웠더라고.

오늘

한쪽의 일터에서는 굴뚝 위에서 농성을 하고

바람이 바뀌었다고

다른 쪽의 사람들은 감옥으로 내 몰리는데

이 길이 소풍길이라고

따르는 식구들과

목마 태운 보따리

풀숲에 쉬면 따가운 쐐기

길에는 통행료

마실 물에도 세금을 내라는 세상

홀로 밤길을 걷고

길을 비추는 달빛조차 몸을 사리는데

이곳이 아름답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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