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의 디자인
꼬마 브랜드 매니저 시절, 디자인 시안을 가지고 오는 디자이너들(그것도 선배가)에게 이 시안이 왜 싫은지 아니면 왜 맘에 드는지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한동안 너무 힘들었다.
피드백의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고 디자인은 'Feel이고 느낌인데' 조리 있게 내 생각을 얘기하기가 어려웠다. 이후 생긴 묘책은 마법의 단어 <소비자 관점>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매 순간 통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내 말이 스스로 창피하지는 않았다. 이런 유치한 대응하고 있는 가운데 선배들은 가끔 디자이너분들과 싸우기도 한 것 같다. 언쟁에서는 디자이너분들이 열세였다. 어떤 분들은 싸울 의지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 보였다. 디자이너들은 컨셉을 선과 빛과 어둠, 색깔로 표현한 언어 프레임으로 설명했고 우리는 늘 소비자, 매장, 경쟁사 같은 맥락 속에서 컨셉을 구현했던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이 두 가지를 모두 이해하고 구사하는 분들을 만나게 되었다. 마케터? 아니다 디자이너들이었다. 이 능력있는 디자이너들과 같이 일을 해보면 어떤 경우에는 브랜드 매니저보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더 잘 이해하고 구현하는 분들도 있었고 이들의 발표내용이나 언변은 매우 설득적이었다. 그들의 설득력은 디자인 결과물의 가치를 끌어올렸다.
오늘 소개할 책의 저자는 이 방면에서는 경쟁자가 없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분이다. 일본의 하라켄야.
그는 그동안 5-6권의 책을 썼지만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유명해진 디자인의 디자인(Designing Design) 책을 얘기해보려 한다. 이 책을 요약해서 소개해보면 테마별로 그가 참여했거나 작업했던 프로젝트별로 나눠서 본인의 디자인 철학과 주요 키워드를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 친숙한 무지(MUJI)와 마쓰이 긴자(Mtsuya GINZA) 백화점 프로젝트도 소개되고 있다. 대체로 그의 글은 매우 설득적이다. 그 이유는 주제의 근본부터 깊숙이 고민하는 깊이가 느껴지며 주제에 대해 현재, 미래, 그리고 과거까지 거슬러 올라가 여러 사례와 근거들을 보여주는 부지런한 노력과 해박한 지식에서 나온다. 무엇보다도 놀라운 점은, 글이 간결하지만 또한 강약과 낯섦과 상식적인 해석을 오고 간다.
하라 켄야 본인의 작품에 대한 스스로의 해석이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제3의 평론가가 극찬한 것 같이 받아들이게 된다.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정의하거나 상세히 적을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전혀 모르는 것으로 가정하고 그 실체에 도전해 보는 것이 대상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인식하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을 읽고 디자인에 대해 더욱 모르게 되었다고 해도 디자인에 대한 인식이나 이해가 이전보다 후퇴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디자인의 깊은 세계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는 증거이다.
<디자인의 디자인> 하라켄야, 18P
이런 글 스타일은 MUJI에 대한 브랜드 해석에서도 나온다.
초기 무지 슬로건은 "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다"는 반어법적 개념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이념을 시각화하는데 하라 켄야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아 다음과 같이 보여준다. Emptiness라는 단어로 활용하였고 비어있는 빈 그릇의 개념을 전달하고 보여주고 싶어서 지평선을 소재로 한 지면 광고를 만들었다. 앞에 브랜드 MUJI가 지향하는 비전과 슬로건과 이를 언어화한 Emptiness라는 매개가 있었고 그 개념을 지평선을 소재로 한 광고로 만들고 "아무것도 없지만 모든 것이 있다'를 이해하게 했다.
이렇게 어려운 철학 개념을 디자인화하고 언어로 쉽게 설명하는 그는 인간의 오감을 잘 활용해서 본인을 의견을 설득적으로 만들기도 하다. 평상시 촉감을 중시해 온 그는 디지털 미디어 대비 책이 주는 의미를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이런 배경으로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종이책이 공존하는 이유에 모든 동의하게 된다.
무지 지면 광고
디지털과 달리 종이는 매질 그 자체에 본질이 내재되었다. 우리는 종이의 백색성과 더불어 실체적인 물질성과 끊임없이 대화함으로써 안정적 표현 영역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러한 예로서 책은 종이와의 소통으로 문화에 깊이 자리한 도구이다
<디자인의 디자인> 하라켄야, 155
하라 켄야는 독자를 설득하기 위해 겨울밤 눈 밭을 밟으며 지나갔던 추억을 생각하면 하얀 눈, 뽀드득 소리, 발 끝으로 전해지는 푸석함 등이 선명하게 한꺼번에 머릿속에서 밀려온다는 적절한 예를 들고 있다. 이 기억을 활용하여 나고야 동계올림픽 디자인, 시각디자인물에 화이트와 엠보를 적용했다.
오늘 조명한 하라 켄야는 우리 평범한 사람들 대비 특별한 재능을 가진 분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자신의 신조와 철학이 들어간 무엇가 만들었다면 디자인이니 브랜드든 최선을 다해 상대를 설득하고 이해시키려고 하는 것이 크리가 에이터 든 마케터든 가져야 할 의무다.
예술과 과학, 이성과 감성 중간 어디쯤 있는 마케팅 업무를 하고 있는 한 언제가 우리에게도 브랜드나 제품에 대해 언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영역을 설득해야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런 재능이 필요한 순간이 올 것이다. 그때를 준비하자.
#하라 켄야 # 디자인의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