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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Sep 28. 2020

<부족해서 채워지는 날> 텅 빈 냉장고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텅 빈 냉장고, 가에탕 도레뮈스 지음, 박상은 옮김, 한솔수북 펴냄


부족한 게 많아 어떻게든 숨기려 했다. 사람들이 나를 깔보고 무시할까 봐, 내 능력과 처지를 동정하는 한편 자기만족을 얻어 우쭐할까 봐 싫었다. 우울을 숨기지 못해 하소연한 적이 많았지만 정말 나를 짓누르는 결핍은 꺼내지 않았다. 혹시라도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면서 드러내도 상관없는 문제만 잔뜩 나열했다. 그래서 별 것 아닌 일로 칭얼대는 미성숙한 인간이 되었다.


사실 정말 성숙하지 못했다. 내게 부족한 것을 숨기려 했지 채우려 하지 않았다. 혼자 끙끙 앓는다고 해결되는 게 아닌데 혼자만의 방식으로 풀어보려 하다가 더 복잡하게 만들었다. 사소한 것들이 쌓이고 쌓여 대체 뭐가 문제인지 모른 적이 많아졌다. 나조차 내 골칫거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텅 빈 냉장고』를 읽으면서 내게 텅 비어 있던 게 무엇인지 생각했다. 그리고 가진 게 없던 나를 잡아주던 당신을 오래오래 기억했다.



『텅 빈 냉장고』의 판형은 가로보다 세로가 훨씬 길다. 제목에 나오는 냉장고가 떠오르기도 하고, 표지 그림에 있는 5층짜리 집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야기는 바쁜 하루를 보낸 이들이 맞이한 밤으로부터 시작한다. 사람들은 먹을거리를 사지 못할 정도로 바빴다. 찬장에는 국수 한 가닥 없고, 냉장고는 텅 비었다. 거리의 악사 앙드레이 할아버지도 먹을 게 없다. 말라빠진 당근 세 개가 전부다. 배가 몹시 고픈 앙드레이 할아버지는 위층에 사는 이웃 나빌 아저씨에게 간다. 그런데 그곳에도 달걀 두 개와 치즈 한 조각이 전부다. 서로 곤란하고 미안한 그때, 나빌 아저씨가 앙드레이 할아버지의 팔을 끌고 삼 층으로 간다. 삼층에는 뤼시 아주머니와 산드로 아저씨, 쥘리와 릴리아가 산다. 그곳 역시 먹을 게 없자 다 함께 사 층으로 간다. 클레르 아가씨가 살고 있는 사 층에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다시 맨 꼭대기 층 로진 할머니에게로 간다.


검은색 펜으로만 이루어진 그림에 색이 추가된다. 당근만 있는 앙드레이 할아버지는 주황색, 달걀과 치즈만 있는 네발 아저씨는 노란색 등등 이웃들이 갖고 있는 음식에 맞는 색이 나타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각자의 고유한 색이 드러나고 어우러진다. 표지 그림에서 층마다 색깔이 다른 이유를 알겠다.  



"삼 층에 가보자고요. 다른 재료들이 더 있으면
맛있는 그라탱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요?"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나빌 아저씨가 앙드레이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끄는 장면에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이 갔지만 그 뻔한 이야기가 괜히 기대되고 간절해졌다. 당신이 생각나서 그랬다.


가진 게 없던 내 손을 잡아주던 당신이, 나의 허기를 이해해주고 채워주려 한 당신이, 내가 갖고 있는 말라빠진 당근 세 개가 쓸모 있음을 알려 준 당신이, 자신의 허기를 숨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알리고 해결하려던 당신이 이 안에 있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내내 기분이 좋았다. 앙드레이 할아버지처럼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는데 당신은 다 안다는 듯이 내 손을 잡고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당황해서 끌려가다시피 하는 앙드레이 할아버지와 그런 그를 잡고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는 나빌 아저씨를 보면서 그때의 나와 당신이 떠올랐다. 그렇게 그들은 위로 위로 올라가 서로의 음식을 합치고 나누리라 예상한 결말은 기대보다 풍성해지더니 한 순간 깨졌다. 반전에 놀랐다가 안도했다가 웃었다. 당신에게 가졌던 감정도 그랬다. 내게 왜 그러는지 놀랐다가 점점 당신이 있어 다행이었다가 결국 고마웠다.


당신 덕에 진짜 내 결핍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아직 그것을 꺼내기 힘들지만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닮고 싶어 다른 이의 배고픔도 보게 되었다. 여전히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돌아설 때가 많지만 당신 덕에 손을 내미는 날이 많아졌다. 당신이 있어 텅 빈 냉장고에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어떻게 채워야 하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텅 비어 있어도 괜찮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간혹 채워야 할 곳을 그대로 두고 다른 일로 바쁠 때가 있다. 비어있는 냉장고를 보기 싫어 허기를 참다가 다른 곳에서 폭발하기도 한다. 당신도 그렇다는 말에 웃음이 나온다. 당신이 부족해서 더 좋아진다. 넉넉하지 않은 나와 당신과 또 다른 당신과 당신이 서로의 머리를 맞대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은 값지다. 비록 냉장고 안은 가득 채울 수 없지만 마음의 허기는 조금씩 달랠  있다. 비어있어 괜찮은 날이기도 하다.

 


* 텅 빈 냉장고, 가에탕 도레뮈스 지음, 박상은 옮김, 한솔수북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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