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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Sep 18. 2020

<우리의 마지막이 다정하길 바라는 날> 할머니의 팡도르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할머니의 팡도르, 안나마리아 고치 글,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정원정 - 박서영 옮김, 오후의 소묘 펴냄


팡도르가 뭔지 모르지만, 할머니로 추정되는 인물 앞에 있는 둥글고 다리가 두 개 달린 게 뭔지 모르지만 표지를 보자마자 감탄했다. 나뭇잎이 다 떨어진 나무를 보니 배경은 겨울인 듯한데 붉은 색채와 곡선 덕에 전체적으로  따뜻했다. 여백은 앙상한 나무마저 편안하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입술이 살짝 올라간 것으로 보아 미소를 짓고 있는 듯한데 어딘지 슬픔이 느껴졌다.


따뜻함과 편안함과 슬픔이 묘하게 어우러진 『할머니의 팡도르』가 궁금했지만 서두르지 않았다.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그림을 보았고, 일주일이 지난 후에 내용을 읽었다. 그림책치고는 글밥이 많았기에 여유로울 때 보고 싶었다. 그보다 그림에서 느낀 매력을 글에서 실망할까 봐 선뜻 읽고 싶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 내려오는 전설을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정보를 듣고 더 그랬다. 전설이 갖고 있는 재미는 분명 있지만 전설이 갖고 있는 뻔한 속성 때문에 시시할 수 있다고 짐작했다.


결론은 그림과 글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표지에서 느꼈던 따뜻함과 슬픔과 편안함이 잘 어우러진다. 그 안에 깊이를 더했다.  



어느덧 할머니의 얼굴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주름이 생겼어요. 입술은 종잇장처럼 마르고 가늘어졌지요. 나이를 잊어버린 지는 이미 오래였습니다.
"죽음이 나를 잊은 게야."
밀가루와 달걀을 섞으며 할머니는 무심히 중얼거렸어요.


강으로 둘러싸인 마을 외딴집에 할머니는 홀로 살고 있다. 하루하루가 고단하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얼굴은 주름으로 가득하다. 죽음을 기다리지만 해야 할 일이 있다. 크리스마스 때 아이들에게 나눠줄 빵을 만들어야 한다. 할머니만의 비법이 담긴 빵이다. 할머니가 반죽을 만들고 있을 때, 검은 그림자가 외딴집 문을 두드린다. 죽음은 할머니를 잊지 않고 있었다.


"나랑 갑시다."
여인의 목소리와 함께 검은 자루가 벌어졌습니다.
"아이고 사신 씨, 뭐가 그리 급해요. 잠깐만 기다려 줘요. 이제 막 크리스마스 빵에 넣을 소가 완성될 참이라고요. 이것만 마저 합시다."


사신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기에 할머니를 향해 팔을 뻗는다. 그 순간, 할머니는 반죽을 사신의 입 속에 넣어준다. 부드럽고 달콤한 반죽에 사신은 정신이 아득해진다. 할머니는 아이들을 위한 빵을 만들어야 한다며 일주일만 기다려달라고 부탁한다. 사신은 이를 수락한다. 그래 놓고 화가 난다. 죽음이란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사신은 약속한 기한보다 일찍 할머니 집으로 간다. 할머니는 벌써 왔냐며 다정하게 사신을 반긴다. 자신을 환영하는 할머니에 사신은 당황하고, 할머니가 주는 빵맛에 감탄한다.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데 할머니가 또다시 부탁한다. 이번에는 누가에 아몬드를 넣어야 하는데 누가 반죽이 바삭해지려면 하룻밤은 식혀야 한단다. 사신은 바삭하고 달콤한 누가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에 하루 정도는 기다려주기로 한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사신의 눈앞에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핫초코가 가득 든 따뜻한 사발을 사신에게 내밀었죠. 달콤한 김이 사신의 눈앞을 뿌옇게 흐렸습니다. 이제 무슨 수로 임무를 수행해야 할까요. 사신은 더 이상 자신이 없었어요.



열 살 무렵부터 삶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옥상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이 정도 높이는 어림없다며 절망했다. 죽음에 진지하지 못했기에 가능했다.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죽음이 두려워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음 자체가 아닌 죽기 직전까지의 삶이다. 잔혹할지, 비참할지, 편안할지, 그저 그럴지, 어떤 모습이 내 마지막일지 몰라 더 두려웠다. 극단으로 몰고 가는 상상력이 제멋대로 작동할 때면 삶과 죽음이 동시에 나를 압박했다. 평온한 마지막을 보장받는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할머니의 팡도르』는 붉은색과 검은색이 여백과 조화를 이루며 전체적인 분위기를 끌고 간다. 삶과 죽음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둥근 몸을 한 사신은 부드럽고 포근하고 우스꽝스럽다. 할머니의 음식에 반해 죽음을 연기해놓고 뒤돌아 귀엽게 화를 낸다. 아이들이 놀란다고 까만 망토를 벗으라는 할머니의 말을 고분고분 듣고, 귤을 까 달라는 아이의 부탁을 다정하게 들어준다. 낯선 경험과 감정에 사신은 본래의 자기를 잊지만 곧 자신의 임무를 상기하고는 머뭇댄다. 사신의 순수하고 순진한 모습에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죽음이 이토록 사랑스럽고 정겹다면, 삶이 죽음을 환영하면서 언제 갈지 협상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이번에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한다.


"그런데 말이에요, 사신 씨. 이 아몬드는 빵에 넣을 게 아니에요. 이건 누가에 넣을 거예요. 해마다 아이들이 누가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알아요? 말랑한 누가 반죽이 바삭해지려면 하룻밤 식혀야 하죠. 비법은 오직 기다리는 거예요."
 

살 만큼 살았다고, 더는 이 세상에 미련이 없다고 하는 순간에도 막상 죽음이 오면 못다 한 일 때문에 미련이 남을 수 있다. 할머니는 자신이 더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이들에게 빵을 나눠줘야 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건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걱정 때문일 것이다.


얼마만큼 살아야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지 모르겠다. 죽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막상 죽음이 닥치면 환영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제 갑시다, 할 때까지 죽음이 삶을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이젠 삶의 소중함과 죽음의 당연함을 알기에 숨 쉬는 지금을 조금씩 즐기려 한다.


부디 나와 당신의 마지막이 이토록 다정하고 달콤하기를, 어쩌면 가장 어렵고 가장 큰 바람을 가져본다.


  죽음이란 언제나 곁에 있는, 우리의 '왼쪽 어깨'에 짊어지고 가는 것임을 느끼고 산다면, 돈 후안의 표현대로 죽음은 '동지'가 될 수 있다. 두렵기는 하지만 지혜로운 교훈의 원천이 되어줄 것이다. 

- 아직도 가야할 길, 모건 스콧 펙 지음, 최미양 옮김, 율리시즈 펴냄



* 할머니의 팡도르, 비올레타 로피즈 그림, 안나마리아 고치 글, 정원정 - 박서영 옮김, 오후의 소묘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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