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2 때까지 늘 첫째 줄에 겨우 160이 됐을 무렵~으로 시작하는 델리스파이스의 노래 고백은 일본에서만 5500만 부의 판매부스를 기록한 청춘만화 H2의 첫 대사이다. 한국에서도 큰 사랑을 받은 H2는 야구만화를 가장한 청춘 로맨스물로 주요 배경은 고시엔야구대회이다.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무더운 여름을 파리의 가을보다 낭만적으로 만드는 것이 고시엔이다. 일본의 고교야구 대회인 고시엔대회는 미국인이 열광하는 스포츠 축제인 슈퍼볼 급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아마추어 스포츠 죽제이다. 35도가 넘는 땡볕 아래에서 까까머리 고등학생들이 하얀 유니폼이 검게 변하도록 사력을 다해 뛰고 넘어지는 모습에 어른들은 열광한다.
2023년 고시엔 대회의 경우 3,482 경기가 생중계되었으며, 2024년 여름 고시엔 결승전의 시청률은 20%가 넘었고, 4만 석이 넘는 경기장은 재학생과 졸업생은 물론이고 지역 주민들과 고교 야구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들로 늘 만원이다.
1915년부터 시작된 고시엔은 전년도 성적과 특별전형 등으로 대진이 짜여지는 춘계 대회보다 여름 고시엔의 인기가 더 높다. 아사히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여름 고시엔은 일본 전역의 3,800여 개 학교에 재학 중인 13만 명에 이르는 선수가 참가하는 꿈의 무대이다.
지역 예선부터 단판승부인 토너먼트로 치러지기 때문에 제 아무리 강팀이라도 예선에서 탈락할 수도 있으며 지역 우승팀인 39개 학교만이 본선에 진출한다. 본선에 출전하는 것 자체가 고교 야구 선수들의 꿈이다. 야구천재 오타니도 학창 시절 단 한 차례 본선에 올라 1회전에서 광속 탈락했다. 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한 번도 우승을 못한 지역도 있다.
본선은 한신타이거즈의 홈구장인 고시엔구장에서 열리는데, 고교 야구 대회를 위해 프로팀인 한신타이거즈는 이 기간 홈경기를 치르지 않는다. 고시엔 경기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시엔만의 독특한 풍경으로 그라운드의 검은흙이 있다. 양 팀 모두 하얀색 유니폼을 입는데 슬라이딩 한 번이면 옷은 금세 검게 변하는 강한 시각효과를 준다. 이 흙은 한신타이거즈에서 매년 특수 제작하며, 패배한 선수들은 고시엔의 흙을 담아가며 내년을 기약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다시 무대에 서지 못하고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한다.
고시엔대회에 도파민이 폭발하는 이유는 매 경기가 배수의 진을 쳐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에게 고시엔의 끝은 여름의 끝을 의미한다. 절기상으로도 들어맞지만, 심리적으로도 뜨거움을 내려놓고 일상으로 돌아간다.
2024년 여름 고시엔의 결승전에는 도쿄를 대표하는 간토다이이치 고교와 교토 대표로 올라온 교토 국제고가 맞붙게 되었다. 교토는 우리의 삼국시대인 일본의 헤이안 시대부터 1868년까지 일본의 수도였으며, 도쿄는 현대 일본의 수도이다. 도쿄가 경제적으로 월등하지만, 교토는 역사와 문화에서는 우위에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양 대표와 서라벌 대표 간의 경기가 펼쳐지게 되었으니 일본 내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더군다나 고시엔 백 년 역사상 교토와 도쿄 팀의 첫 번째 결승전이 성사되었기 때문이다. 이 결승전이 우리나라에도 특별했던 것은 교토 지역 대표인 교토 국제고가 재일 한국계 민족학교라는데 있다.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끌려왔지만 고국으로 돌아가지도 못한 조선인들, 고국의 배고픔을 피해 일본으로 왔지만 그보다 더한 서글픔을 겪으며 살아가던 재일교포들이 자녀들에게 우리 문화를 알려주기 위해 1947년 설립한 교토조선중학교가 시작이었다.
그러나 1999년에 이르러 학교는 재정난과 재일교포 인구의 감수가 겹치며 폐교 위기에 처한다. 이에 폐교를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로 일본 학생의 입학을 허용하며, 야구부를 창단하기에 이른다. 교토국제고 야구부는 지역 내 다른 학교 야구부에 진학하지 못한 아이들로 꾸려졌다.
산속에 위치한 학교에 등교를 하기 위해서는 대중교통 이용 후 오르막이 있는 산길을 30분 이상 걸어야 한다. 정규 야구장이 아니라 야구 경기를 할 수 있는 운동장이 없다. 짧은 운동장에서는 외야수비 훈련이 불가능하고 배수가 안 되어 비가 조금만 와도 실내훈련으로 대체되었다.
1999년에 열린 교토국제고의 첫 경기 상대는 전년도 여름 고시엔 준 우승팀인 교토 세이쇼 고교였다. 결과는 34대 0이었다. 이날 상대팀의 고마키 선수는 십 년 후 자신이 교토 국제고의 감독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고마키는 대학 졸업 후 프로입단에 실패하고 은행원으로 살아갔다. 그리고 지인의 요청으로 교토 국제고의 훈련을 도와주다 2008년 감독으로 부임한다. 외야가 없는 학교 운동장에서 그는 강도 높은 수비훈련과 외야로 나가는 큰 타구보다 내야를 뚫는 강한 타구를 만드는 훈련에 집중했다.
교토 국제고의 학생 수는 130명 남짓한데 이중 절반이 야구부이다. 일본 내에서 완벽한 마이너인 교토국제고가 고시엔 본선에 3차례나 나간 것도 대단한데, 2024년에는 꿈의 무대인 결승에 진출한 것이다.
그리고 결승 경기를 앞두고 교토 국제고를 향한 일본 우익의 거센 반발이 쏟아졌다. 고시엔대회에는 매 경기 승리 후 해당 학교의 교가가 연주된다. 결승전에는 경기 시작 전 한번, 우승팀은 마지막에 또 한 번 교가가 일본 전역에 생방송된다.
“동해바다 건너서 야마토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
마치 아리랑을 떠올리는 선율에 한국어로 부르는 교가, 여기에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며 동해표기를 거부하는 생떼를 부리는 일본 우익의 심기가 뒤틀린 것이다. 일본의 공영방송 NHK는 자막에 ‘동해’라는 한글 표기 대신 동쪽바다를 넣으며 스포츠 경기의 공정성을 훼손했다.
교토 국제고의 교가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2021년도에는 우익의 테러협박으로 경찰들이 학교 주변을 순찰하였고, 수많은 협박전화로 학교 행정이 마비되었었다. 선수들의 안전을 염려한 일본인 코치가 한국어 교가 대신 일본어 응원가를 만들 것을 제안하였으나, 학생회에서 이를 거부하고 한국어 교가를 끝까지 주장했다고 한다. 현재 교토국제고 재학생의 60%는 일본인 국적이며, 야구부는 전체가 일본인이라고 한다. 국제고의 명성에 걸맞게 한국문화에 관심을 가진 많은 일본인들이 진학하였고, 재학생들이 한국어 교육은 물론이고, 태권도와 한국 역사까지 배운 결과이다.
드디어 당장 영화로 기획되어도 부족함이 없는 스토리 라인을 품은 2024년 여름 고시엔의 결승전이 열렸다. 교토국제고의 투수 엔트리는 단 두 명인데 경기는 0대 0으로 정규이닝을 마치고 연장으로 이어졌다. 승부치기에서 어느 팀이 이겨도 고시엔 역사에 길이 남을 역대 급 명경기가 펼쳐졌다. 모든 아이들의 하얀 유니폼은 피보다 진한 땀과 검은흙으로 인해 변색되었고, 뜨거운 태양으로 인해 얼굴은 검붉게 익어 있었다.
결과는 2대 1 교토국제고의 극적인 승리였다.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재학생과 졸업생은 물론이고 교토 지역의 다른 학교 응원단과 일본 전역에서 몰린 재일교포, 서울에서 온 야구부까지 합쳐 무려 2천7백 명의 응원단이 서로를 얼싸안고 울었다. 학교가 세워 진지 77년, 야구부 창단 25년 만에 여름 고시엔에서 우승을 한 것이다.
경기가 끝나고도 이슈는 이어졌고 덕분에 여운은 더 오래 남았다. 2008년부터 팀을 이끈 고마키 감독에게 일본기자가 한국 교가에 대해 묻자 일본인인 그는 놀랍게도 이순신장군을 언급했다.
"운동장은 좁고, 선수 기숙사에 에어컨도 없습니다. 장비도 지원도 심지어 선수도 부족합니다. 우리는 이순신 장군의 전술을 생각하며 싸웠습니다."
교토 국제고의 교장선생님은 너무 많이 몰린 응원단의 결승전 티켓을 구매하느라 적자가 되었다고 기분 좋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한국 프로야구팀 기아 타이거즈는 찢어진 야구공을 테이프로 붙여 연습을 한다는 교토국제고 야구부의 사연을 듣고 천 개의 야구공을 기증했다. 이번 우승을 계기로 교토국제고에 더 많은 기부와 지원이 이루어졌으면 한다. 또한 조국 대표가 SNS에서 언급한 것처럼 교토 국제고와 김성근 감독의 최강야구팀과의 경기가 성사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피날레가 될 것이다.
고작 공놀이! 그것도 상금 한 푼 안 걸린 고등학교 경기에 눈물 흘리던 뜨거운 여름이 느리게 저물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