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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Oct 14. 2020

<사랑에 용기를 내는 날>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 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지음 / 이경혜 옮김 / 키다리 펴냄


스물일곱 혹은 여덟이었다. 내 남자친구들과 내 친구 K는 그날 처음 만났다. 워낙 붙임성이 좋은 친구들이라 오래 알고 지낸 사이처럼 웃고 떠들고 서로를 놀렸다. 소주 몇 병이 비워졌고, 이런저런 얘기가 오갔다. 어느 순간 K가 만나고 있는 애인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K는 자신의 '오빠'를 언제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 첫인상은 어땠는지, 어떤 면에 반했는지, 자신의 '오빠'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여자를 어떻게 떼어놓았는지 등등을 설명했다. K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그녀는 사랑의 위기와 위협 앞에 굴하지 않았던 일화들을 소개했다. 막장 드라마 같은 순간이 코미디로 바뀌었다. 그녀의 얘기에 한바탕 웃다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오빠'의 뒷바라지를 하겠다는 K의 각오에 남자친구들이 감탄사를 더했다.  


"우리 오빠 시험에 떨어지면 난 리어카라도 끌 거야. 자리 잡을 때까지 리어카 끌면서 뒷바라지할 거야. 오빠를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하겠냐. 리어카보다 더한 걸 끌어야 한다면 기꺼이 한다, 내가."


K는 거침이 없었고, 무척 행복해 보였다. 친구들은 합격하면 너를 버린다고 놀리면서도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강한 첫인상을 남긴 그녀를 친구들은 두고두고 얘기했다. 리어카를 끌겠다는 말은 한동안 명언처럼 남았다. 친구들은 농담인 듯 진담처럼 그런 아내를 맞이하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 남자친구 중 한 명인 S가 내게 물었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니? 바로 죽는 거라면, 예를 들어 트럭이 그에게 달려오는데 내가 그를 밀치고 트럭에 치여 바로 죽는 거라면 그럴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트럭에 치였는데 죽지 않고 오래오래 고통을 느껴야 한다면, 혹은 겨우 살았는데 장애를 얻는다면 그건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넌 어때? 내가 묻자 S는 자기도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각자의 애인을 생각하며 한숨을 한 번 쉬었고, 서로의 눈을 맞추지 않은 채 씁쓸하게 웃었다.


사랑에 물음표를 잔뜩 새기며 소주를 마시던 밤이었다. 죽을 수 있다는 건 사랑인지 용기인지 객기인지, 고통을 느끼고 싶지 않다면 그건 사랑이 아닌지, 그 정도의 애정인지, 비겁인지, 현명인지 등등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했다. 아직 이십 대였던 우리는 사랑은 이래야 한다는 환상과 당위를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하지 못하는 상대와 자신 때문에 아팠고, 또 아팠다.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는 겨울잠을 자야 하는 곰과 겨울을 피해 따뜻한 곳으로 가야 하는 새의 이야기다. 해마다 이별해야 하는 곰은 세상 끝에 있는 새에게 편지를 쓴다. 늘 '나의 새에게', '사랑하는 새에게' 등의 다정한 말로 시작한다. 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과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구구절절하다.


사랑하는 새에게,
오늘 난 큰 결심을 했어. 세상 끝에 있는 너를 찾아가기로 말이야.
여행 잘하고 오라고 친구들도 빌어 줬지.
오소리는 "네 몸을 잘 챙겨야 돼!" 하고 말했고,
여우는 "야자열매 하나 부탁해." 하고 말했지.
비버는 "다들 널 생각할 거야." 하고 말해 줬어.

친구들은 내게 행운을 불러온다는 개암나무 열매를 갖다 줬어.
고사리 베개랑 호수 그림도 갖다 줬고.
난 그 선물들을 내 털 속에 넣어 갈 거야.
친구들이 그리울 때면 꺼내 보면서 마음을 달랠 거야.

나의 새야, 내가 간다!

너의 곰이  


사실 편지 형식으로 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사건보다는 감정이 중심인 듯해서 진부하고 재미가 없다. 몇 개의 작품을 읽고 이 생각이 박혔다. 선입견보다는 취향이다. 편지 형식인 줄 알았다면 이 책을 보지 않았을 것이다. 편지 형식인 것을 안 후에는 시작을 했으니 끝까지 읽어보자는 마음이었다.


초반에 살짝 그만두고 싶었다. 그림을 보면서 참았다. 솔직히 그림도 내 취향은 아니었다. 그런데 묘하게 끌리는 구석이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곰에 대한 기대와 애정이 커졌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새를 만나기 위해 세상 끝으로 향하는 곰을, 물에 빠지고, 화산을 넘다가 발을 데고, 안갯속에서 길을 잃고, 다시 바다를 건너는 곰을 응원했다. 험난하고 외롭고 두려운 상황에서도 새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쁨으로 가득한 곰을 응원해야만 했다.


전반적인 분위기로 봤을 때 이 둘은 분명 만날 것이다. 그것을 예상하면서도 이들은 꼭 만나야 한다고 요구했다. 새를 그리워하는 곰이 애처로웠지만 그보다는 사랑의 위대함을 안고 있는 곰이 멋졌다. 새가 올 때까지 속만 태우며 기다리지 않고 용감하게 세상 끝으로 향하는 곰이 경이롭기까지 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어떤 친구들을 만났는지, 위험한 순간을 어떻게 벗어났는지 등을 편지에 담으면서 새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전하는 곰에게 나 역시 사랑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주인공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다면 역시 편지 형식의 글은 다 이 모양이라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저지르려 했다.



K의 '오빠'는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고, 둘은 결혼해 아이 두 명을 낳았다. 리어카를 끌지 않아도 됐지만 더 큰 시련이 있었다. 어느 , K가 전화하더니 갑자기 술을 마시자고 했다. 늦은 시각이었지만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비상식적인 시어머니를 재미있게 묘사하면서 자신이 당한 일들에 개그를 섞어 얘기했다. K의 말은 빨랐고, 목소리는 높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흥분했지만 흥에 겨워 흥분한 듯도 했다. 차라리 리어카를 끄는 게 낫다고 할 때에는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크게 웃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내게 K는 숨 쉴 틈도 주지 않고 빨리 결혼하라며 재촉했다. 당시 나는 독신주의였고, 애인도 없었기에 강하게 부정했다. K는 남자 친구들 중 몇 명을 거론하며 그들은 어떠냐고 묻고는 다시 울었다. 결혼해서 힘들다면서 왜 내게 결혼을 강요하냐고 했더니 자기는 '오빠'가 너무 좋단다. 그러면서 사랑의 힘이 시댁을 이긴다며 울다가 웃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K의 사랑이 존경스러웠다.  

 

남자친구 S와 나는 그때의 애인이 아닌 다른 사람과 결혼했다. S는 몇 번의 고비를 넘으면서 예전보다 더 단단하게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있고, 나는 절대로 하지 않겠다는 결혼을 한 후에 안정을 찾는 중이다. 간혹 조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 사랑이 뭔지 생각한다. 내가 그를 위해 무엇을 얼마만큼 할 수 있는지 생각할 때면 S의 질문이 떠오른다. 이제는 트럭에 치여 바로 죽는 것도 망설여진다. 이십 대 때 품었던 사랑에 대한 환상과 당위가 희미해지면서 사랑에 더 큰 물음표를 새기는 중이다. 그렇다 해도 지금 나는 사랑하고 있다. 달려오는 트럭 앞에서 나를 희생할 수는 없어도, 험난한 길을 헤쳐 세상 끝에 있는 당신을 만나러 갈 자신이 없어도 어쨌든 사랑하고 있다.


서로 어긋나는 순간을 지나 곰과 새가 만났을 때 미소가 번졌던 건 내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위해 얼마큼 용기를 낼 수 있는지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랑에 용감한 이들을 동경하고 그들처럼 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 내 안에 사랑이 있음을 느낀다. 환상이 사라졌다 해도, 목숨을 걸 만큼 극적이지 않다 해도 우리는 매 순간 사랑에 용기를 내고 있다.


곰과 새의 결말이 이럴 줄 알았지만 막상 이 순간을 보니 안심이 됐다. 거대한 자연 속에서 세상 끝으로 향하는 곰은 작고 외로워 보였는데 서로를 끌어안고 있는 새와 곰은 세상을 꽉 채웠다.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하는 K의 사랑 역시 여전히 반짝이고 꽉 차 있을 거라 믿는다.  


사랑에 용기를 내고 싶지만 자신 없는 당신도, 사랑 앞에 망설이는 당신도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의 곰을 응원했듯이 응원하고 또 응원한다. 다만 그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길 바란다. 지킬 자신이 없다면 빨리 포기하는 것도 사랑에 대한 용기이고 예의다.






중간중간 이들의 만남에 조마조마했고, 사랑과 그리움이 가득 담긴 곰의 편지에 안타까웠고, 마지막에는 저절로 웃음이 나왔지만 취향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가 그림책이 아니었다면, 그래서 그림 없이 글만 읽어야 했다면, 글밥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면 분명 읽기를 포기했다. 아마 당분간 편지 형식의 이야기글은 읽지 않을 듯한데 강하게 말할 자신은 없다.



* 세상 끝에 있는 너에게 /  고티에 다비드, 마리 꼬드리 지음 / 이경혜 옮김 / 키다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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