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중음악 사상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르네상스인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마왕 신해철이 떠 난지 벌써 10년이다.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들이 즐겨보던 매체인 TV에서는 연일 특집프로그램이 방영되어 그의 부재를 절감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의미도 알지 못하던 ‘민물장어의 꿈’을 따라 부르던 두 자녀가 고등학생이 된 모습을 보며 세월을 흐름을 체감할 뿐이다. (신해철은 생전 ‘민물장어의 꿈’을 자신의 묘비명으로 해달라는 말을 남겼다.)
신해철 10주기 추모글을 쓰기로 작정하고 책과 영상을 보며 자료를 수집하였으나, 무언가 빠진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글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동력이 필요했고, 토요일 늦은 밤 북살롱 오티움을 찾기 위해 종로의 뒷골목으로 들어섰다. 지하철역 앞 MZ들의 야장이 펼쳐진 거리를 벗어나자, 오티움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가 불현듯 나타났다.
북살롱 오티움은 전 MBC사장이자 오디오를 미치도록 사랑하는 은퇴자 박성제와 겸공에서 매주 책 소개를 하는 정혜승 작가 부부가 운영하는 공간이다. 공간자체가 매력적이라 책을 구매하기 위해서라도 한 번 찾으려고 했던 필자는 ‘신해철과 친구들’이라는 타이틀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듣고 오티움을 찾은 것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자 행사가 시작되기 30분 전인데도 실내는 관람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필자의 예상대로 관람객의 대부분은 중장년이었지만, 엄마 손에 이끌려 온 중학생과 고상한(?) 음악 취향을 가진 MZ 들도 드물게 눈에 띄었다.
나는 글감을 얻기 위해 인상 좋아 보이는 남성 옆에 자리를 잡고 인사를 건넸다. 신해철이라는 공통의 관심사가 있어서인지 -나이가 들어서인지-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그의 최애곡은 ‘굿바이 얄리’ 임을 알게 되었다.
7시가 되자 오티크 주인장의 인사말과 함께 신해철 음악회가 시작되었고, 첫 곡은 삼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청춘들의 응원가로 사랑받는 무한궤도의 그대에게였다. 전주가 시작되고 신해철의 앳된 모습이 나오며 음악여행이 시작되었다.
<뮤지션 신해철>
전문가의 혹평과 대중의 낯섦 사이에 있었던 서태지의 데뷔무대와 달리 무한궤도의 데뷔무대는 2NE1과 함께 한국 가요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등장으로 모두에게 기억되어 있다. 대학가요제 심사위원이었던 가왕 조용필은 물론이고 TV를 시청한 대중이 스타탄생을 직감한 대학가요제 최고의 무대였다.
음악 활동을 반대하는 아버지의 눈을 피해 대학생 신해철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문방구에서 산 멜로디언으로 ‘그대에게’의 전주를 만들었다. 영악한 청년 신해철이 과거 대학가요제의 시상패턴까지 분석하여 전략적으로 만든 곡이지만, 그 나이에 부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곡이다.
그룹명 무한궤도는 신해철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키보드를 담당했던 조현문의 말에서 시작되었다.
“무한대 어때?”
“무한궤도가 더 낫지 않냐?”
무한궤도의 첫 번째 앨범 수록곡 “끝을 향하여”를 작곡한 조현문은 2024년 7월 아버지의 유산 상속분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효성가의 차남이기도 하다. X 세대의 대변자인 015B의 수장 정석원 또한 대학가요제 이후인 1989년에 무한궤도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했다.
신해철은 1968년 서울에서 태어나,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하필이면 87학번으로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여 6.10 항쟁에 참여한다. 눈처럼 쌓인 최루탄가루를 보고 크리스마스 캐럴을 부르던 청춘들은 이듬해 도서관으로 돌아갔고, 그는 밴드부로 돌아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수상하며 딴따라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그저 남이 만들어준 노래만 벙끗 거리는 생을 살지 않았다. 그는 철학자이자 날카로운 논객이었으며,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멘토였다. 그의 노래와 함께 신해철의 인생과 우리의 청춘을 반추해 보자.
<철학자 신해철>
1991년 4월 발매된 앨범 “Myself"는 한 가수가 전 곡을 작사 작곡하고, 모든 앨범 전체를 컴퓨터 음악으로 채운 최초의 앨범이자, 신해철의 솔로 2집이다.
같은 반의 모든 남자아이들이 '재즈카페'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를 부를 때 필자는 “나에게 쓰는 편지”에 매료되었다. 세련된 컴퓨터 사운드에 철학적인 가사는 지적 허영심읕 타고난 필자의 노래방 애창곡이다.
“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밥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 우리에겐 신해철이 있다고 생각한 이는 필자만이 아닐 것이다. 뮤지션 신해철의 위대함은 그의 노래 가사에서 시작된다. 마음 같아서는 지면을 그의 가사로 채우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으니 일부 인용하는 선에서 글을 이어가겠다.
<멘토 신해철>
도시인은 고등학생이 된 신해철의 딸이 즐겨 듣는 노래이며, 그의 음악제자 싸이가 리메이크한 곡이다. 싸이는 데뷔 얼마 지나지 않아 이미 대스타였던 신해철의 전화를 받았다고 한다. 싸이는 여전히 연예인과 뮤지션의 사이에 있는 자신이 음악적 역량을 쌓은 것은 해철이 형 덕분이라고 말하며, 흠뻑쇼를 비롯한 자신의 공연에서 신해철을 기리는 무대를 빠트리지 않고 있다.
뮤지션 신해철에게 마왕이라는 칭호를 안겨준 것은 고스트 스테이션이라는 라디오프로그램이다. 거리응원도 낯설던 2001년, 마치 유튜브 1인방송 같은 파격적인 컨셉과 진행으로 경직된 한국사회에서 해적방송 취급을 받던 고스트 스테이션은 마니아층의 폭발적인 지지를 받았다.
“특이하다는 혹은 평범하다는 이유로 박해받는 이 땅의 모든 고스 식구들이여, 우리 모두 유령국가 건설의 그날을 향해, 마왕의 시답지 않은 영도 아래 이판사판 나아가자.”
마왕 신해철은 심야에 진행되는 라디오를 통해 무조건적인 파이팅을 강요하던 한국사회에서 드문 위로를 전하던 어린 어른이었다. 명언으로 전해지는 그가 남긴 말들로 또 지면을 채워보고자 한다.
“딸이 아홉 살, 아들이 일곱 살 일 때 들려주던 이야기를 스무 살 때도 들려주고 싶다. 공부든 학교든 돈 못 벌어도 좋으니까, 아프지만 마라. 여러분도 마찬가지다.
“ 세상을 바꿀 힘은 없어도 세상의 일부인 자신을 바꿀 힘은 있지 않겠냐. 닥치고 힘내라.”
“ 성공은 몽땅 ‘운’이다. 우리는 단지 운이 떨어졌을 때 담는 그릇이다. 설령 운이 담기지 않았다 해도 가지 없는 그릇이 되는 건 아니다.”
“ 성공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남들이 똑같이 걷는 길에서 낙오하는 것에 대한 무서움보다 내가 진실로 원하는 나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것에 대한 무서움이 훨씬 더 무서웠기 때문에 그냥 나의 방식을 택했다. 공포로써 공포를 제압했달까?”
<논객 신해철>
MBC의 간판일 뿐 아니라 당대 최고의 지성들이 패널로 참가하던 100분 토론의 품격을 떨어트리는 기괴한 복장으로 출연을 했지만, 손석희 마저도 인정하는 뛰어난 논객이었다. 신해철의 지인들은 그가 사회문제에 목소리를 높이는 것에 대해 우려를 표했지만, 그의 생각과 선택은 늘 그렇듯 달랐다.
간통제 폐지와 대마초 합법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동성동본 결혼금지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해'라는 노래를 만들기도 했으며, 바보 노무현을 지지한 결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불이익을 받을지라도 부당한 세상과, 그 부당함으로 인해 소외되는 이들을 위해 목청을 높이던 간지 나는 논객이었다.
<굿바이 얄리>
천재를 신화로 만드는 것은 때 이른 죽음일지도 모른다.
2014년 10월 27일, 신해철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이 전해졌다. (그의 수술을 집도한 의사는 과실치사가 인정돼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런데 신해철 10주기 추모 글을 준비하며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그 의사가 신해철 사망 이후에도 병원에 무사히 복귀하였고 또 다른 사망 사고를 냈다는 것이다.)
신해철의 죽음은 십 년이 지나도 허망하지만 당시에는 더 큰 충격이었고 많은 이들의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언젠가 형이 그랬습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 자체로 목적을 다한 것이기 때문에 인생이란 그저 보너스 게임일 뿐이라고요. 따라서 보너스 인생을 그냥 산책하듯이 그저 하고픈 것 마음껏 하면서 행복하라고. <서태지>
그는 내 마음속에 ‘자유로운 청춘’으로 각인되어 있다. 내가 한 프로의 출연 섭외를 거절하자, 그가 찾아와 ‘지친 애들 위로해주자’ 고 나를 설득했다. (중략) 자유분방하면서도 일관된 정직성과 자기 재간에 대한 겸손이 이 아까운 사람의 부재를 더욱 안타까워하게 만든다. <소설가 황석영>
지성을 갖춘 놀라운 ‘강심장’이었다. 지식인, 정치인의 허위를 광장에서 단 한마디로 날려 보내던 신해철. 그 인격, 지성, 음악으로 스스로 시대의 예술가가 되었다. <문성근>
신해철은 세월호 참사가 있고 6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석정현 작가 SNS>
세월호 참사로 무력감에 빠졌던 신해철의 광팬 석정현 작가의 그림은 그 자신은 물론 세월호참사와 신해철을 떠나보낸 이들을 동시에 위로한 아름다운 작품이다.
신해철은 자신이 원했다면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날아라 병아리’의 가사를 쓸 만큼 순수했던 그는 전망 좋은 직장을 다니며 가족 안에서의 안정된 삶을 살 수도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다양한 눈을 가진 동시에 탁월한 달변가였던 그는 철학과 교수나 시인이 되어 안온한 명예를 누릴 수도 있었을 것이며, 누구보다 영악했던 그는 이 모든 재능으로 타인을 기만하고 오직 자신의 통장 잔고를 늘리는 정치 협잡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가 뜨겁게 사랑했던 것은 음악이었고, 되고 싶었던 것은 뮤지션이었다. 그의 선택으로 우리는 신해철의 음악이라는 유산을 가지게 되었다.
신해철과 판박이인 딸을 거리에서 만나는 어른들은 때론 눈물지으며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신해철은 나의 청춘이었다.”
PS : 신해철은 세계사의 흐름을 뒤바꾼 68 혁명이 일어난 1968년에 태어났고, 6월 항쟁이 대한민국을 뒤덮던 해에 대학생이 되었으며, 세월호가 떠난 해에 고인이 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신해철이기에 공교롭다.
https://www.youtube.com/watch?v=SVxiqGiLMC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