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20일 일요일, 서울 월드컵 경기장에 이름만 들어도 축구팬들의 심장을 뛰게 만드는 레전드 축구 선수들이 모였다.
먼저 발동도르 수장자만 6명이다. 치달의 원조 카카, 피구, 원더보이 오언, 왼발의 달인 히바우두, 우크라이나의 국민영웅 세브첸코, 이탈리아 빗장수비의 지존 칸나바로. 그리고 한국의 박지성 안정환을 비롯하여 티에리 앙리와 검은 예수 드로그바, 델 피에로, 아자르, 야야투레, 피를로, 리세, 카르발류 등 축구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35명이 단 한 게임을 위해 서울에 모였다.
경기 진행 방식은 더욱 흥미로웠다. 마치 공상이나 게임에서나 구현이 가능한 -창으로 대변되는- 전원 공격수로 구성된 FC스피어와 -지구 방위대로 불릴만한- 전원 수비수로 구성된 실드 유나이티드 간의 대결이 마련되었다.
일명 아이콘 매치로 명명된 이 경기는 넥슨이 창사 30주년을 맞아 한결같은 사랑을 보내준 팬들을 위해 막대한 예산을 들여 마련한 이벤트였다. 넥슨의 역대 행사 최고 비용을 가볍게 갱신한 본 이벤트는 축구 레전드 35인의 섭외 비용만 100억 원에 조금 못 미쳤다고 한다. 제 아무리 레전드 선수였다고 해도 무조건 모셔온 것이 아니라 나름의 섭외 기준이 있었다. 바로 몸 관리가 된 선수였는데 트레제게와 호나우도는 살이 쪄서 배제했다는 후문이다.
창과 방패, 지구 방위대와 세계 최고의 공격수들로 구성된 두 팀의 대결에 대해 많은 팬들이 공격수로 구성된 FC 스피어팀의 승리를 예상했지만, 앙리의 생각은 달랐다. 현역시절에도 이런 식으로 게임을 했지만 대부분 수비 팀이 승리했다고 말하며 실드 유나이티드의 승리를 점쳤다.
FC 스피어팀의 감독 앙리는 섭외 당시에는 경기에 출전하지 않기로 했었다. 그러나 본 경기 전날 각종 이벤트 행사를 하며 마음을 바꾸었다. 예상보다 뜨거운 관중의 열기, 과거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던 레전드 동료들과 함께하며 감상에 빠졌던 것일까?
그는 갑자기 경기 출전을 자처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 그의 축구화 사이즈 295를 구할 수 없었다. 주최 측은 어렵게 구한 축구화 사이즈 290을 들고 다이소로 달려갔다. 한국의 위대한 보물창고 다이소에서 신발을 늘리는 장비로 295로 늘린 축구화를 경기 당일 앙리에게 전달했다.
연임은 아니어도 최소한 한 번은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되었어야 마땅한 해할지(해외축구의 할아버지) 차범근이 트로피를 들고 입장하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FC스피어팀의 포백으로는 앙리, 베르바토프, 드로그바, 테베스가 나섰는데 전원 EPL 득점왕 출신이다. 스리톱은 피구, 델피에로, 그리고 현역에서 은퇴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자르가 맡았다. 경기 시작 전 앙리 감독은 자기들의 주요 전술은 여전히 햄버거를 좋아하지만 아직까지 현역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아자르에게 공을 몰아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맞서는 FC실드의 스리백은 칸나바로와 박지성의 팀 동료였던 맨유 듀오 비다치와 퍼디낸드로 통곡의 벽으로 구축됐으며, 공격진에는 야야 투레, 세이도르프, 리세가 나섰다.
드디어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축구팬의 눈이 쏠린 모순의 대결이 휘슬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러나 살아있는 전설이자 한때 축구의 아이콘이었던 이들에게서 세월은 주력을 앗아갔다. 경기장은 광야처럼 드넓었고, 공간을 채워줄 선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 경기장 전체를 한눈에 보는 시야는 넓어졌으나 빈 공간에 투입되는 패스를 받아줄 선수가 없었다.
사실 경기 시작 전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리오 퍼디난드는 몸을 풀다가 이상을 느껴 5분만 뛰겠다고 하더니, 비디치는 햄스프링 부상을 경기에 나섰다. 경기장을 가로지를 스피드도 잃었지만, 그렇게 뛰다가는 몸이 버티지 못하는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운동을 안 하면 건강이 안 좋아지고, 운동을 조금만 무리하게 하면 부상을 입게 된다는 면에서 필자가 축구의 아이콘들과 동질감을 느낀 순간이었다.
슈팅찬스에서 상대의 제지가 없었는데도 혼자 넘어지는 선수, 느리게 굴러가는 공을 따라잡지 못하는 선수를 보며 관중과 선수가 함께 웃었다. 이따금 나오는 감각적인 패스와 킥력을 제외하면 조기 축구회 수준의 경기력이었지만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경기력과 무관한 앙리의 발재간과 물 만난 고기처럼 끼를 발산하는 이천수의 쇼맨쉽 또한 볼거리였다.
FC온라인에서 FC스피어의 선수 가치는 205조 원에 이르는 반면 실드유나이티드는 35조 원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도 화려한 공격수의 몸값이 눈에 드러나지 않지만 팀에 승리를 안겨다 주는 수비수에 비해 월등히 높다.
그러나 이벤트성 경기에 긴장감과 경외감을 불어넣은 인물은 발롱도로 수상자도 득점왕 출신도 아닌 상대적으로 이름값이 떨어지는 바르셀로나 출신의 수비수 푸욜이었다.
공격팀 감독 앙리의 작전은 간단했다. 은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아자르에게 공을 몰아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앙리는 푸욜의 투쟁심을 잠시 잊고 있었다. 입국 때부터 잔뜩 찡그린 인상으로 주최 측을 노심초사하게 만들었던 푸욜은 혼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치르는 듯했다. 46세의 푸욜이 33세 아자르의 역습을 태클로 막는 장면에는 경외감마저 들었다. 경기도중 쥐가 나거나 숨이 차 수시로 교체를 하던 다른 선수들과 차원이 다른 경기력을 풀타임 동안 보여주던 그도 경기 후에는 환하게 웃으며 필자와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와 99%의 대결>
한국축구의 아이콘 박지성은 무릎에 연골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일상에서 계단을 올라가기도 힘들 정도라고 한다. 아이콘 매치의 출전을 위해 2주 전부터 근력강화 운동을 하였지만 출전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후반 종료를 얼마 남기지 않고 그가 교체 투입되자 어떤 해외스타보다 큰 박수와 환호가 이어졌다. 이때 보라색 축구 유니폼을 입은 성인 남성 팬의 오열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그 팬이 입고 있는 유니폼은 박지성의 프로 데뷔팀인 J리고 교토 상가 유니폼이었다. 다 큰 어른이 운다는 아내의 말에 나 또한 떨어지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 고개를 쳐들어야 했다. 박지성은 오랜 시간 뛰지는 못했지만 그라운드에 선 자체만으로 밤잠을 지새워가며 그의 경기를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박지성에게 페널티킥의 기회가 왔고, 상대 골키퍼는 임민혁이었다. 필자가 선정한 아이콘 매치의 하이라이트라인 이 장면을 잠시 들여다보자.
열혈 축구팬에게 조차 생소한 이름의 임민혁 도대체 그는 누구인가?
K리그 2에서 후보 골키퍼로 뛰다 서른 살의 이른 나이에 은퇴 한 선수를 기억하는 이들은 드물 것이다. 그의 커리어를 살펴보자. 프로 통산 30경기 출전에 1부 리그는 고작 3경기 출전이 전부이다. 임민혁의 선수 경력은 아이콘 매치에 어울리지 않는다. 선수 생활 내내 스포트라이트 한 번 받아보지 못한 그가 아이콘 매치에 초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인스타에 남긴 글이 많은 이들을 울렸기 때문이다.
그의 축구 인생 은퇴사이자 새 인생 출정사를 요약해 보았습니다.
“제 축구 인생은 완벽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았지만, 정정당당하게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온 사실 하나만으로 만족합니다. 포기하지 않고 쟁취하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훌륭함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기에 미련 없이 떠납니다. 저는 더 놀고 일하고 사랑하고 연대하면서 새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3월 1일! 새로 시작하기 날씨도 딱 좋네요. 여기저기 축하 만세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평생을 축구만 하며 살아왔지만 국가대표는 고사하고 소속팀의 주전 골키퍼도 아니었던 서른 초반의 젊은이가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두려움을 뛰어넘어 너무나 어른스러운 말을 남기며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많은 이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그의 글은 사람들의 여러 사람들의 SNS를 거치며 세상에 뿌려졌고, 선수 때도 해보지 못한 뉴스 출연과 각종 인터뷰를 은퇴 후에 하게 되었다.
그는 축구 행정가를 꿈꾼다고 하는데 작가가 되어도 좋을 필력을 가졌고, 글의 행간에서 훌륭한 인성이 엿보인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잘 해낼 것이며, 생면부지의 타인이지만 진심으로 응원을 보낸다.
무명의 임민혁 선수를 초대한 것은 넥슨 실무 팀장의 아이디였다고 한다.
“성공하고 유명한 월드클래스만 아이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임민혁 선수는 상위 1프로가 아닌 무명이지만 99%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임민혁 선수를 섭외했습니다.”
축구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공격수의 골이지만 수비수의 헌신 없이는 승리할 수 없다. 세상도 소수인 1%만으로는 운용되지 않는다. 무명으로 살아가는 99%의 평범한 일상이 없다면 지구의 자전도 무용하다.
넥슨이 준비한 아이콘 매치는 기획했던 재미와 감동을 충분히 선사했고, 의도치 않았던 인생의 묘미도 느끼게 해 준 훌륭한 경기였다.
이틀간 약 10만 명이 경기창을 찾았고, 온라인 누적 생중계 시청자 수는 약 360만 명, 최고 동시 접속자수는 27만 명을 기록했으며, TV가 더 이상 주류 매체가 아닌 시대임에도 MBC의 시청률은 3.5%를 기록했다. 벌써부터 2회 대회에는 베컴과 지단 등을 섭외해 달라는 팬들의 요구가 빗발치고 있다.
온라인 스포츠 게임회사이지만 넥슨은 팬들의 니즈를 정확히 알아냈고, 투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과감하게 실행했다.
세계적인 축구스타들도 아카데미와 노벨문학상, 빌보드 1위와 EPL 득점왕을 보유한 한국의 문화를 마음껏 즐기고 돌아갔다. 지구 최강의 문화강국에도 내일의 태양이 다시 떠오를 것이고, 우리는 어김없이 삶의 현장으로 다시 나가야 하지만, 늙어버린 청년들의 공놀이로 월요병을 잠시나마 잊은 아름다운 가을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