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꿈의 떨림 Oct 07. 2020

<착하다를 착각한 날>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 닐 게이먼 지음, 데이브 맥킨 그림, 윤진 옮김, 소금창고 펴냄


제목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용도 기억나지 않는다. 주인공인 아이가 곶감으로 만든 목걸이를 하고 환하게 웃는 장면만 남아있다. 특별한 사건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 이후로 그림책을 읽지 않았다. 긍정적이지 않던 열 살 아이에게 마냥 행복하고, 마냥 정답고, 마냥 따스하고, 마냥 착한 이야기는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이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거북했고, 갖지 못한 행복에 배가 아팠다.


그림책을 다시 본 건 순전히 일 때문이었다. 그림책은 연령과 상관없이 읽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비현실적인 행복만 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있었다. 어른인 내게는 시시할 거라 짐작하면서 대충 읽고 넘어가려 했다. 예상대로 몇 권은 너무 진부하고, 유치해서 한숨이 나왔다. 착한 사람들이 갈등 아닌 갈등을 겪고 모두가 사이좋게 잘 살았다는 마무리는 확실히 재미가 없었다. 내용만큼 그림도 낡았다. 아이들도 이런 책을 좋아할까, 의심이 들었다. 의외로 흥미진진한 그림책도 있었지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 그러다가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을 만났다.



엄마가 외출한 날, 집에는 '나'와 여동생과 아빠만 남는다. 아빠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신문을 읽고, '나'와 동생은 마당에 있다. 바비 인형을 갖고 노는 여동생 목 뒤로 진흙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나단이 놀러 온다. 금붕어 두 마리가 든 어항을 들고 말이다. '나'는 나단의 금붕어를 갖고 싶어 변신 로봇, 야구카드, 책, 펀칭백, 호루라기 등을 보여주며 바꾸자고 할 때마다 나단은 싫다고 한다.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한 번 아니면
두 번, 너무나 훌륭한 생각을 해낸다.
그들은 전기, 불 그리고
머나먼 우주 등을 발견했다. 훌륭한 생각이란,
세상을 뒤집어 놓을 만큼
멋진 생각이란 말이다.  

세상엔 그런 멋진 생각을
평생 한 번도 못 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아빠랑 금붕어랑 바꾸자!!"


결국 '나'는 나단의 금붕어와 아빠를 바꾸는데 성공한다. 여동생이 엄마가 오면 큰일 날 거라 겁을 주더니 엄마가 오자 고자질한. 엄마의 명령으로 '나'와 동생은 나단의 집으로 아빠를 찾으러 간다.



신문 보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아빠는 따분하고 쓸모없다. 나단은 배쉬티의 전기기타와 아빠를, 배쉬티는 블링키의 고릴라 가면과 아빠를, 블링키는 패티의 토끼 갈베스톤과 아빠를 바꾼다. 드디어 아빠를 찾았는데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아빠는 신문만 쳐다본다.


뒤뜰엔 작은 토끼장이 있었고
토끼장은 얇은 철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빠는 철망 안 잔디에 앉아 신문을 보며 당근을 씹고 계셨다.
아빠는 외로워 보였고 양복바지엔 잔디가 잔뜩 묻어 있었다.


아빠는 신문을 보는데 집중하느라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신을 금붕어와 바꾸든, 고릴라 가면과 바꾸든 상관없다. 아이들을 이해해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눈치다. '나'와 여동생이 싸울 때 조용히 좀 하라고 말한 게 전부다. 아빠의 얼굴은 시종일관 신문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딱 한 번 드러나긴 하는데 극히 일부여서 아빠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아빠가 왜 금붕어 두 마리보다 못한 존재가 됐는지 이해가 간다. 아빠 역시 가족의 존재를 크게 느끼지 않는 듯하다. 엄마가 아니었으면 이들은 서로가 필요할 때까지 찾지 않았을 것이다. 가족끼리 이래도 되나 싶지만 가족이기에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서로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서운해하고 화를 내는 것보다 괜찮아 보인다. 아이들이 찾지 않는다고 해서 아빠가 집에 오지 못하는 게 아니다.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일에 감정을 낭비하지 않는 이들이 오히려 현명할 수 있다. 너희 아빠는 좋은 토끼가 아니라는 패티의 말에 아빠로는 괜찮다고 할 때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의 편을 들어주면 된다.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의 등장인물들이 다정하지 않다고 해서 악하고 나쁜 게 아니다. 그동안 내가 알던 그림책 속 아이들의 캐릭터와는 달리 순진하지도, 해맑지도, 귀엽지도 않지만 그 누구보다 생동감 있고 솔직해서 진짜 아이 같다. 주인공 '나'는 엄마가 경악할 짓을 하면서도 엄마를 무서워한다. 동생을 얄미워하고 귀찮아하지만 떼어놓지 않는다. 아빠를 좋지 않게 평가하는 패티에게 건성이긴 해도 괜찮은 아빠라고 두둔한다. 시종일관 무심하고 시큰둥해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에서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이 꼭 현실에 있는 아이 같다. 어른 역시 마찬가지다.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그렸다. 책을 읽는 이들에게 '너희는 이래야 한다'가 아니라 '너희는 이렇지'라고 보여주고 있어 책장을 넘기는 내내 웃다가 감탄했다. 교훈 따위는 필요 없다는 듯한 결말은 통쾌하고 놀랍다. 그림 역시 오랫동안 박혀있던 선입견을 무너뜨렸다. 볼수록 매력적이다.


그 후로 착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오는 착하지 않은 이야기의 그림책을 찾아다녔다. 아빠를 금붕어와 바꿔도, 엄마를 내다 버려도, 부모를 비웃으며 어깨를 으쓱해도,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지 않아도, 다수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삶을 살아도, 시종일관 냉소적이어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등장인물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 교훈이나 가르침을 주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유쾌한 상상력으로 보여주는 그림책을 보면서 그렇게 살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착해야 한다는 요구에 갇혀 있었다. 착하고 싶지 않았지만 매번 착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당신에게도 그것을 원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에는 화가 났다. 꾹꾹 눌렀던 감정이 폭발할 때면 관계를 끊는 것을 선택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척하는 사람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오해하고 있었다. 착하다는 건 화가 나도 웃고, 손해를 봐도 괜찮다고 하는 게 아니었다. 사이좋게 지내고 싶지 않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며 갈등을 유발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도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착하다'의 반대는 나쁘다, 약다, 얄밉다, 악하다, 독선적이다 등이 아니었다. 잘못 이해한 '착하다'를 무거워했고, 언젠가부터 비판하고 조롱했다. 착해지고 싶지 않아 악독해지려 했는데 그게 더 어려웠다. 진정한 '착하다'의 의미를 모른 채 나와 당신에게 강요했다. 나에게는 학대였고, 당신에게는 불가능이었다. 제일 먼저 내게 착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요즈음,


이젠 착한 이야기가 좋다.


미워하고, 괴로워하고, 무관심하고, 비겁하고, 서툴고, 어설프고, 부족하고, 넘치고, 화내다가도 화해하고, 화해하다가 다시 헤어지고, 엉뚱하고, 뜬금없고, 황당하고, 화를 내고, 토라지고, 다투고,


할 수 있는 만큼만 베풀고, 할 수 없는 건 못 한다 하고, 비겁함을 반성하고, 아닌 것에 대항하고, 행복을 마음껏 드러내고, 상처 받고 상처 주고 상처를 회복하고, 서로를 버리고 싶다가도 다시 끌어안고, 절망하다가도 괜찮은 오늘을 만들려 하는,


특별한 평범을 가진 나와 당신의 이야기가 좋다.  

 

 

* 금붕어 2마리와 아빠를 바꾼 날, 닐 게이먼 지음, 데이브 맥킨 그림, 윤진 옮김, 소금창고 펴냄


    



매거진의 이전글 <아직은 숨기고 싶은 날> 돌 씹어 먹는 아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