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 2주 후, 임시주총에서 사장의 재신임건과 임원진의 연봉 인상안이 통과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직원들은 임원진의 이름 대신 각종 동물의 이름을 불러대며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으러 사무실을 나갔고, 들어오는 길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빠르게 체념했다. 김 팀장은 송과장이 양치를 하러 간 사이 지난 주 에 구입한 로또를 확인한다. 평소에는 연금복권 5천원, 로또 5천원을 구매했지만, 지난주는 연말이라 5만원의 복권을 구매했다. 가슴속에 사표 대신 복권을 품고 다닌 지 십 수 년이 지났지만, 당첨금 5만원이 신이 허락한 최대치의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권을 사는 이유는 복권을 산 금요일 오후부터 당첨을 확인하는 월요일 오후까지는 희망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치킨 집을 열 두둑한 퇴직금도, 물려받은 부동산도 없는 김팀장은 복권만이 이 생지옥에서 탈출 할 수 있는 유일한 동아줄이라고 확신한다. 삼십대 중반까지 꾸준히 주식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하며 터득한 재테크 수단이기도 하다. 5천원이 당첨되었다. 이 금액도 몇 개월만이다.
‘많이 사면 머라도 걸리기는 하는구나.’
세 군데의 복권명당을 찾아 발품을 팔았지만 당첨된 곳은 회사 건물 지하의 편의점이었다.
‘이것도 되는 놈만 되는 건가?’
작년 가을 사장은 골프장에서 홀인원을 기록했고, 그를 따르는 측근들에게 법인카드로 한우 갈비탕을 쐈다. 영수증을 챙기던 그는 지갑에 있던 만원을 양부장에게 건넸다.
“양부장! 여기 근처에 로또 파는데 없나? 자동으로 만원만 사다줘.”
양부장은 무리한 스윙으로 근육통이 생긴 허리를 부여잡고 건물 지하 편의점에서 로또를 샀고, 다음 주 사장은 로또 2등에 당첨되었다.
김 팀장은 누가 볼세라 복권을 찢어서 검은 봉지에 밀봉한 후에야 휴지통에 집어넣는다.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한 그는 공인인증서의 비밀번호를 2회 틀린 후 로그인에 성공한다. 마이너스 통장의 잔액을 확인하자 에스프레소를 들이킨 것 마냥 가슴이 뛴다. 다음 달에는 어머니 병원비가 카드대금에 얹어 질 것이고, 월초에 명절이 기다리고 있다. 돈 나갈 곳은 촘촘히 대기 중인데, 돈 들어올 구멍은 동결된 월급 하나뿐이다. 마이너스 통장에 적색경보가 들어왔다. 찜해둔 헤지스 코트가 가을에 아울렛 매장에 나오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다.
5분 빠르게 해 놓은 벽걸이 시계가 12시30분을 지나고 있다. 회사에서의 하루는 더디게 흐르는데 주말은 스치듯 지나고, 나이는 감당할 수 없는 속도로 처먹고 있다. 노후대비는 고사하고 월급이 두 달이라도 안 들어오면 길바닥에 나앉을 상황이다. 마흔이 넘고 팀장이 되면 젊은 날의 고생을 보상 받을 거라 착각하며 청춘을 소비했다. 이렇게 살 줄 알았다면 취업 전에 하고 싶었던 일을 5년만 도전해 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그때는 젊은 줄 몰랐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20년 후에 똑 같은 후회를 하는 게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나아질 가능성도 발버둥 칠 시간도 줄어드는 현실이 버겁다. 편두통과 안구건조증이 시작되고, 직업병으로 몸에 각인된 어깨통증까지 이어진다.
‘5분이라도 자자’
송과장의 경쾌한 구두소리가 들여온다. 그는 믹스 커피 한 잔을 김 팀장 책상에 내려놓고 자리로 돌아가며 모니터를 흘깃 본 후 핀잔을 준다.
“팀장님! 아직도 공인인증서로 로그인 하세요? 스마트폰은 그냥 머 폼이에요? 제가 가르쳐 드려요?”
“됐어. 이게 더 안전하고 익숙해”
“옴마! 팀장님. 제발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꼰대소리 들어요.”
“혹시 잠들면 1시에 깨워라. 너도 좀 엎드려 있던가.”
김 팀장은 5분 만에 잠이 들고 그 사이에 꿈을 꾼다.
일요일 저녁을 먹은 김팀장은 1등에 당첨된 복권을 들고 아내를 힘껏 껴안는다. 월요일 아침 마을버스 대신 택시를 타고, 회사대신 회사 옆 농협본점으로 향한다. 일련의 절차를 거쳐 당첨금을 수령한 후 세 군데의 은행에 걸쳐있는 대출금을 상환한다. 점심은 결혼10주년에 가기로 했던 숙성한우가 유명한 스테이크하우스에 간다. 계속해서 회사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느긋한 마음으로 무시하고 롯데백화점 본점으로 향한다. 아내는 가방을, 나는 시계를 구입한 후, 커피숍에 앉아 제주 신라호텔을 연박으로 예약한다. 실 수령액이 30억이 안되지만, 회사는 무조건 그만두기로 아내와 합의를 한다. 꿈이 현실의지의 반영이라고 하지만 이렇게까지 구체적이라니! 그 순간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김 팀장은 잠을 깬다.
“팀장님! 재경팀 박지윤 대리입니다. 올해부터 법인카드는 회사반경 1키로 내에서만 사용하라는 사장님 지시가 내려와서 전화 드렸습니다. 팀장님은 야근하시고 택시 타고 귀가 하시는 것 빼고는 해당 사항 없으십니다.”
사장이 집 근처 마트와 경기도 외곽의 맛집에서 법인카드를 사용하는 건 모두가 알지만 말 할 수 없는 비밀 일뿐이다. 김 팀장은 전화를 끓고 낮은 목소리로 사장을 불러본다.
“씨발 새끼.”
“엉? 팀장님 지금 욕하긴 거예요? 엄청 찰지신데요? 재능 있으세요!”
퇴근 후 김팀장은 아내에게 연봉동결 소식을 어렵게 꺼냈다. 아내는 걱정 말라고 오히려 김팀장을 안심시킨다. 드레스 룸은 없어도 책 좋아하는 남편의 서재는 있어야 한다고 아내가 마련해준 동굴로 김팀장은 맥없이 기어 들어간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을 낀 채 유트브 클래식 채널을 클릭한다. 10년 넘게 클래식을 들었지만 해설을 듣고 음악을 듣기 시작하는 건 몇 달 전 부터이다. 오늘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23번에 대한 설명이 시작된다. 이소룡과 더불어 김팀장의 히어로인 마이클 조던의 등번호와 같아 친숙함을 느낀다. 총 3악장으로 이루어진 이 곡은 경쾌한 1악장이나 3악장보다 애잔한 느낌의 2악장이 더욱 사랑받는다고 한다. 이왕이면 손열음의 연주로 듣고 싶었으나, 손열음의 연주실황은 없고 2악장만 따로 올라온 영상이 압도적으로 많다. 전 악장이 30분이 되지 않아 넷플릭스 다큐를 보기 전에 적당하다. 1악장은 김팀장이 좋아하는 모차르트 특유의 경쾌함이 느껴져 하루의 스트레스가 풀리는 기분이다. 그러나 2악장이 시작되며 서서히 여성호르몬이 분비되는 것이 느껴졌고 이내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뻔한 신파드라마나 심지어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도 주책없이 눈물이 흐른다. 내일도 여전히 출근이 하기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