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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Oct 19. 2020

<생활에 예의를 지키기로 한 날> 골목에서 소리가 난다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골목에서 소리가 난다, 정지혜 그림, 김장성 글, 사계절 펴냄


화장실 출입문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있었다. 집과 한 몸이었지만 마당이 없었기에 화장실은 노출된 상태였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부터 길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했다. 나올 때는 더 심했다. 멀리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신경을 썼고, 작은 불투명 유리창에 사람의 윤곽이 아른거리는지 살폈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화장실에서 나가지 못할 때마다 내 몸에 달라붙은 악취가 얼마나 오래갈지 계산했다. 불편을 해소해야 하는 공간이 또 다른 불안을 몰고 왔다.


한 번은 화장실에서 나오다가 같은 반 남자아이를 만났다. 그 뒤로 짓궂은 애들은 내가 화장실에 들어가는 것을 몰래 지켜본 후에 문을 흔들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화장실 문을 꼭 붙잡고 그 시간을 견디는 것뿐이었다. 부끄러움과 당혹감에 몸이 떨려도 문을 잡은 손에 힘을 풀어서는 안 됐다. 걸쇠를 잠갔지만 허술한 문은 금방이라도 열릴 듯했다. 흔들리는 문 틈 사이로 그 아이들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노출이 될 때마다 낡은 문보다 내가 먼저 닳았다.


여덟 살 혹은 아홉 살로 기억한다. 그때부터 그 집에서 살았다. 중학교 2학년, 집을 수리하기 전까지 화장실을 오갈 때마다 수치심과 곤혹을 견뎠다. 아주 오래된 집이었고, 지금은 그 자리에 고층아파트가 들어섰다.


 『골목에서 소리가 난다』 첫 장면
카카오 맵으로 본 2008년 서울 2호선 아현역
카카오 맵으로 본 2020년 서울 2호선 아현역


헌책방에서 『골목에서 소리가 난다』를 발견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그 뒤는 넘기지도 않고 계산했다. 익숙한 정경이 그림책 안에 있었다. 내가 태어난 곳의 옆동네이고, 유년시절부터 살았던 곳이었다. 지금도  부모님과 막냇동생은 그 근처에 살고 있다. 오랫동안 생활했던 공간을 그림책에서 만났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에 놀랍고 신기했다.


 오래오래 그 장면을 바라봤다. 처음으로 사귄 애인과 자주 가던 '테라스'가 반가웠다. 그림 한 구석에 살짝 내비친 안과는 안경을 맞출 때마다, 렌즈 때문에 눈병이 날 때마다 갔던 곳이었다. 치과도, 이비인후과도, 약국도, 옷가게도 자주 드나들었다. 그 안쪽에 떡볶이 가게들이 있었는데 그중 몇 군데를 번갈아가며 참 많이도 갔다. 책의 한쪽 모습은 변했지만 '테라스'와 그 주변이 여전히 남아있기에 이 풍경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현재이다.


그림 속 장소에서 십 분 정도 걸으면 우리 집이 있었다. 지금은 재개발로 고층아파트가 들어선 그곳은 우리 가족이 가장 오래 살았던 집이었다.1층에는 부모님이 운영하던 구멍가게와 양장점이 있었고, 2층은 우리 가족의 살림집이었다. 옥탑방은 나와 둘째 동생이 같이 썼다. 아주 작고 낡은 집이었다.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오래된 집들이 최신식으로 지어질 때도 우리 집은 그 모습 그대로였다. 그곳에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성인이 되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만나는 동네가 익숙했다. 그곳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내가 살던 동네와 다르지 않았다. 이 안에서 만난 이들도 어디에선가 마주친 사람들처럼 친숙했다. 같이 놀던 친구들 같았고, 옆집에 살던 이웃 같기도 했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제목처럼 골목길에서 소리가 들렸다. 지치지 않고 뛰어노는 아이들의 발자국 소리와 웃음소리, 슬레이트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늦은 밤 길고양이가 야옹 대는 소리, 어느 집 노인의 기침 소리 등이 아련하게 들려왔다. 정답기도 하고, 고단하기도 한 소리를 들으면서 또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어린 시절의 골목길을 재생하려 했다. 그렇게 조각난 기억들을 꿰매면서 그때는 그랬구나,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과거를 미화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금이 간 벽과 녹슨 대문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이면 천장에서 물이 떨어졌고, 바람이 조금이라도 세게 불면 창문이 떨어질 것처럼 흔들렸다. 여름이면 집을 달군 햇빛 때문에 밤에 잠을 이루지 못했고, 겨울이면 벽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어깨가 아플 정도로 떨었다. 화장실에 들어가고 나올 때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다. 가장 밑바닥의 생리적인 현상까지 들켰을 때에는 모멸감과 수치심을 견디기 힘들었다. 가난은 단순히 불편함이 아니었다. 나의 존재를 부끄러워하면서 분노해야 했던 그 시간들은 아픔이었고, 공포였고, 상처였고, 좌절이었다.   


영화의 배경이었던 동네 주민들과 벽화가 그려진 마을 주민들을 인터뷰한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가난을 구경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했다. 자신이 사는 집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그 앞에서 웃으면서 떠들고, 쓰레기를 버리고, 삶을 동정하고 신기해하고 추억하고 회상하는 목소리를 참기 힘들다며 하소연했다.  


부끄럽게도 그 무례를 나 역시 저질렀다. 오래된 동네를 지나면서 지난 일을 회상했고, 지금의 삶에 안심했다. 낡은 동네를 보면서 내 과거를 미화하거나 감성적으로 접근했다. 알지도 못하는 누군가를 동정하기도 했고, 안타까워도 했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옛 시절의 흔적을 신기하게 바라보기도 했다.


그림책을 보며 감상에 젖다가, 나의 무례를 반성하다가, 추억에도 예의가 있음을 깨닫는다. 지금도 그곳은 누군가에게는 오늘이고, 삶이다. 내 생활에 예의를 바라듯 타인의 생활에도 예의를 갖추도록 하겠다.


이방인에게는 달동네도 낭만이고,
여행자에겐 빈민촌도 경험이고,
제3자에겐 누군가의 비극도 가십거리가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때때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애정 없는 호기심을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는 허락할 것인가?
우리에겐 타인의 사생활을 알 권리가 없다.
내 인생이 누군가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 싫다면
타인의 삶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타인의 삶은 지켜주지 않은 채,
나의 삶만 배타적 보호 구역으로 지정할 수 없는 것이고,
나에 대해서는 잊힐 권리를 주장하며,
타인에 대해서는 알 권리를 주장할 순 없다.

타인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접어두는 것,
그건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전제이자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김수현 지음, 마음의 숲 펴냄 -  


* 골목에서 소리가 난다, 정지혜 그림, 김장성 글, 사계절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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