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하실 말씀이 있는 듯한데. 좋은 말씀 부탁드립니다. 무슨 말씀이 둔 지 따르겠나이다.”
“공의 마음가짐이 그러하다니 말씀드리지요. 집을 다시 지으실 여력이 되시지요? 제 말대로 새집을 짓는다면, 귀한 아들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아들은 이 댁뿐만 아니라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만한 인물이 될 것입니다.”
도선의 말대로 집을 지은 왕륭은 얼마 후, 아들 왕건을 얻게 되었다.
다.
“스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스님이 일러준 말씀은
“실은 이번에는 공이 아니라 아드님을 보러 왔습니다.”
“우리 왕건이를?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아드님을 만나서 직접 전할 말과 책이 있습니다.”
“
도선이 왕건에게 준 서책은 병법일 수도 있고, 풍수지리에 관련된 것일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으나 오늘을 사는 우리가 알 길은 없다.
“몇 해 후, 용맹한 이가 송악에 이를 것이오. 당장은 그의 기세가 워낙 높아 두 분이 감당하기 어려우니, 몸을 낮추어야 합니다.”
896년 왕건이 스무 살이 되던 해, 마침내 궁예가 송악 인근에 당도했다. 왕륭이 왕건을 불렀다.
“건아 궁예가 오고 있다”
“아버님! 궁예 장군은 공도 벌도 공평하게 나누어 병사들에게도 덕망이 높고, 그의 기세를 당장은 막기 어렵습니다. 아버님께서 주변의 다른 호족까지 설득하시어 그에게 귀부 한다면, 능히 받아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 준 후에 단 한 가지만 부탁한다면 궁예 장군도 거절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청이란 것이 무엇이냐?”
며칠 후, 왕륭은 은밀히 궁예를 찾아갔다.
“궁예장군! 송악에 터를 잡고 있는 왕륭 인사 올립니다. 저희는 장군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기로 하였습니다. 부디 부족한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궁예는 패서지역의 노른자인 송악을 너무나 쉽게 손에 얻게 되어 적잖이 놀랐다. 왕륭은 궁예를
‘
“고맙소이다. 송악의 대표 호족인 공이 이리 나서주시니 마음의 큰 짐을 덜었습니다. 우리 함께 손잡고 대의를 위해 나아갑시다.”
“장군! 소신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저에게 왕건이라는 자식이 하나 있습니다. 장군께서 곁에 두시고 부리신다면 능히 제 몫을 해낼 것입니다.”
이렇게 청년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곧 펼쳐질 대혼돈의 시대에 입문하게 된다.
왕건은 성 축조 관리, 감독을 시작으로 기마병의 수장 등 주어진 임무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리며 궁예의 신임을 얻게 된다.
왕건이 군사로써 경력을 쌓아 갈 때쯤 궁예의 위상은 양길을 위협하게 되었다. 양길과 궁예는 각자의 길을 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둘 중의 하나가 반드시 쓰러져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내가 길 잃은 한쪽 눈의 호랑이 새끼를 거두었었구나. 남은 눈은 내가 직접 거두리라.’
궁예의 측근들은 양길의 이런 동태를 눈치채고 선제공격을 주장했으나, 궁예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은 호족의 세상이다. 모시던 호족을 내가 먼저 치게 되면, 나에게 귀부 한 호족들이 나를 어찌 보겠느냐? 공격에 마지못해 대응하는 모습을 갖춰야 한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선제공격이 아니라 상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먼저 움직이는 쪽이 명분 싸움에서 지는 것이다.”
898년, 먼저 움직인 쪽은 양길이었고, 전투에서 승리한 쪽은 궁예였다. 궁예는 양길이 차지하고 있던 전략적 요충지인 한강 유역의 주인이 되었다. 이곳을 차지하게 된 궁예는 거칠 것이 없었고, 901년 마침내 송악을 도읍으로 하여 후고구려 건국을 선포한다.
“신라에 의해 패망한 고구려의 원수를 내 손으로 갚을 것이다.”
궁예가 견훤보다 일 년 늦게 후 고구려를 건국하며, 후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표면상 후삼국 시대이지, 천년 왕국 신라는 이미 회생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고, 최종 승자에 의해 숨통이 끓어질 날만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궁예는 견훤을 꺾고 자기 손으로 삼국을 통일하겠다는 꿈에 부풀었으나, 훗날 자신이 양길의 처지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903년, 나라 안팎의 문제를 정리한 궁예는 견훤을 공격하기 위해 왕건을 호출한다.
“왕 장군! 나주를 쳐야겠소이다. 그대가 선봉에 서 주시오.”
“전하! 소신 목숨을 내걸고 반드시 나주를 점령하겠나이다. 전라도 해안 지방의 호족은 저희 집안과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들이 분명히 도움을 줄 것입니다.”
나주지역은 통일 전까지 후 고구려와 후 백제가 뺏고 뺏기를 반복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궁예와 견훤 모두에게 중요한 지역이었다. 드넓은 곡창지대, 바다를 통해 소금, 청자 등 고부가가치 제품이 외국으로 드나드는 경제적, 지리적으로 가치가 높았다. 백제 입장에서는 나주를 빼앗기게 되면, 후방에 적군을 두게 되는 상상하기도 싫은 위험에 빠지게 된다.
해상호족 출신의 왕건이 수군을 이용하여 나주를 기습하였고, 지역의 호족들까지 왕건 쪽으로 돌아서자, 왕건은 10개 군현을 어렵지 않게 획득하게 되었다. 비록 1차 나주 전투에서 패하며 위기에 몰리는 견훤이지만, 그도 삼분지계의 한 축을 담당한 영웅이었다. 견훤은 훗날 나주를 되찾는 것뿐만 아니라 왕건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는다.
같은 해, 왕건은 훗날 신혜왕후가 되는 첫 번째 부인을 만나게 된다. 왕건은 무려 29명의 부인을 맞이한다. 이는 29명의 여인과 맺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호족 집안과 맺은 정치적 선택이었다. 태조 왕건을 제외한 나머지 고려 왕은 평균 3명의 부인을 두었다.
왕건은 전쟁할 때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호족의 딸을 비로 맞이했고, 대업을 완수한 후에는 신라의 호족들과 결혼 동맹을 맺었다. 처가 집이 온 나라에 고르게 분포된 것에서 그의 깊은 고민을 알 수 있다. 왕건은 혼인이 어려우면 지방 호족에게 ‘왕’씨 또는 다른 성을 내려 주었다. 견훤의 아버지 아자개에서 알 수 있듯, 통일신라 시대까지 성씨를 가진 집안은 많지 않았다.
“내 비록 태조 대왕과 사돈지간은 아니지만, 친히 성씨를 우리 집안에 내려주셨다. 오늘부터 너는 왕재완이다. 이제부터 태조 대왕과 한집안이 되었다.”
후삼국 시대는 호족이 일어난 전국시대였다. 궁예, 견훤이 삼국통일을 이루지 못한 원인 중의 하나는 호족과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둘은 힘으로 호족을 누르려고 했고, 호족 출신의 왕건은 그 들의 심리와 생리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으며, 결국 그들을 포용했다. 역사는 증명한다. 강한 자가 반드시 승리하지 않으며, 그 강함이 때로는 자신을 무너뜨리기도 한다는 것을.
개인의 전투력이나 군사적인 면에서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최후의 승자는 민심을 돌본 유방이었다. 왕건이 견훤과 궁예보다 더 뛰어난 장수였다고 단정할 순 없으나, 그 들보다 유연했고 온화했다.
905년 궁예는 송악(개성)에서 철원으로 천도를 명한다. 철원은 오늘날 여의도의 5배가 넘는 평야를 품은 곡창지대이다. 그러나 궁예는 쌀을 찾아 천도한 것이 아니다.
‘호족의 힘이 미치지 않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호족을 누르지 못하면 삼국통일 후에도 그들에게 끌려다닐 것이다. 호족은 필요에 의한 이용 대상일 뿐이지, 공을 나눌 협력자는 아니다.’
궁예의 천도선언에 송악 지역의 호족은 강하게 반발했다.
“전하! 나라가 선지 십 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겨우 안정을 이루어 가고 있는 시점에서 천도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옵니다. 누가 궁터를 닦고 무슨 돈으로 도읍을 세운단 말입니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과 백성들의 원망을 뒤로하고 천도를 추진시켰다. 철원에 부족한 인구는 다른 지역에서 무려 1만 호를 이주시켰다. 궁예는 철원 천도 후 911년에 나라 이름까지 태봉으로 바꾸며 본격적인 호족 개혁 정책을 실시한다.
‘호족들을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획기적이고 강력한 무엇인가가 필요한데…. 가만있자. 내가 왜 진즉 그 생각을 못 했을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