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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Oct 29. 2020

<우열의 논리에 통쾌했던 날>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길미향 옮김, 현북스 펴냄


생 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싫어졌다. 열광한 적은 없었지만 잠깐씩 설렜던 작품이었다. 그 이야기가 극도로 싫어졌다.


어린 왕자의 순수함을 부각하기 위해 화자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내세워 어린 왕자와 어른들을 철저히 분리시켰다. 자기가 정한 답에 맞지 않는 대답을 하면 세상에 찌들고 답답한 사람이라 치부했다. 보아뱀을 삼킨 코끼리를 알아보지 못한다고 한심한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만들었다.


어린아이의 순수를 잃고, 질문을 잊고,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른 채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정말 중요한 사실을 버린 채 하나의 목적으로 향하는 인물들이 나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들의 삶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도 않은 채 어리석고 한심하고 이상하다고 단정 짓고 싶지 않. 화자인 '나'는 어린 왕자를 높이느라 다른 이들을 낮추기만 했다. 그 바람에 그들을 입체적으로 만들지 못했다. 『달과 6펜스』의 화자인 '나'의 고백처럼 한 인간 마음 안에는 다양한 특질이 형성되어 있는데 『어린 왕자』는 하나의 모습만 보고 이게 그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어떤 면에서는 안쓰럽고, 안타깝고, 보통에 가까운 이들이 어린 왕자의 시선에서 고약하고, 이상하고, 부적당한 존재가 됐다. 내 눈에는 어린 왕자가 다른 이에 대한 배려는 없고, 자기가 옳다고 우기는 고집불통으로 보이는데 말이다.


스트릭랜드 부인은 참을 수 없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때 나는 부인에게 약간 실망했던 것 같다. 그때만 해도 나는 사람의 인격이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 훌륭한 여자에게 그토록 깊은 앙심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 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 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  

- 달과 6펜스, 서머싯 몸 지음, 송무 옮김, 민음사 펴냄 -


내가 더 이상 순수하지 않아 그렇다고 한다면, 어린 왕자처럼 상대가 바쁘든 말든 자신의 궁금증이 해소되어야 직성이 풀리는 게 순수라면, 자기만의 확고한 틀이 있어 거기에서 벗어나면 상대를 이상한 어른으로 여기는 게 순수라면 나는 그것을 거부하겠다. 순수하다는 게 좋다거나 착하다거나 성숙하다거나 옳은 것은 아니기에 마냥 순수하고 싶지 않다. 나는 순수를 바탕으로 현실의 때를 묻히며 살고 싶다. 그래서 현실을 살아가는 당신을 이해하고 나 역시 이해받고 싶다.

 

브리타 테켄트럽의 『빨간 벽』에 기분이 상했던 것도 화자, 곧 작가의 시선이었다. 생쥐를 높이기 위해 벽을 넘지 못하는 다른 동물들을 낮추는 게 싫었다. 친구들은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파랑새의 말이 그래서 크게 들렸다. 동물 친구들 역시 벽을 통과했지만 마지막까지 생쥐와의 우열을 만든 것 같아 못내 불편했다.


덕분에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를 다시 찾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부족해서 이상하다고 여겼던 다섯 친구들이었다. 빠르게 책장을 넘기면서 이건 뭐야, 라는 뜻으로 어깨를 으쓱했었다.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는 어딘가 하나씩 부족한 다섯 친구들과 완벽한 친구의 이야기다. 첫 번째 친구는 배에 커다란 구멍들이 있다. 두 번째 친구는 몸이 꼬깃꼬깃 주름이 져있고, 세 번째 친구는 몸이 물렁물렁해서 힘이 없다. 네 번째 친구는 모든 게 거꾸로라 물구나무를 선 채 살고 있다. 다섯 번째 친구는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 못난이다. 이들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집에서 특별한 일없이 살고 있다. 다섯 친구들은 하고 싶은 일도 없다. 덜컹거리는 집에서 누가 가장 못났는지 입씨름을 하면서도 즐겁고 행복하다. 어느 날, 완벽한 친구가 이들을 찾아온다. 완벽한 친구는 아무것도 안 하는 다섯 친구가 한심하다. 뭘 할지 생각하라며 잔소리하지만 이들에게는 소용없다.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완벽한 친구는 다섯 친구들에게 너희는 아무 쓸모가 없다고 말한다.


완벽한 친구의 눈에 비친 다섯 친구들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려 하지 않고, 서로의 부족함도 채워주지 못한다. 사실 이 친구들은 누가 봐도 한심하고 못났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집에서 누가 가장 못났는지 입씨름이나 하는 이들을 긍정적으로 보기란 쉽지 않다. 다섯 친구들은 자신의 약점을 고쳐야 할 이유를 알지 못하고, 친구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몸이 흐물거리든, 거꾸로 있든, 엉망진창이든, 생각을 못 하든, 의지가 없든 이들에게는 상관없다


무엇이든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는 완벽한 친구의 말에 다섯 친구들은 생각을 해도 구멍으로 빠져나간다, 생각이 주름 사이로 꼭꼭 숨는다, 생각을 하면 흐물흐물해지고 잠이 온다 등의 이유를 댄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아무 쓸모가 없어! 아무것도 아니라고!"

완벽한 친구가 왜 이렇게까지 말했는지 이해한다. 부끄러움은커녕 그럴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당연하다는 듯이 늘어놓는 친구들에게 뻔뻔함과 게으름과 나태를 느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면 완벽한 친구의 눈으로 나와 당신을 바라봤다. 왜 이것밖에 아닌지, 왜 이것밖에 하지 않는지, 왜 이것밖에 못하는지 멸시하기도 하고, 안타까워하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했다. 어린 왕자처럼 순수하지 못한 나와 당신을 비난했고, 생쥐처럼 벽을 넘지 못하는 좌절감이 분노로 변해 나와 당신을 미워했다. 내가 형편없으니 당신이라도 뛰어난 사람이길 바랐다. 동시에 나의  강점을 갖지 못한 당신을 이해하지 못했다. 성공한 사람과 성공하지 못한 사람, 치열하게 사는 사람과 치열하지 못한 사람 등의 기준을 정해놓고 거기에 맞추지 못하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만든 우열의 논리에 결국 나와 당신이 다쳤다.  


『어린 왕자』와 『빨간 벽』에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그 주제에 동의한다. 다만 높은 이상을 정해놓고 그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모든 이들을 형편없다고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은 너무 복잡하고 사람들은 무척 다양해서 순수와 불순, 적극과 소극, 우등과 열등 사이에도 수많은 갈래가 존재한다. 순수하지 않다고 해서 추잡하고 추악하지 않다는 것을, 능동적이지 않다고 해서 마냥 순응하거나 수동적이지 않다는 것을, 인간은 모든 면에서 우월할 수도 없고 열등하지도 않다는 것을 이젠 안다.


완벽한 친구가 진정 완벽하지 않듯이 다섯 친구들 역시 무시해도 될 만큼 부족하지 않다. 오히려 이들은 삶에서 가장 어렵고 가치 있는 일을 이루었다. 완벽한 친구의 비난에 움츠리지 않고 자신의 강점을 깨달았다. 상대를 비난하거나 깔보지 않으면서 반격을 가했다. 자신과 상대를 그대로 봐주고, 그 안에서 긍정을 발견하고, 서로가 있어 신이 나기 때문에 굳이 타인을 낮추면서 자신을 높일 필요가 없었다. 자기들이 반격을 했는지, 맞섰는지도 모르기에 다섯 친구들이 더 멋지고 통쾌하다.


이런 게 부족이라면 부족해도 괜찮다고, 오히려 부족해서 훨씬 유쾌하고 즐겁다고 말하고 싶다.  



* 조금 부족해도 괜찮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지음, 길미향 옮김, 현북스 펴냄



참고 : 빨간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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