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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Sep 11. 2020

<영혼을 기다리는 나날> 잃어버린 영혼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잃어버린 영혼,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올가 토카르축 글, 이지원 옮김, 사계절 펴냄



『잃어버린 영혼』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저녁 8시가 넘은 시각, 동생이 다급한 목소리로 엄마의 입원 소식을 전했다. 눈 앞에 검은 점이 떠다녀서 동네 안과에 갔더니 큰 병원에 가보라 했고, 여의도 성모병원에 갔더니 급하게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단다. 동생에게 늦는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때마침 프로젝트를 진행할 사람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와 첫 미팅이어서 바로 일어설 수가 없었다. 통화를 마칠 때만 해도 차분했다. 5분 정도 지나자 가슴이 두근거렸다. 손가락이 떨리더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체 이 일이 뭐라고 엄마가 아프다는데 이러고 있는지 눈물이 났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선배에게 부탁을 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그 당시 새벽에 출근해서 새벽에 퇴근하는 일이 잦았다. 휴가는 반납하기 위해 존재했다. 퇴사하는 날에는 새벽 3시까지 남아 회계와 보고서를 마무리했다. 겁이 많아 집에서도 누군가가 들어올까 봐 불안했는데 사무실에 홀로 남아 있을 때는 그런 걱정을 할 틈이 없었다. 당장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게 중요했다. 혼자 살고 있을 때였는데 엄마가 집에 오라고 해도 바쁘다며 가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 가면 짜증만 내고 왔다. 친구들과도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어렵게 시간을 내서 만나면 피곤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일이 많은 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권위적인 대표와 대표의 꼭두각시인 처장은 참을 수 없었다. 연대할 줄 알았던 동료들의 행동도 상처였다. 그렇게 3년 반을 보내고 나니 몸과 마음은 엉망이었다.



얀은 일을 아주 많이, 빨리 하는 사람이다. 영혼은 어딘가 멀리 두고 온 지 오래다.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잘 살았다. 가끔 주위가 이상할 정도로 평평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괜찮았다. 어느 날 밤, 얀은 숨이 막힐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기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도통 모르겠다. 자신의 이름이 안제이인지, 마리안인지 헷갈린다. 여권을 보고 자기 이름이 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음 날, 얀은 의사를 찾아간다. 그녀는 얀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군가 위에서 우리를 내려다본다면, 세상은 땀 흘리고 지치고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로, 그리고 그들을 놓친 영혼들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영혼은 주인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큰 혼란이 벌어져요. 영혼은 머리를 잃고, 사람은 마음을 가질 수 없는 거죠. 영혼들은 그래도 자기가 주인을 잃었다는 걸 알지만, 사람들은 보통 영혼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환자분은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편안히 앉아서 영혼을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히 환자분이 이삼 년 전쯤 갔던 곳에 환자분의 영혼이 있을 거예요. 기다리는 데 시간이 좀 걸릴지도 몰라요. 제가 드릴 다른 약은 없습니다."


그 뒤로 얀은 도시 변두리에 작은 집을 구해 매일매일 의자에 앉아 영혼을 기다린다. 머리카락도, 수염도 자르지 않고,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퇴사 후, 나는 더 심하게 망가졌다. 몸 여기저기가 아파 병원에 다녔고, 생활비를 걱정해야 했다. 일자리를 알아봐야 했는데 너덜너덜해진 육체와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같은 동네에 있었기에 혹시라도 그들과 주칠까 봐 원룸에 박혀 숨죽이는 날이 많았다. 혼자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 때면 그들에게 퍼붓지 못한 문장이 나를 공격했다.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한 채 나약하게 대처한 내가 한없이 미웠다.  


그곳을 떠난 후에도 오랫동안 괴로웠다. 한 번은 화가 치밀었고, 한 번은 고마운 게 생각났고, 한 번은 욕을 했고, 한 번은 미안했다. 다시는 만나지 않길 바라다가도 그들의 약점을 잡을 수 있다면 한 번은 보고 싶었다. 비겁함과 치졸함이 번갈아 가며 나타날 때마다 무기력해졌다. 같이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방글라데시인 친구가 나를 많이 걱정했다. 그곳을 나와 정신과 치료를 받는 애들을 봤다면서 내게도 정신 차려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얀은 영혼을 찾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렸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오히려 지난날을 후회하고 원망하면서 영혼을 더 멀리 떠나보냈다. 작가가 연필로 세심하게 작품을 표현했듯이 나를 세심하게 살펴야 했는데 자학을 하다 지치면 나를 외면했다. 괜찮다가도 불쑥불쑥 억울했고, 술을 마시면 서럽게 울었다. 기억은 나를 더 피폐하게 했다. 다시 일을 시작한 후에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전처럼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 필요 이상 예민하게 굴기도 했다. 영혼을 잃어버린지도 모른 채 살았던 나날이었다.


이제는 그 시절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얘기한다. 버텼던 시간과 한계를 넘고 넘었던 일화를 마치 영웅담처럼 늘어놓는다. 남자들이 왜 군대 이야기를 반복하는지 알겠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나는 그 동네에 가지 못한다. 10년을 혼자 살면서 울고 웃었던 곳,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시면서 놀던 곳,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길 바랐지만 좋은 사람들 덕에 다시 살아갈 수 있었던 곳, 내 젊음과 우리의 낭만이 구석구석  그곳을  갈 수 없다. 근처에만 가도 심장이 위축되고 몸이 움츠러든다. 아무래도 내 영혼은 아직 그곳을 넘어서지 못한 모양이다.


자기만의 어떤 장소를 찾아 기다려요

부디  장소가 그곳이 아니길 바라며 오래 전의 시간을 더듬는다. 상처를 끌어안고 있던 어린 시절부터 상처를 후비고 방치했던 지금 이 순간까지 어설프고 서툰 시간을 조금씩 끄집어내려 한다. 너무 아파 건드리기 싫은 날도, 무의식 어딘가로 넘겨버려 기억에서 삭제한 날도,  마주하기 힘겹지만 더는 피할 수 없음을 느낀다. 무채색이었던 얀의 인생에 초록의 잎이 돋고 따뜻한 색이 채워지듯 나의 빛바랜 지난날에 온기를 더하고 싶다.


바쁘다는 이유로,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나에게 소홀했다. 당연히 당신에게 무심했고 때로는 냉정했다. 지난날을 사과하며 이제는 당신의 영혼에도 안부를 전한다. 혹시 당신의 영혼도 주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는 건 아닌지 살피길 바란다. 영혼은 저절로 돌아오지 않는다.



* 잃어버린 영혼, 올가 토카르축 글,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이지원 옮김, 사계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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