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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의 떨림 Dec 13. 2020

<현실 직시와 책임의 균형이 필요한 날> 프레드릭

- 이런 날 그림책


<이런 날 그림책>의 '날'은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어떠한 날(day)이나 경우를 의미하기도 하고 '나(나를, me)'라는 주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림책에 마음을 기대 울고 웃었던 기억을 당신과 나누고 싶습니다.



솔직히 이 이야기가 싫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프레드릭과 그런 프레드릭에게 감탄하는 들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은 사이비 교주와 그에게 열광하는 신도들을 보는 느낌이다. 오래전에 읽었을 때는 뭐야, 했는데 다시 읽은 지금은 위험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읽으면 읽을수록 예술적 감성으로 포장한 프레드릭의 무관심과 무책임이 돋보인다. 다름에 대한 이해와 인정으로 무장한 들쥐들의 무비판적 수용도 강하게 드러난다. 프레드릭은 사회적 책임을 버린 채 '온전한 나'로만 있으려 했고, 들쥐들은 비판과 판단을 잃은 채 프레드릭을 믿고 받아들였다. 귀여운 모습과 선량한 목소리를 입혀 이들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미화했기에 더 반감이 든다.



오래된 돌담에는 수다쟁이 들쥐 가족의 보금자리가 있다. 농부가 이사를 가자 헛간은 버려지고 곳간은 텅 비었다. 들쥐들은 겨울을 준비하기 위해 옥수수 열매와 밀과 짚을 모은다. 밤낮없이 열심히 일하는 그들과 달리 프레드릭은 햇살 아래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아 있다.


"프레드릭, 넌 왜 일을 안 하니? 들쥐들이 물었습니다.
"나도 일하고 있어. 난 춥고 어두운 겨울날들을 위해 햇살을 모으는 중이야."
프레드릭이 대답했습니다.


수다쟁이 들쥐들이 수다를 포기하고 일을 하는데 프레드릭은 햇살을 모은다느니, 색깔을 모은다느니, 이야기를 모은다느니 하면서 눈을 (반쯤) 감고 가만히 앉아만 있다. 삭막한 세상에 이야기도 필요하고, 햇살도 필요하고, 색깔도 필요하지만 주위를 돌보지 않고 자기에게만 몰두하는 프레드릭은 현실감각이 없는 것을 넘어 이기적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이건 프레드릭의 일이기도 하다. 혈연으로 맺어졌는지, 친분으로 맺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은 가족이라는 공동체로 묶여 함께 겨울을 보내야 한다. 개인의 욕심이 아닌 공동의 생존을 위한 일인데 프레드릭은 관심이 없다. 미리 양해를 구하고 서로 협의했다면 그나마 이해를 할 텐데 프레드릭은 그것조차 하지 않았다.


우리의 삶이 현재의 사명이 아니라, 상황적 감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일단 벗어나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삶의 행복과 충만함은 삶의 깊이를 외면하고 높은 곳만 쳐다보고 있으면 생겨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요구에 대한 대상적 시선, 자신의 상황적인 이해관계 너머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인간적 관심은 우리를 만족스러운 삶으로 이끌어줄 뿐만 아니라 삶의 다채로움도 함께 제공한다.

- 무관심의 시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김현정 옮김, 나무생각 펴냄 -


프레드릭이 진정 멋지고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려면 들쥐들과 함께 노동에 참여해야 했다. 그 과정을 통해 이야기와 햇살과 낭만과 예술을 모아야 했다. 몸으로 하는 일이 서툴다면 자신의 강점을 발휘해 들쥐들을 응원하고 격려해야 했다. 그런데 프레드릭은 음식을 나르는 들쥐들에게서 떨어져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겨울 준비를 하는 거라지만 자신의 몫을 하지 않은 채 그러는 건 설득력이 없다. 재잘대던 들쥐들이 말을 잃었을 때도 프레드릭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들쥐들이 묻자 그제야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꺼냈다. 프레드릭에게 주변에 대한 관심과 배려가 있는지 모르겠다.  


짚도 다 떨어져 버렸고,
옥수수 역시 아스라한 추억이 되어 버렸습니다.
돌담 사이로는 찬바람이 스며들었습니다.
들쥐들은 누구 하나 재잘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들쥐들은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모은다고 했던
프레드릭의 말이 생각났습니다.

"네 양식들은 어떻게 되었니, 프레드릭?"
들쥐들이 물었습니다.
프레드릭이 커다란 돌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눈을 감아 봐. 내가 너희들에게 햇살을 보내 줄게.
찬란한 금빛 햇살이 느껴지지 않니……." 했습니다.
프레드릭이 햇살 이야기를 하자,
네 마리 작은 들쥐들은
몸이 점점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프레드릭의 목소리 때문이었을까요?
마법 때문이었을까요?


이 장면에서 '내 눈을 바라봐 넌 행복해지고 내 눈을 바라봐 넌 건강해지고~'라는 거짓과 허상으로 가득 찬 노래 가사가 생각난다. 당장 먹을 게 없고 찬바람이 들이닥치는 공간에서 햇살과 색깔과 이야기를 전해주겠다는 프레드릭은 전형적인 사기꾼처럼 보인다. 그런 프레드릭에게 박수를 치는 들쥐들에게 동정심마저 사라진다. 이해심이 맹목적인 믿음으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임상심리학자 매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5단계로 나누었다.

1단계 : 생리적 욕구

2단계 : 안전과 안정의 욕구

3단계 :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4단계 : 존중의 욕구

5단계 :  자아실현의 욕구


매슬로우는 하위 개념을 성취하지 못하면 다음 단계로 갈 수 없다고 했다. 식욕, 수면욕, 배설욕 등 1단계 생리적 욕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람과 소통하고 애정 등을 쌓는 3단계의 욕구를 갖는 건 무리다. 물론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사랑과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위대하고 숭고하다면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세상에 대한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고,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놓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꿈과 이상을 얘기한다면 그는 욕심 많은 허풍쟁이다.


프레드릭은 추위와 배고픔에 지친 들쥐들에게 위로와 즐거움을 주긴 했다. 하지만 이건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다. 잠시 동안은 고통을 잊을 수 있지만 다시 춥고 배고플 것이다. 들쥐들은 허기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일 텐데 프레드릭은 그때에도 무관심과 무책임을 예술과 낭만으로 포장할 가능성이 높다. 그래 놓고 들쥐들이 모아 온 음식을 먹을 것이다. 들쥐들은 기꺼이 프레드릭에게 자신의 수고를 제공하면서 그를 시인이라 칭송할 것이다.


무관심의 극복은 사회적, 도덕적, 계명일뿐만 아니라 실존적 해답이기도 하다. 우리가 우리의 존재를 발견하는 여행을 시작할 때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했다면 그 대답도 이미 주어졌다. 즉, 우리가 세상을 좀 더 넓게 볼 때, 그리고 다른 사람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그럴 수 있는 것(자유), 그래야만 하는 것(의미와 책임)과 우리를 결합시킬 때 그 답을 찾게 된다. 우리는 사라졌다고, 혹은 망각되었다고 믿었던 꿈과 희망, 이상주의를 다시 우리의 삶 속으로 받아들이고 주요한 행동 요인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야만(여전히 많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항상 의심을 품기는 하지만) 삶이 얼마나 풍요롭고 아름다운지 알게 된다.

 - 무관심의 시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김현정 옮김, 나무생각 펴냄 -


진정한 시인은, 예술가는, 영웅은 남들 일할 때 햇살 아래 고상하게 앉아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신과 타인의 삶에 관심을 갖고, 함께 책임지면서 꿈을 전하는 사람이다. 또한 진정 타인을 수용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비판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무조건 상대를 받아들인다면 누군가는 계속 희생할 수밖에 없다.  


* 프레드릭, 레오 리오니 지음, 최순희 옮김, 시공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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