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오십에 회사를 그만둔 데에는 표면적, 현실적,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표면적 이유로는 출퇴근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몇 해 전 회사가 강남으로 이전하며 왕복 출퇴근 시간이 4시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2023년 12월에 통계청과 SK텔레컴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출퇴근 소요시간은 72.6분, 통근 이동거리는 18.4킬로로 나타났으며, 수도권이 소요시간 83.2분, 이동거리 20.4 킬로로 2관왕을 무난히(?) 달성했습니다. 수도권이 1위를 차지한 이유는 저처럼 경기도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인구가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참고로 경기도민은 이동거리 30분 내외는 슬리퍼를 신고 나간다는 슬픈 농담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소요시간 260분. 이동거리 45KM로 전국 최상위 레벨의 수치를 기록하며 길바닥에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었습니다. 세기말에 입사하여 25년간 일을 하다 보니 흔하지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표현으로 몸도 마음도 완전히 지쳐버렸습니다. 이런 생활을 하는 한국인이 나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도 더는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고통은 각자 다르게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두 번째 현실적 이유는 인간의 수명과 관련이 있습니다.
임원눈치, MZ눈치, 가족 눈치 보며 회사를 다닌다면 정년까지 버틸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퇴직 이후에도 일을 해야만 한다는 데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2025년부터 인구의 20%가 65세 이상이 되는 초 고령화 시대에 돌입합니다. 2024년 현재 인구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X세대가 퇴직하는 시기는 고령화가 더 심각해질 것이고, 저는 60세가 되는 10년 후에도 어떤 식으로든 경제활동을 이어가야 한다는 슬프지만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러자 60세에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할 것이 아니라, 한 살이라도 젊은 50세가 좀 더 적응이 쉬울 것이라는 명확한 사실에 생각이 이르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표를 내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퇴사 소식을 접한 또래의 동료 대부분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젠가 마주쳐야 할 냉혹한 현실을 미룰 수 있다면 미루고 싶어 했습니다. 월급이라는 달콤한 과실을 즉시 대체할 마땅한 당분이 없는 것도 이유입니다. 인간의 수명이 아니 정확히 말하면 노년이 늘어난 덕분에 인간은 더 오랜 시간 일해야 하고, 제2의 직업이 필수인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저의 결정에 수긍한 이들도 물었습니다. 도전에 박수를 보내지만, 당신의 계획은 무엇입니까? 25년을 일한 이에게 어디로 여행을 갈 거냐? 어떤 재충전을 할 거냐고 묻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남들 따라 부지런히 만 살아온 한국인의 서글픈 현실입니다.
저는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여유자금이 넉넉하지 않지만 이상하리만치 미래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인생관이 바뀌기 몇 해 전의 저였다면, 이런 저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저는 시골에서 태어난 장남이며 슈퍼울트라 J입니다. 타고난 성향과 더불어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학창 시절부터 인생계획을 철저하게 세웠습니다. 군 전역 후에는 시간을 분 단위로 계획하며, 꿈을 좇는 대신 시간에 쫓기며 살았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저축한 돈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후에는 계획에 더욱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맹목적으로 열망하던 대기업에 취업하지도 못했고, 좀비처럼 출퇴근만 반복하다 번 아웃에 이른 어느 날 커피를 마시다 깨달았습니다.
‘내 인생에 계획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구나. 이제는 계획 없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봐야겠다.’
포기가 아닌 분명한 깨달음이었습니다. 표면적, 현실적 이유로 스스로 납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퇴사를 실행에 옮기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회사를 그만두면 세상이 무너진다고 회사를 그만둔 적이 없는 사람들이 염려했습니다.
이제 나이 오십에 회사를 그만둔 결정적 이유를 들려드리겠습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계획하지도 않은 일이었지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독후감 외에 글을 써본 적이 없었지만 제가 쓴 글이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자, 신문사에서 연재를 제안하였고, 연재 글을 묶어 책으로 출간되는 일련의 과정이 기적처럼 펼쳐졌습니다.
“좋아하는 글을 쓰기 위해 회사를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하면 우려와 조언이 쏟아질 것이 염려되어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았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행복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며, 부와 명예는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내가 불행했던 이유는 나의 욕망을 쫓은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쟁취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닌 남들이 가는 길 위에서 헤매고 있기 때문에 길이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남들보다 회사생활을 유독 힘들어했던 이유는 누군가 내린 지시에 ‘왜’라는 질문이 자주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질문 없이 관습상 해야 하는 무의미한 일들과 구태를 답습하는 것이 참기 힘들었습니다. 또한 저는 분업화에 맞지 않는 인간입니다. 그러나 글쓰기는 스스로 납득이 되는 기획에서 시작하여 온전히 나의 노력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글을 쓰는 동안 결과에 관계없이 행복합니다. 글을 쓰며 마음의 청춘이 시작되었으며, 돈과 상관없이 건물주보다 행복한 나만의 소우주를 창조하는 조물자가 되었습니다. 저의 성향과 취향에 딱 맞는 일을 마침내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요?
아침 8시에 일어나 스트레칭과 명상으로 구겨진 몸과 마음을 펴고 깨웁니다. 라디오를 켜고, 시간을 들여 드립 커피를 내린 후, 오전에는 글을 씁니다. 오후에는 아내와 함께 미술관도 가고, 맛집도 가고, 공원산책도 합니다. 평일 낮은 어디를 가도 사람이 적기 때문에 시간부자의 사치를 온전히 누립니다. 어떤 날은 원 데이 클래스로 그림을 그리고, 다른 날은 동네 도서관의 작곡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큰돈이 들지는 않지만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을 차곡차곡 보내고 있는 중입니다.
계획은 없지만 바람은 있고, 꿈도 생겼습니다.
작업 중인 역사 이야기와 에세이가 책으로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상당수가 원래 직업에 종사하다 우연히 발견한 새로운 일에서 큰 성과를 냈다는 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이는 걸까요? 그래도 다양성이라는 측면에서 저 같은 사람 한두 명쯤은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리고 나이 오십에 새로운 꿈이 생겼습니다. 타인의 욕망을 따라가는 직업이 아닙니다. 제 꿈은 날개 달린 물고기처럼 살아가는 것입니다. 남들과 조금 달라도 눈치 보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세상을 유영하듯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덧붙이는 영화>
저의 퇴사를 결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화 '엘 카미노'를 소개합니다. 작가이자 방송인인 N잡러 손미나가 산티오고 순례길을 직접 걸으며 연출까지 한 영화입니다. 손미나 감독은 소위 말하는 명문대 진학 후 아나운서라는 완벽한 직업까지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안정된 항구를 벗어나 길 위에 선 멋진 사람입니다. 단순히 산티오고 순례길이 궁금하거나 막연히 인생의 길이 보이지 않는 이, 새로운 길 위에 들어가기 위해 용기가 필요한 모두에게 쓸모가 되어줄 작지만 아름다운 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