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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Sep 09. 2020

<진짜 친구가 되고 싶은 날> 울타리 너머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울타리 너머, 마리아 굴레메토바 지음, 이순영 옮김, 북극곰 펴냄


  바운더리는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자아와 대상과의 경계이자 통로'를 말한다.
  (중략)
  우리의 자아에도 경계, 즉 바운더리가 있다. 바운더리가 있기 때문에 나의 생각과 상대의 생각, 나의 취향과 상대의 취향, 나의 감정과 상대의 감정, 나의 욕구와 상대의 욕구 등을 '나'와 '상대'로 구분한다. 그런데 이러한 정신적인 바운더리는 물건의 소유관계를 확인하듯 명확하지 않다. 내 생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다른 사람 생각이거나, 내 욕구인 주 알았던 것이 사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에게 가진 욕구일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일이다. 이렇게 환경의 영향을 받는 가운데서도 자아의 '바운더'는 자신의 심리적 형체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준다.  

- 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지음, 더퀘스트 펴냄 -


나를 안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내 연애사, 내 꿈, 내 성격, 내 강점과 약점, 내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내게 어울리는 화장법과 머리스타일 등등  나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그들은 내 얼굴 표정이 어두우면 왜 그러는지 그 이유를 바로 얘기했다.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한 번에 콕 찍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막힘없이 나를 소개했다.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를 그들을 통해 알았다.  


그들은 나에 대해 많이 알았는데 나는 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이 단순하다고 하면 단순해졌고, 성실하다고 하면 성실해졌다.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다고 하면 사람들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이 됐고,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고 하면 그런 능력자가 됐다. 감정적이라 하면 그렇다 했고, 냉정하다고 하면 또 그렇다 했다. 추천해주는 옷을 입었고, 그건 아니라고 하면 하지 않았다.


 

그림책 『울타리 너머』의 안다도 소소에 대해 뭐든 잘 안다. 소소에게 어울리는 옷이 무엇인지, 뭘 하고 놀면 좋은지 다 안다. 어느 날, 안다에게 사촌이 찾아온다. 그 틈을 이용해 소스는 산책을 나간다. 안다와 함께 사는 대저택에서 소소는 두 발로 걸었지만 그곳을 나올 때는 네 발이다. 산책을 하다 소소는 산들이를 만난다. 산들이는 소소가 옷을 입고 있는 게 신기하면서 걱정스럽다.


"숲에서 달릴 때 불편하지 않니?"

"아니. 난 달리지 않거든."


소소는 달린 적도, 울타리 너머 숲에 간 적도 없다. 소소와 달리 산들이는 숲을 뛰어다니는 게 신난다.  덫에 걸리기도 하지만 끈기와 용기를 발휘해 위험한 상황을 헤쳐 나온다. 산들이를 만난 소소는 예전의 소소가 아니다. 큰 집에서 안다의 뜻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가 아닌 진짜 '나'가 되고 싶다.   


시작하는 면지 속 소소와 마지막 면지 속 소소는 확실히 다르다. 더는 두 발로 걷지 않고, 옷을 입지 않는다. 혼자 앉아 우울한 표정으로 울타리 너머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이제는 친구 산들이와 웃으며 자유롭게 뛰어다닌다.


『울타리 너머』는 자신을 찾아가는 소소를 통해 진짜 '나'를 찾는 용기와 참된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소소는 진정한 자신을 찾고, 산들이라는 좋은 친구를 만났다. 분명 기쁜 일인데 소소의 성장보다 혼자 남겨질 안다가 마음에 걸렸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안다의 외로움과 슬픔이 보였다. 자신 없는 표정으로 인형을 내미는 안다와 시큰둥한 사촌과  옆에 놓인 장난감들을 보면서 이미 많은 거절을 당했구나, 생각했다. 안다가 어려운 상대를 대하고 있을 때, 소소는 이때다 하는 모습으로 멀어지고 있다. 그동안 안다가 소소에게 한 행동은 폭력에 가까웠지만 이 장면에서 안다의 여리고 연약한 모습이 보였다. 더는 안다를 미워할 수  없었다. 잠깐 놀러 온 사촌을 제외하면 큰 집에는 안다와 소소만 존재한다. 안다가 관계에 서툰 이유가 뭔지 알겠다.


사실 소소도 잘한 게 없다. 안다 입장에서 보면 소소는 좋은 친구가 아니다. 이 옷이 더 잘 어울린다고 내밀어도 소소는 무표정이다. 같이 노는 줄 알았는데 소소는 옆에서 딴짓을 한다. 안다가 이야기를 하면 소소는 가만히 듣고 있는데  정말 가만히만 있어서 얘가  내 을 듣는 건지, 아닌 건지 답답하다. 좋다거나, 싫다거나, 공감한다거나, 다른 의견이 있다거나 등등의 맞장구가 없다. 표정도 거의  변하지 않으니 재미가 없다. 큰 집에서 같이 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는 소소뿐인데 소소는 안다에게 다가가지 않는다. 이런 관계에서 친밀감이 나올 수 없다. 안다는 소소를 통해 더 큰 외로움과 공허함을 느꼈을 것이다. 안다가 화가 날 만하다. 나는 옷이 불편하다고, 두 발로 걷기 힘들다고, 집에서 연극놀이를 하는 것보다 울타리 너머에 있는 숲을 뛰어다니는 게 더 즐겁다고 말을 하지 못하 소소에게 나도 같은 감정이다.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떠나버린 소소를 이해할 수 있는 친구가 몇 명이나 될까.


  순응형은 이렇게 자존감이 낮고 타인중심적인 인간관계를 맺는다. 관계의 기준이 상대에게 있어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상대가 하자는 대로 한다. 심각한 경우에는 내키지 않은 것을 넘어 힘들거나 싫은데도 다른 사람의 접근-제안-부탁, 심지어 부당한 지시까지 거절하지 못한다.

(중략)

  거절이나 자기 주장을 잘 못하는 것보다 심각한 문제는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기호, 취향을 '잘 모른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생각, 감정, 기호, 취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기보다 주변 인물의 것을 모방한 경우가 많다. 

- 관계를 읽는 시간, 문요한 지음, 더퀘스트 펴냄 - 


그래서 나는 소소가 안다를 떠나지 않기를 바란다. 숲에서 실컷 뛰어놀다가 산들이와 함께 집으로 가면 좋겠다. 자신의 진심을 전하고 서로의 욕구를 조율하는 과정에서 아직 자신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는 안다에게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여전히 당신에게 안다이면서 소소인 나는 둘 중 하나만 응원할 수가 없다. 빈껍데기 같은 소소에게 화가 난 안다도, 안다의 뜻을 거절하지 못해 자신의 욕구를 누른 소소도 이해한다. 자신의 불만을 풀지 못했기에 안다는 공격적인 방식으로 소소를 가두려 했고, 소소는 수동적이지만 고집스러운 방식으로 안다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제 소소도 변했으니 안다에게도 좋은 영향을 주길 희망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산들이까지 가세한다면 더없이 좋은 조합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제 나도 당신에게 소소나 안다가 아닌 진짜 나로 다가가고 싶다.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하고, 당신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아가고 싶다. 그렇게 진짜 친구가 되고 싶은 날이다.

 

 

* 울타리 너머, 마리아 굴레메토바 지음, 이순영 옮김, 북극곰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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