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날 그림책
오랫동안 계단 밑에 서 있었다.
그냥 멀뚱히 서서
끝이 어딘지 가늠해 보기도 했고,
몇 계단 세어보고 한숨을 짓는가 하면
돌아섰다가 다시 왔다가 반복만 했다.
그러면서 끝이 안 보인다고,
내가 가야 할 길이 너무 아득하다고,
정말 저곳에는 내가 원하는 게
있긴 있는 거냐고 의심만 했다.
하지만 이젠 다시 그 계단을 밟으려 한다.
숨 가쁘게 그곳을 오르다가
잠시 걸터앉아 숨을 고르면
내가 밟은 시간들이 보이겠지.
그러면 아, 하고 뭔가 느낌이 오겠지.
내가 걸어온 그 길에는
향기로운 꽃들이 가득했다고.
- 2005년 7월 일기 중에서 -
몇 년 전에 집을 정리하다가 일기장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잊고 있어서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뻤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마다 글을 적었는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심각했는지 시간을 적어가면서 하루에 몇 번이나 일기를 썼다.
열 권이 넘는 일기장을 몇 장 넘기다가 그대로 덮어버렸다. 2005년의 나와 2015년의 내가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놀랐다. 힘들다고 칭얼대다가 곧 희망을 품다가 대단한 결심인 듯 의지를 다지다가 다시 좌절하는 패턴이 어찌나 한결같은지 징그러울 정도였다.
돌아보면 현실을 외면하고 이상을 꿈꿨다. 단계를 밟지 않고 결과만 취하고 싶었다. 완벽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서툰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였나 보다. 처음『고래가 보고 싶거든』을 읽었을 때 냉장고에 코끼리를 넣는 방법이 생각났다. 뭔가 대단하고 거창한 방법이 있을 거라 여겼는데 냉장고 문을 열고 코끼리를 넣고 냉장고 문을 닫으면 되는 거였다. 답이 너무 단순하고 당연해서 황당했는데 나는 그 단순하고 당연한 것을 잊은 채 다른 방법을 찾고 있었다.
고래를 보고 싶으면 창문과 바다가 있어야 하고 그 앞에서 고래를 기다릴 시간이 필요하다. 고래가 아니라 새였다는 것을 깨달을 시간도 필수다. 달콤한 향기를 뿜는 예쁜 장미도 모르는 척해야 한다. 작은 배에 한 눈을 팔아서도 안 된다. 펠리컨에 마음을 빼앗겨서도 안 되고, 초록색 벌레에게 눈을 돌려도 곤란하다. 고래가 나타날 때까지 한 눈 팔지 않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된다.
『고래가 보고 싶거든』을 읽은 후부터 자꾸만 이 책이 뒤통수를 당긴다. 계단 아래에 서서 끝이 어딘지 가늠이나 하면서 그게 보이지 않는다고 의심만 하다가 돌아선 지난날이 떠오른다. 끝이 궁금하다면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면 된다. 곳곳에 유혹이 있더라도 꾹 참고 걸으면 된다.
쉽고 편한 길을 찾기 위해 당연한 길을 외면했던 나를 『고래가 보고 싶거든』이 잡아준다. 처음에는 조곤조곤 깨우더니 오늘 아침에는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린다
- 2017년 12월 블로그에 올린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