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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Oct 25. 2020

<살기 딱 좋은 곳을 찾는 날>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고정순 지음, 만만한 책방 펴냄


  아주 나이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한다. 죽음에 이르기 전에 일어나는 일들, 다시 말해 청력, 기억력, 친구들,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생활 방식을 잃는 것이 두렵다는 것이다. 실버스톤 박사의 표현대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계속해서 무언가를 잃는 것"이다.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


자리에서 일어나던 늙은 산양은
힘없이 지팡이를 떨어뜨렸어.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또 그다음 날에도
지팡이를  떨어뜨렸지.  


산양의 다음 이야기를 보기 위해 몇 번이나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숨을 쉰다. 계속 지팡이를 떨어뜨리는 산양이 안쓰럽고 안타깝다. 나의 노년을 상상하자 심장 한쪽이 자꾸만 아프다. 가뜩이나 힘이 없는데 나이가 들면 더 심해질 것이다. 허리는 굽고, 근육은 빠지고, 살은 더 찔 테고, 눈은 잘 보이지 않고, 이는 부실하고, 기억력과 사고력은 형편없고, 감정도 생각도 더는 신선하지 않게 된다.



젊은 시절은 멋있었다는데 지금의 산양은 볼품없다. 산양은 책의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 처량하게 앉아있거나, 구부정하게 서 있다. 몸의 일부가 잘리기까지 한다. 늙은 산양이 나를 아프게 하지만 어딘지 웃기고 재미있다. 이 이야기가 비극적이지 않겠다는 예감이 든다. 그래도 아픈 건 아프다. 간신히 심장을 진정시키고 책장을 넘긴다.



              뭐야,
혹시 죽을 날이
       가까웠나?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순간, 산양이 책의 중앙을 차지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충격이 보이지만 그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려는 자세가 더 크게 느껴진다. 산양은 고민에 빠진다. 곧 죽게 되겠지만 가만히 앉아 죽을 수 없다. 그는 커다란 짐을 들고 집을 나선다.  


어이, 잘 있게.
나는 죽기 딱 좋은 곳을 찾아 떠나네.
 

  정신분석학자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을 8단계로 나눴다. 성공해야 할 과제와 그 과제를 성공하지 못했을 때 맞게 되는 심리적 위기를 단계별 명칭으로 삼았다. 1단계는 '신뢰감 VS 불신감'이다. 양육자가 아기의 욕구를 일관성 있게 만족시켜 주느냐 아니냐에 따라 세상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와 불신이 생긴다.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는 '자아통합 VS 절망감'이다. 노년기는 젊음과 사회적인 역할을 잃고, 주변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는 시기다.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면 자아통합을 이루지만 삶이 무의미하다고 느끼면 절망감에 빠진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산양에게 절망감과 무기력이 보인다. 하지만 죽기 딱 좋은 곳을 찾겠다는 장면에서는 삶을 의미 있게 보내고자 하는 의지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연함이 보인다. 방금 전만 해도 다음 이야기를 보기 위해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는데 이젠 망설이지 않고 장을 넘긴다.


  매슬로우의 욕구 위계 이론이 맞는다면 삶의 관심사와 범위를 좁히는 것은 자아실현이라고 하는 인간 성취감의 최대 원천과 상충하는 일이 된다. 따라서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불행해진다고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스텐슨 교수의 연구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결과였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불행해지기는커녕 오히려 긍정적인 감정을 더 많이 느끼는 것으로 드러났다. 불안, 우울, 분노 등을 느끼는 경향도 더 적었다. 물론 시련을 겪기도 하고, 긍정적인 감정과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통절한 순간도 더 늘어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시간이 흐르면서 정서적으로 만족스럽고 안정적인 경험을 더 많이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가 들면서 삶이 더 협소해지는데도 말이다.  
  이 연구 결과는 또 다른 의문을 낳는다. 만약 나이가 듦에 따라 무언가를 달성하고, 소유하고, 획득하는 것보다 일상의 기쁨과 인간 관계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쪽으로 변화한다면, 그리고 그런 것에서 더 큰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면, 왜 우리는 그렇게 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을 보내는 걸까? 왜 우리는 나이가 들 때까지 기다리는 걸까? 이러한 교훈을 배우는 것이 너무 어렵다는 게 가장 일반적인 견해다. 산다는 것은 일종의 숙련 과정이며, 노인들의 침착함과 지혜는 오랜 시간에 걸쳐 획득된다는 것이다.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


산양은 죽을 장소로 들판을 선택한다. 멋있게 달리다가 죽고 싶다. 그런데 들판에는 이미 많은 동물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너무 시끄럽다. 산양은 그곳을 피해 높은 절벽으로 향한다. 절벽 끝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죽을 작정이다. 하지만 그곳을 오를 힘이 부족하다. 시원한 강이 낫겠다 싶어 발길을 돌리지만 강물에 비친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더는 죽기 딱 좋은 곳이 생각나지 않는다.


안타깝고 아팠던 건 늙고 힘없는 산양 때문이 아니었다. 언젠가, 어쩌면 예상보다 빨리 맞이하게 될 나의 노년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지팡이를 떨어뜨리는 산양을 보면서 손바닥으로 심장을 눌러야 했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웃음이 나왔다.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죽기 좋은 장소를 찾아가는 산양을 볼 때에는 누군가가 떠올라 미소를 지었다. 곧 그를 지우려 고개를 저었지만 말이다.


젊은 시절에 산양은 멋있었다. 지금은 스스로를 현명하다고 판단한다. 자기는 틀린 적이 없단다. 죽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난다면서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들판을 뛰는 동물들을 바라보며 너무 시끄럽다고 한다. 산양이 어떤 캐릭터인지 감이 온다. 자존감이 높고, 나르시시즘이 강하고, 용기가 있다. 자신의 삶을 개척하면서 살았기에 자부심도 세다. 단순하고 순수해서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난다. 정이 많아 다른 이의 어려움을 지나치지 못하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기에 강요도 많이 한다. 자신만큼 열정적이지 않은 동물 친구가 못마땅해 훈계도 많이 했을 것이. 솔직히 내가 어려워하고 부담스러워하는 유형이다. 존경하기도 하지만 어떤 면은 웃기기도 하다.


그렇긴 해도


분명 산양은 멋있다. 그(녀)는 죽을 날을 기다리며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남은 생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죽음을 받아들였기에 자신이 선택한 곳에서 죽으려 했다.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왜 여기가 아닌지도 깨달았다. 비장한데 웃기고, 슬픈데 재미있는 이유는 삶을 대하는 산양의 자세 때문이다. 산양은 늙음과 죽음을 마냥 서럽고 절망적이지 않게 표현했다.


어느 날부터 내 나이가 부끄럽고 낯설었다. 스물다섯 이후는 없을 줄  알았기에 지금 이 나이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까마득하고 아득했던 그 나이가 이렇게 올지 몰랐다.


이제 나는 젊지 않다. 늙지는 않았는데 점점 늙어가고는 있다. 내게 노년이 올지 안 올지 모르지만 이제는 오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자아통합을 이룰 수도,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는 그 시기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고민이다. 멋있고 아름답게 늙고 싶다. 때때로 절망하기도 하겠지만 산양의 이야기처럼 따뜻한 유머가 바탕이면 좋겠다.


알고 있다. 그냥 오늘을 잘 살면 된다. 산양이 자신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잘 살았던 오늘이 모였기 때문이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 과거를 붙들고 있다가, 미래를 걱정하다가,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역시 자아통합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안 되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 그냥 되는 대로 살아볼까 생각 중이다.


적당히 후회하고 아쉬워하면서, 늙음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숨기지 않고, 이  글의  마무리를 제대로 하지 못해도 그 정도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글도 이 모양인데 삶은 어떻겠냐는 확장된 비난은 멈추고,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이 내 삶의 전부는 아니기에 안 되는 일에 미련을 지운 채, 절망할 때는 절망도 하면서


그냥 오늘을 살기 딱 좋은 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그것이 현재에 대한 예의이고, 살아있는 지금에 대한 애정이다. 노년의 자아통합은 닥치면 생각하련다.


  카스텐슨 교수는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초로 해서 하나의 가설을 만들었다.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어 하는지는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남아 있다고 생가하는지에 달려 있다는 가설이다. 젊고 건강할 때는 자신이 영원히 살 것처럼 믿는다. 가지고 있는 기능과 능력을 잃을까 봐 걱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한다. "세상은 네 손 안에 있다." "마음만 먹으면 못 해낼 일이 없다." 젊은이들은 현재의 즐거움을 기꺼이 미룬다. 

  (중략)  
  
  삶의 시야가 축소되어 눈앞의 미래가 불확실하며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삶의 초점은 지금, 여기로 변화하게 된다.   

-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부키 펴냄 -



* 어느 늙은 산양 이야기, 고정순 지음, 만만한 책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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