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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Dec 18. 2020

<생명으로 과시하는 날> 멋진 하루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멋진 하루, 안신애 지음, 고래뱃속 펴냄


재작년 겨울, 패딩 점퍼를 샀다. 아웃렛을 두 바퀴 돈 후에,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심호흡을 여러 번 한 에 결제를 해야 할 정도의 금액이었다. 내게는 큰 돈이었는데 같이 쇼핑을 한 동생과 엄마는 그게 제일 낫다며 부추겼고, 한 벌 정도는 살 수 있지 않냐고 했다.


그때보다 훨씬 몇 년 전에 변변한 겉옷 없이 겨울을 보내고 있는 나를 엄마는 무척 안쓰러워했다. 엄마는 겨울 외투를 사야 한다며 나를 할인매장으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코트 한 벌을 사줬다. 코트를 보니 패딩점퍼도 갖고 싶었다. 하지만 차마 엄마에게 이것까지 사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엄마는 비싸지도 않은 점퍼를 몇 번이나 들었다 놓았다 하다가 5개월 할부로 사는 나를 보면서 속상했다고 했다. 그렇게 바쁘게 살면서 왜 돈이 없냐, 너는 왜 그렇게 실속을 차리지 못하냐,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면서 너무 힘들게 일하는 거 아니냐, 혹시 이용만 당하는 건 아니냐 등등의 걱정을 늘어놓으며 한숨을 쉬던 엄마가 떠오르자 보여주고 싶었다. 일시불로 결제해주세요. 엄마가 들을 수 있게 크게 말했다. 엄마에게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다.


재작년 겨울, 꽤 큰돈을 지불하고 산 패딩은 울룩불룩하지 않아 깔끔하다. 품이 넉넉해서 많이 껴입을 수 있다. 길이가 종아리까지 내려와서 하체도 덮어준다. 엄청난 추위 앞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거위 솜털과 깃털의 최고급 비율 덕에 가볍고 따뜻하다. 무엇보다 모자에 달린 풍성한 라쿤털이 자부심을 심어준다. 하나의 색이 아닌 다양한 색이 섞인 푸른 털은 검은색 점퍼와 어울리면서 돋보인다. 그 덕에 이 옷의 값어치가 올라간다.


친구를 만나거나, 중요한 모임이 있거나, 누군가에게 과시하고 싶을 때면 이 옷을 입었다. 비싸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민망하면서 기분이 좋았다. 날이 따뜻해져 더는 이 옷을 입을 수 없게 되면 아쉽고 서운했다. 날이 추워지면 가장 먼저 이 옷부터 챙겼다. 오묘한 푸른빛의 털을 모자에 달면서 여전히 풍성한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그랬던 털을 모자에서 뗐다. 옷을 돋보이게 하고, 옷이 비싸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털을 더는 달 수 없었다. 이 정도로는 어림없지만 최소한의 양심이었다.


그동안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자세하게 알고 싶지 않았다. 그 끔찍한 진실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추운 겨울에는 동물의 털에 의지해야 하고, 육식을 포기할 수 없기에 차라리 모르는 게 나았다. 『멋진 하루』의 표지처럼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고 싶은 모습만 프레임 안에 담고 싶었다. 프레임 밖의 진실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책 표지를 펼치지 않았다면 보지 않았을 족쇄처럼 어떤 것은 그냥 덮어두고 묻어두고 싶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또 유지하려면 부나 권력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이른바 존경은 오로지 증거에 의해 받는 것이므로 부나 권력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부의 증거는 그 사람의 중요성을 타인에게 선명하게 인상 지우고 잊지 않도록 하는 동시에, 자기만족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도 크게 기여한다.

- 유한계급론, 소스타인 베블런 지음, 박홍규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      



우아한 가족이 행복몰에 입장한다. 행복몰은 명품 가방, 화장품, 의류, 가구, 동물 공연, 다양한 먹을 거리 등 오감을 자극하는 모든 것을 갖춘 대형 쇼핑몰이다. 색색의 풍선과 반짝이는 조명이 이곳에 입장하는 사람들에게 환상을 제공한다. 무표정한 얼굴로 통화를 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사람 몇 명을 제외하면 이 곳에 있는 사람 대부분은 웃고 있다. 우아한과 그녀의 남편 고품격과 그들의 아들 역시 이곳에서 멋진 하루를 보낸다. 우아한의 가족은 악어가죽으로 만든 빨간색 가방, 걸치기만 해도 우아한 밍크코트, 숙련된 장인이 만든 명품 소가죽 의자, 왕실에서 사용한다는 명품 향수 등을 구입한다. 물건뿐 아니라 돌고래와 원숭이 쇼에 즐거워하고, 참치와 고기의 맛에 감동한다. 이 즐거움과 감동을 혼자 알고 싶지 않아 우아한과 고품격은 자신들이 무엇을 사고, 무엇을 보고, 무엇을 맛보는지 SNS에 올린다. 게시물에 달린 댓글과 '좋아요'가 행복에 행복을 더한다.


우아한
2시간

#광고글 아님 #밍크코트 추천

세일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왔어요.
밍크 모피라 정말이지 따뜻하고 부드러워요.
그저 어깨에 걸치기만 해도 우아해 보인답니다.

좋아요 27개  댓글 11개


고품격
3시간  

숙련된 장인이 정성껏 만든 명품 소가죽 의자!
온몸을 편안하고 포근하게 감싸 줍니다.  

좋아요 18개 댓글 7개  

이재욱  품격이 느껴집니다.
             우리 집 거실에 두고 싶네요.


우아한  귀염둥이 돌고래의 멋진 점프  
#돌고래 쇼 #돌고래 체험  

유진  어머, 돌고래가 웃고 있네.
        아이들이 정말 좋아할 것 같아요.


우아한 가족이 행복몰에서 보내는 멋진 순간 뒷면에는 잔혹한 진실이 있다. 우아한이 밍크코트가 예쁘다며 감탄의 비명을 지를 때, 우리에 갇힌 밍크들은 죽음을 직감하고 비명을 지른다. 고품격이 경주에서 우승한 개를 보고 있다며 자랑할 때, 자동차에 목줄이 달린 개들은 살기 위해 질주한다. 우아하고 사랑스러운 향을 지닌 향수도, 우수한 효과와 안전성을 입증한 진통제도 동물 실험을 통해 얻은 결과다. 『멋진 하루』의 인물들은, 그리고 현실을 살고 있는 나는 인간의 우아하고 품격있는 생활을 위해 처참하게 죽어가는 생명을 자주 잊는다.



모자에 달린 털은 떼냈지만 오늘도 나는 거위의 솜털과 깃털이 섞인 옷을 걸치고 나왔다. 저녁 반찬으로 햄을 구울지 베이컨을 구울지 고민하고, 주말에는 회와 보쌈 중 무엇을 먹을지 생각한다. 내가 먹고 입고 신고 사용하는 것들 중 그 무엇도 생명이지 않은 게 없다. 생명에 빚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외면했다. 덕분에 죄책감 없이 편하게 살았다. 문득 떠오를 때면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니까, 내가 직접 그 일에 가담하지 않았으니까 괜찮다며 나 자신을 속였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최소한의 양심과 가치는 지키려 한다. 적어도 산낙지처럼 내 앞에서 살아 꿈틀대는 생명은 먹지 않으려 한다. 비싸더라도 쾌적한 환경에서 키운 닭의 알을 먹을 것이고, 동물의 털과 가죽은 필요인지 욕심인지 구분할 것이다. 호기심과 재미로 생명을 대하지 않을 것이며, 내가 소비하는 생명이 끔찍한 삶을 살지 않도록, 최소한의 고통으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동물 복지에 관심을 가지려 한다. 지금 나의 결심이 더 단단해지고 확대되어 생명에 대한 소비를 줄였으면 한다. 적어도 내 주변 사람들만이라도 설득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부디 이 땅의 생명들이 인간의 이기심과 유희로 희생되지 않길 바란다.

 

  굳어지기 전까지 저 딱딱한 것들은 물결이었다
  파도와 해일이 쉬고 있는 바닷속
  지느러미의 물결 사이에 끼어
  유유히 흘러 다니던 무수한 갈래의 길이었다
  그물이 물결 속에서 멸치들을 떼어냈던 것이다
  햇빛의 꼿꼿한 직선들 틈에 끼이자마자
  부드러운 물결은 딱딱거리다 길을 잃었을 것이다
  바람과 햇볕이 달라붙어 물기를 빨아들이는 동안
  바다의 무늬는 뼈다귀처럼 남아
  멸치의 등과 지느러미 위에서 딱딱하게 굳어갔던 것이다
  모래더미처럼 길거리에 쌓이고
  건어물집의 푸석한 공기에 풀리다가
  기름에 튀겨지고 접시에 담겨졌던 것이다
  지금 젓가락 끝에 깍두기처럼 딱딱하게 잡히는 이 멸치에는
  두껍고 뻣뻣한 공기를 뚫고 흘러가는
  바다가 있다 그 바다에는 아직도
  지느러미가 있고 지느러미를 흔드는 물결이 있다
  이 작은 물결이
  지금도 멸치의 몸통을 뒤틀고 있는 이 작은 무늬가
  파도를 만들고 해일을 부르고
  고깃배를 부수고 그물을 찍었던 것이다           

- 멸치, 김기택 -                    


    * 멋진 하루, 안신애 지음, 고래뱃속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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