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언제부터 사는 (living) 곳이 아니라 사는 (Buying) 것 이 되었을까? 답을 찾기 위해 대한민국에서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소시민인 나의 집 연대기를 둘러보고, 한국의 대표적인 주거 공간인 아파트에 대한 조금 다른 생각을 정리해 보기로 했다.
1982년, 초등학교 수업을 마친 내가 -페인트 칠이 벗겨진- 녹색 철문을 밀면, 당시 시골에서 흔하지 않던 견종인 셰퍼드 보비가 난리를 치며 나를 반겼다. 그러면 나는 이모가 입학 선물로 사준 쓰리세븐 가방을 둘러멘 채 녀석과 레슬링에 가까운 인사를 나눴다. 개털 묻는다는 엄마의 잔소리에 어린 나는 비로소 안락한 집에 도착했음을 마음으로 확인했다.
보비 집 옆에는 5평 남짓한 화단이 있었는데, 그곳은 결혼 십 년 만에 자가를 마련한 엄마의 스케치북이었다. 삼 남매를 키우느라 손이 부족해진 엄마는 내가 열 살이 되자 화단에 물 주기 임무를 맡겼다. 나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한 후, 화단에 있는 엄마의 작품에 물을 덧칠했다. 어린 나는 화단의 땅이 파이는 것이 싫어서, 물이 떨어지는 포물선을 최대한 원만하게 그리기 위해 애를 썼다. 특히 엄마가 아끼고 나도 좋아하는 수국에 물을 줄 때는 오래된 문화재를 다루듯 심혈을 기울였다. 꽃잎 하나 떨어질세라 옆집의 벽에 물을 뿌려 충격을 줄인 물이 수국에 안착하게 했다.
화단 옆에는 야외 화장실이 있었다. 80년대의 시골 한옥집은 밤이 되면 반드시 등장하는 전자제품이 있었다. 그것은 일명 후라쉬였다. 육각형의 육중한 전지가 들어간 후라쉬는 그야말로 까만 밤을 밝히는 등대였다. 안방과 부엌 사이의 골방에는 요광이 있었지만, 배탈이라도 나는 날에는 용기를 내어 야외화장실로 가야 했고, 후라시는 그야말로 등불이 되어 주었다.
그 집에는 오늘날 평수가 넓은 아파트에만 있는 팬트리의 역할을 하는 광이라는 곳도 있었다. 각종 음식들이 있는 이 보물창고는, 엄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 누구의 접근도 쉽사리 허용되지 않는 우리 집의 51 구역이었다. 그러나 나 만은 예외였는데, 자신의 유년기를 콩쥐에 비유하는 여동생의 증언에 따르면 과자선물세트나 귀한 음식이 들어오는 날에는 엄마가 나만 따로 불러 광으로 들여 보였다고 한다. 광의 한편에는 동화책이 있었고, 나는 책을 읽으며 각종 산해진미를 혼자 먹고 한참이 지나서야 나왔다는 것이다. 어른이 된 동생이-여전히 가시 돋친 목소리로- 우리 엄마의 아들 사랑이 유별났노라고 웃으며 말할 때, 엄마의 눈빛에는 미세한 흔들림이 있었다.
가스레인지도 없던 시절, 엄마는 한 여름에도 연탄불 위에서 국을 끓이고, 고기를 구웠으며, 겨울밤이면 고구마와 장독대에서 꺼낸 동치미로 우리의 몸을 키우고 추억을 심어주었다. 그 집에서의 겨울은 오늘날 아파트에서 체감하는 추위보다 혹독했지만, 집 값에 포함되지 않은 온기가 서려있었다. 인간은 소중한 것을 잃었을 때 그 가치를 깨닫는다. 청춘의 나는 시골집을 떠나는 것에 흥분했고, 도시의 고단함에 무지했었다.
서울에서 첫 집은 언덕을 넘어야 다다를 수 있는 반 지하였다. 반 지하는 일 년 내내 별로였지만, 여름이 최악이었다. 장마철이면 습기로 인해 벽지가 떨어지는 건 기본이고, 냄새와 습기가 심신을 짓눌렀다. 환기를 위해 행인의 다리가 보이는 창문을 열면, 취객의 오물이 방안으로 침범하는 날도 있었다. 그곳에서 이년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함을 몰랐던 젊음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동네의 소식을 다시 접한 것은 이 십 년이 지난 어느 해 여름, 뉴스를 통해서였다. 강산이 두 번이나 바뀌었음에도 반 지하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남았고, 살아남지 못한 것은 그곳에서 살던 내가 아닌 다른 이였다..
반 지하에서 옥탑방을 거쳐 서울 생활 칠 년 만에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다. 산 꼭대기에 위치한 준공 이 십 년을 훌쩍 넘긴 아파트였지만, 나에겐 베벌리 힐스였다. 몇 년간 모은 돈으로 전자제품 매장에서 전시용 PDP TV와 드럼 세탁기를 구매했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대형 TV는 자취생의 로망이었고, 이사를 할 때마다 버리지 못했던 통돌이 세탁기는 애증의 대상이었다. 사시사철 문제없이 돌다가 겨울에 한 번씩 탈수기능이 변덕을 부렸다. 겨울밤, 고무장갑을 끼고 손으로 빨래를 쥐어짜며, 나의 분노와 욕망은 최신형 세탁기로 집중됐다. 자동차 대신 TV와 냉장고를 산 나는 확실히 현부양부의 성향을 타고 태어났다.
18평 아파트 생활에 적응할 때쯤 HJ를 만났고, 꿈에 그리던 경기도 북부의 24평 임대아파트에 당첨되었다. 어쩌면 우리의 결혼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신혼집이라는 현실적 어려움이 해결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역세권도 아니고, 자가도 아니며, 회사와 한 시간 거리로 멀어졌지만, 우리는 기꺼이 경기도민이 되었고, 팔 년을 아파트에서 살았다.
아파트는 층간 소음 덕에 고전했지만 대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결정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가 입주했던 임대 아파트는 일정기간이 지나면 분양전환 되는 시스템이었다. 월세를 낸 임차인에게 주변 시세보다 낮은 가격으로 우선 분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부모님의 도움 없이 모든 것을 쌓아나가야 했던 나에게 일억이 안 되는 보증금으로 경기도에서 이런 아파트에 살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당시 아파트 값은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지인들은 우리가 당연히 이 아파트를 매매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선택은 조금 달랐다. 우리는 아파트를 사는(Buying) 대신 살기(Living) 좋은 신축 빌라를 매매했다.
우리의 결정에는 나름 철학적인 이념과 실존적인 이유가 작용했다. 먼저 대출 없이 아파트를 살 현금이 없었다. 대출을 받아 아파트 매매는 가능했지만, 대출 이자로 인해 우리가 좋아하는 많은 것들을 오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로 미루지 않기로 했다. 살림이 팍팍해지면 마음이 궁핍해지고 이는 필연적으로 부부 사이에도 문제로 이어질 것이다.
세상이 진화하는데 빌라만 퇴보하지 않았다. 주변 신축 빌라를 둘러본 HJ가 먼저 빌라로의 이사를 제안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단지 아파트라는 이유만으로 빌라 가격의 몇 배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의견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반대 의견이 우리를 잠시 흔들리게 했다. 그들의 주장은 아파트는 사는 곳이 아니라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생각을 정리했다. 아파트로 돈을 벌려면 두 채 이상의 아파트를 보유해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대출 없이 복수의 아파트 매매가 가능한 인구가 얼마나 될까? 부동산 투자로 돈을 번 주변의 사람이 있나? 운 좋게 본인이 가진 단 한 채의 아파트 가격이 급등해도, 더 오를 날을 기대하며, 추가 대출로 새로운 아파트를 매매하고 은행에 시간을 저당 잡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결과, 일상의 많은 시간을 예측 불가능한 부동산 시장분석에 매몰되는 것을 우리는 납득할 수 없었다. 아파트 한 채로 현실의 금전문제와 노후대책 및 자녀 양육비까지 해결하려다 보니 꿈이 사라져 버린 건 아닐까?
철학적인 문제는 투기라고도 불리는 부동산 시장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한국의 모든 부자들이 빌딩과 아파트를 사지는 않는다. 기성세대가 아파트에 집착하다 보니 주택문제는 점점 심각해지고, 후대는 사회 진출의 벽이 더 높아지고 있다. 한국 사회의 병폐에 상당 부분이 아파트에서 기인한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아파트 가격도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결정된다. 아파트에 대한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이 빌라나 단독주택 등을 선택한다면 아파트 가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은 현실주의자와 몽상가가 공존해야 건강해진다. 우리는 행복한 몽상가가 되기로 했다.
이사를 하던 날의 습도까지는 아니어도, 많은 것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당과 수국이 있던 고향 집을 떠나 물의 나라였던 반 지하와 천상의 나라였던 옥탑 방을 거쳐 인생 첫 나의 집이 생겼는데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으랴! 고백하자면 며칠 동안은 배도 덜 고프고, 잠을 설쳐도 개운하고, 집에 누워있기만 해도 마냥 기분이 좋았다. 내 빌라가 발리의 고급 휴양지보다 안락했다..
몇 년 후, 전염병이 온 세상을 덮치더니, 주택담보대출 금리가 폭등했다. 우리가 조금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일상도 심각한 위협을 받았을 것이다. 집을 투자의 목적이 아니라 살아가는 공간으로 규정하니, 부동산의 등락은 남의 일이 되었고, 우리는 서로에게 더 집중하고, 조금 더 행복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