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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Nov 15. 2020

<과정이 중요해진 날>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존 클라센 그림, 맥 바넷 글, 이남희 옮김, 시공사 펴냄


칸트의 천재론으로 시작한 대화는 '운명이다'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칸트는 오로지 예술가에게만 천재라고 했대요. L이 이 말을 했을 때, 나는 '운명'이라는 말로 수용인지 허무인지 모르는 진심을 드러냈다. 수많은 예술가 중 결국은 운명이 허락한 이가 천재가 되는 거라며 그동안 내내 거역하고 거부했던 운명을 내세웠다. 심지어는 노력 자체도 운명이라 했다. 어느 정도는 본인의 의지이지만 그 이상을 뛰어넘는 노력은 타고나는 거라고 했다.


운명은 존재한다 믿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태어남과 죽음, 국적과 인종, 가족을 포함한 새로운 관계는 계획하고 결정할 수 없지만 나머지는 스스로 하기 나름이라 여겼다. 노력만 하면 다 이룰 수 있다고  믿었기에 일이 잘 되지 않을 때마다, 관계가 엉클어질 때마다 게으르고 멍청한 나를 책망했다. 그랬던 내가 말끝마다 운명을 꺼냈다. 노력마저 운명이라 했다. 대화 내내 웃었지만 운명에 굴복하는 듯해서 심장 한 구석이 저리고 아팠다.


알고 있었다. 나는 결코 천재가 아니었다. 천재는커녕 평균 어디쯤에라도 있으면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천재이길 바라고 바라면서 혹시나 하는 기대를 놓지 않았다.


취미는 미를 판정하는 능력으로, 천재는 미를 산출하는 능력으로 규정한다. 이에 상응하여 자연미의 판정에는 취미가, 예술미의 가능에는 천재가 요구된다. 천재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능력도 역시 칸트에게서는 취미를 가능하게 해주는 능력과 동일하다. 즉 지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미의 판정, 즉 취미에서와는 달리 천재에게는 상상력의 자유로움이 극치에 다다른다. 따라서 천재는 범인이 가질 수 없는 비범한 상상력의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천재는 학문의 능력(지성의 능력)이 아니라 예술에 대한 재능을 말한다. 그리고 그런 한에서 천재의 핵심 요소 중 하나가 바로 독창성이다.     

- 판단력 비판, 임마누엘 칸트 지음, 김상현 옮김, 책세상 펴냄 -


어렸을 때부터 천재 예술가들의 삶을 동경했다. 그들과 나의 공통점을 찾으면서 나 역시 천재가 아닐까, 의심했다가 확신했다. 삶에 적응하지 못하는 그들이, 인간관계에 서툰 그들이, 현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그들이 꼭 나 같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들에게는 내가 도달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자신의 재능을 단련하기 위해 힘겹게 투쟁했다. 광기를 작품으로 승화하기 위해 처절하게 몸부림쳤고, 삶의 부조리와 생의 고통을 온몸으로 끌어안은 채 누구보다 치열하고 민감하게 반응했다.  


L과 대화를 나누는 내내 이건 수용인지, 허무인지, 포기인지 헷갈렸다. 모든 게 다 운명이라면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대체 어디까지 운명을 받아들이고, 삶을 개척해야 하는지 어지러웠다. 나처럼 어느 날 갑자기 운명론자가 되었거나, 운명 앞에 혼란스러워하는 인물이 나오는 그림책이 있는지 찾아보려던 순간,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가 떠올랐다. 절대 이런 내용이 아니지만 혼란을 정리하기에는 충분했다.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판다.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을 찾는 게 그들의 사명이다. 땅 아래 깊숙한 곳까지 내려왔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곳곳에 보석이 박혀 있는데 그들은 끝까지 엉뚱한 곳만 판다. 한 번만 더 같은 곳을 파면 보석이 삽에 부딪칠 텐데 그들은 그 한 번을 더 하지 못하고 다른 곳에 삽질을 한다. 같이 간 개의 시선이 보석으로 향하지만 샘과 데이브는 신경 쓰지 않는다. 보석을 앞에 두고 계속 방향만 바꾼다. 지친 그들이 까무룩 잠이 든 순간, 뼈다귀가 묻힌 곳을 향해 개가 땅을 판다.  


 

뻘짓을 하고 있다 느낄 때면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를 읽었다. 내가 하고 있는 삽질이 결코 쓸모없는 짓이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싶었다. 계속 파다 보면 원하는 게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샘과 데이브는 보석이 있는 곳을 잘 피했지만 한 곳만 파는 나는 잘 되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빈손으로 돌아와도 멋지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긴 해도 삽질만 한 그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나는 보석만 봤다. 뼈다귀를 입에 물고 있는 개와 아무것도 얻지 못한 샘과 데이브를 비교하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들이 서로 음식을 나누고, 열심히 땀을 흘리고, 함께 잠들었다가 놀라서 깬 그 순간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말 어마어마하게 멋졌어."
둘은 동시에 말했어요.


샘과 데이브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을 보석이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보석만 봤고, 그것만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이라 생각했다. 천재의 삶을 살지 못한다고 내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는데 나는 오로지 그 인생만이 가치 있다고 착각했다.


  오이디푸스는 '실존'하고자 한 인물이다. 그는 가만히 앉아서 신탁에 순응하지 않았다. 운명의 바퀴 밖으로 탈출하려고 했으며, 스스로 자기만의 운명의 바퀴를 굴리려 했다. 또한 다른 존재와 사귀고 연대했다. 온 나라가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 있을 때, 그 문제를 풀기 위해 밤낮으로 궁리했다. 처남 크레온에게 신탁을 받아올 것을 명하고,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를 부르고 문제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사자에게도 양치기에게도 청하며, 무엇이 문제인지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오이디푸스의 질문은 결국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이라고 봐야 한다. '당신이 바로 그 살인자입니다'라는 사실이 확인될 때까지 던지는 질문, 최종의 답을 찾기 위한 최종의 질문을 던지지 않으면 실존에 이를 수 없다.    

- 실존주의자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묻다, 이하준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

 


L과 대화를 마친 다음 날까지 나는 왜 모든 것을 운명이라 했는지 생각했다. 비겁하게 운명 뒤에 숨고 있는 건지, 운명을 탓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건지, 몇 번의 실패로 무기력해진 건지 돌아봤다.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나는 운명에 감사했다. 시리아를 비롯한 내전 국가에서 태어나지 않은 게, 전쟁과 식민지를 겪고 있지 않은 게, 그래도 우리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게, 큰 사고 없이 오늘 하루를 보내고 있는 게 고맙고 다행이었다. 국가도, 인종도, 성별도, 시대도, 가족도 선택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기에 내게 주어진 상황에 안도했다. 꿈꾸던 삶은 아니지만 소소하고 소박한 일상이 얼마나 값진지도 깨달았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삽질을 이어가는 지금이, 우유와 과자를 나누는 가족과 친구가 있는 오늘이, 예상하지 못한 채 떨어졌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순간이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이었다.


그동안 내 것이 아닌 천재만 바라보다가 평범함 속에서 빛나던 나를 놓쳤다. 결과에만 집착하느라 과정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고, 그 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변수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룰 수 없는 목표에 집착하느라 내가 이뤄놓은 것들을 하찮게 여겼다.


샘과 데이브는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을 보석이라 단정 짓지 않았기에 그것을 찾지 못해도 땅을 팔 수 있었다. 뜻하지 않게 아래로 아래로 추락했을 때에도 행복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어마어마하게 멋진 것은 자신의 한계를 느낄 때까지 땅을 판 뒤에 찾아온 일상이었다. 천재나 부자가 아니어도 함께 있는 지금 여기에서 의미를 찾았고, 행복을 발견했다. 그게 운명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정해진 운명이 있다 해도 우리에게는 수많은 선택권이 있다. 그 결정으로 운명을 바꿀 수 있는지, 그것조차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면서 행복을 만드는 건 결국 내 몫이다. 결과가 아닌 과정을 받아들이며 즐기는 것도, 충분히 원망하고 욕하면서 다시 나아가는 것도, 내가 선택한 일에 어떻게든 책임을 지려는 것도, 뜻하지 않게 만난 당신을 내일 또 만나는 것도 나만이 할 수 있다. 그게 운명이든 아니든 이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딧세이아》에는 제우스가 운명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인간들의 모습을 비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들은 걸핏하면 신들에게 잘못을 돌리려 한다. 인간들은 재앙이 우리에게서 비롯됐다고 말하지만, 실은 그들 자신의 잘못된 짓으로 인해 정해진 몫 이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이다.   

- 실존주의자들에게 인생의 즐거움을 묻다, 이하준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


* 샘과 데이브가 땅을 팠어요, 존 클라센 그림, 맥 바넷 글, 서남희 옮김, 시공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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