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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Nov 06. 2020

<제대로 일어나고 싶은 날> 가드를 올리고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가드를 올리고, 고정순 지음, 만만한책방 펴냄



지하철 역에서 두 번 쓰러졌다.


처음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당시 동대문운동장역)이었다. 2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내려야 했는데 멍하니 서 있다가 사람들이 밀려오자 그대로 쓰러졌다. 바닥에 엉덩이와 머리를 부딪칠 때에도 정신은 멀쩡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를 들었고, 내 몸을 흔드는 손길도 느꼈다. 그런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겨우 일어났다. 이상하게 창피하지 않았다. 이게 뭐지, 싶었다. 그러다가 웃음이 나왔다. 머리와 몸이 욱신거리는데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고 있는 내가 웃겼다. 내게 일어난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낯설고 생경한 그 느낌이 내 몸 어딘가를 간지럽혔다. 그러다가 한 대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밀려오는 사람들을 보면서 숨이 막혔던 순간이 떠올랐다.  


두 번째는 5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가는 중이었다. 설계를 잘못했는지,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지 5호선을 타기 위해서는 엄청 걸어야 했다. 지하철을 탈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사람들과 마주 보면서 앉아있는 구조가 힘들었고,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 버거웠다. 환승하러 가는 통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은 공포 그 자체였다. 그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나를 덮칠 것만 같았다. 잠깐 주저앉았는데 그 뒤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역시 누군가가 나를 깨웠다.


그 후 몇 년 동안 지하철을 타지 못했다. 교통체증을 감수하면서 버스를 타고 출퇴근을 했다. 버스를 타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지만 지하철보다는 나았다.


사람들이 무서웠다. 특정 몇 명에 대한 두려움이 불특정 다수에게로 향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고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아, 라는 위로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에 고마움과 서운함이 엉켰다. 나조차 내가 왜 이러는지 이해하지 못했기에 나를 위로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다. 상담을 받기 위해 정신과를 알아봤다가 이마저 포기했다. 가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곳에서조차 나를 받아들이지 못할 것 같았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안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고, 자꾸만 깊어지는 좌절과 패배의식을 얼마나 내보일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있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서 어리광이나 부리는 나약한 인간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렇게 보이는 나였기에 다시 한번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산을 오른다.
처음에는 단박에 오를 것 같았지.
생각처럼 쉽지 않네.


쉬울 줄 알았다.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룰 줄 알았다. 이십 대 초반에게 4년은 길고도 긴 시간이어서 그 안에 당연히 될 줄 알았다. 어디에서 그런 자신감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처음으로 기대했고, 처음으로 간절했고, 유일하게 자신 있던 꿈에 절망이 반복되면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거 하나 이루지 못했을 뿐인데 내 존재가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다른 분야에서라도 인정을 받아야 했다. 적어도 비난은 받지 말아야 했는데 한 번씩 크게 다치고 넘어지고 깨졌다.



『가드를 올리고』라는 제목과 책을 이해하기 위해 사전을 검색했다. 권투에서 가드는 선수가 상대편의 주먹을 막기 위하여 취하는 팔의 자세라고 나온다. 자신을 보호하면서 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기에 매우 중요하다.


『가드를 올리고』는 빨간 글로브를 낀 선수와 검은 글로브를 낀 선수의 결투를 산에 오르는 과정과 맞물려 표현하고 있다. 글은 산에 오르는 고달픔과 막막함에 대해 썼고, 그림은 링 위에서 처절하게 싸움을 벌이는 두 선수를 그렸다. 관객은 없다. 오로지 '나'와 상대만 있을 뿐이다. 어느 순간 상대도 사라진다. 이제부터는 혼자만의 싸움이다. 내가 뭘 하는지, 다시 올라갈 수 있는지, 길을 잃은 건 아닌지, 바람이 다시 불지 막막하기만 한 상황에서 멈추고 싶은 '나'를 이겨야 한다.


권투를 제대로 본 적이 없다. 부은 눈에 초점을 잃고, 터진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다리에 힘이 풀려 흔들리는 모습이 너무 처참해서 보고 싶지 않았다. 그냥 쓰러져 있어도 되는데 기어코 일어나 맞고 때리는 그들이 안타까워 어느 한 사람을 응원할 수도 없었다.  상대가 쓰러져야 끝나는 잔혹한 경기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다칠 걸 알면서 또 링 위에 오르는 선수들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알고 싶지 않았던 링 위의 결투가 방어할 수 없을 만큼 훅, 들어와 마음을 강타한다. 목탄화로 거칠게 그린 싸움은 너무 처절하고 치열해서 그들의 주먹에 내가 맞고 있는 듯하다. 단박에 오를 줄 알았던 산은 생각처럼 쉽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골짜기, 바위, 웅덩이 등이 나온다. 한 대 맞았는데 또 주먹이 날아오는 링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이제는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다.  

 


더는 링에 올라가고 싶지 않았다. 어디에서 날아올지 모르는 주먹을 더는 맞고 싶지 않았다. 공격은커녕 방어조차 하지 못하는 무력감을 더는 느끼고 싶지 않았다. 만만한 상대인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면서부터 항복하고 싶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이라면 조용히 그만두는 게 나았다. 그동안 맞았으니 이쯤에서 내려와도 괜찮지 않을까, 나름의 변명을 생각했다.


멍든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주먹이 날아온 자리는 부풀어있지만 그는 웃고 있다. 슬픔과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지는데도 그는 다시 가드를 올린다. 이 장면이 너무 처연하고 숭고해서 가슴이 먹먹하다. 어느 날의 당신 같아 오랫동안 바라보고 바라본다. 그러다 문득,


나약한 인간이지만,

별 것 아닌 일에 또 상처를 받겠지만,

그때처럼 한 대 맞고 쓰러질 수도 있지만

주인공처럼,

당신처럼

다시 가드를 올리고 싶어 진다.


살아있는 한 삶이라는 링에서 내려올 수 없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대로 버티고 싶다. 아니다. 굳이 버티지 않아도 괜찮다. 넘어져도 된다는 것을 알아가고 싶다. 내가 배워야 할 건 쓰러지지 않는 법이 아니라 제대로 일어서는 법이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겠지만 힘겨운 몸짓으로라도 다시 일어나고 싶다. 다시 인파 속에서 쓰러지는 날이 오더라도, 헛손질에 중심을 잃고 넘어지더라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두들겨 맞더라도 당신처럼 힘겹게라도 웃으며 다시 가드를 올리고 싶다. 다른 이의 인정이나 응원이 없어도 나의 싸움을 시작하고 싶다. 야유와 비난에 만신창이가 되더라도 제대로 일어나고 싶다. 오롯이 나와의 싸움을 이겨내고 싶다.


 

* 가드를 올리고, 고정순 지음, 만만한책방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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