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 페미니즘의 투쟁
룰루, 오늘은 즐거운 일요일.
9월 막 주부터 해야 하는데… 미루고 있던 에어컨 필터 청소와 선풍기 씻어서 넣음과 동시에 가습기를 꺼내야겠다고 야심 차게 마음을 먹고 앞치마를 입었다. 본격적으로 혼자 집에서 일을 시작한 나에게 할 일을 중심으로 복장을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식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옷에서 추리닝으로 (분명 다르다!! 왜냐면 저는 잠옷만큼은 세트로 갖춰서 이쁜 것을 입습니다. 추리닝은 목이 늘어져 있어야 하고 고무줄 바지는 배꼽 위로 올라와야 함. 당연히 브라자는 안 한다. 그것이 프리랜서 재택근무자의 가장 판타스틱한 직원 복지인 것이다.) 갈아입어야 일하는 모드의 나 자신이 된다. 잠옷으로 다시 갈아입으면 자유 모드의 나다. 넷플릭스를 보거나 읽고 쓰는 시간의 나는 대부분 일할 때 보다 더 잘 갖춰 입은(ㅋㅋㅋ) 잠옷 차림이다. 추리닝이 작업복이라면 운동할 때는 레깅스. 좋은 거 새로 사고 싶은 데, 다이어트 성공한 동생이 커졌다며 잔뜩 안겨줘서 레깅스가 좀… 많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앞치마 모드 자아를 하나 더 만들었는 데,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 회사 다닐 때야 구내식당이 알아서 메뉴를 챙겨주었지만, 이제는 내 밥 내가 해 먹고 설거지도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바쁠 때는 그냥 나가서 휙 사 먹고 옴) 그런데 내가 평범한 인류인 이상 밥을 먹고 나면 설거지가 하기 싫고, 설거지를 하지 않으면 쌓이고, 그 쌓인 것은 너무도 당연히 나 아닌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는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크지 않은 집이 휴식과 여가의 공간으로만 기능할 때는 상관이 없었는 데, 일하는 공간으로 겸업하니까 의식적으로 청결 상태를 유지하지 않으면 금세 난장판이 돼버리는 것.
지금 바쁘니까 이따 치워야지 → 바쁘게 일함 → 일이 끝남 → 집이 엉망 → 피곤하고 치우기 싫음 → 대충 씻고 일단 잠 → 일어나서 작업복으로 환복 → 집이 엉망인 상태에서 일 → 피곤하고 치우기 싫은 데, 어제보다 더 치우기 싫어짐 → 반복하다가 마감 → 와! 드뎌!! 일 끝!!! 이제 집에 가야지??? 응? 집이… 집이… 아, 여기 집인데 왜 집에 가고 싶죠?
이 짓을 세 번 하고 나니까 이 모든 시작점이 바로 먹고 난 뒤 설거지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튼 설거지가 쌓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바로 일도 휴식도 그 모든 정리가 되지 않는… 뭔가 계속 찜찜하고 어느 것 하나 집중할 수가 없는… 퇴근했는 데 집에 왔는데 집이 아닌… 아 몰랑. 난 암튼 그랬다. 그래서 설거지를 밀리지 말자!하면서 밥하고, 밥 먹고 설거지할 때는 앞치마를 입자! 하고 짱박아둔 앞치마를 사용하기 시작했는 데… 워, 이게 생각보다 너무 괜찮네? 앞치마 안입을 때는 밥먹고 설거지하기 싫어서 계속 딴짓하다가 노동자 모드로 전환하는 로딩이 좀 걸렸는데, 앞치마를 기준으로 하니까 바로바로 노동 모드 동기화가 빨라지더라(느낌인가??ㅋㅋㅋ).
여튼 여기서의 교훈 : ‘재생산 노동’ 모드의 나 자신은 꼭 필요했다!!!는 것.
앞치마, 내가 그를 입지 않았을 때 그것들은 하기 싫은 설거지에 불과했다. 그러나 내가 적극적으로 앞치마를 입고 의식을 갖추자 그 일은 나에게로 와 ‘사회라는 공장’을 굴리며 ‘노동자’인 나를 더욱 온전하게 하는 ‘재생산 노동’이 되었따….
“(23) 이 ‘고용되지 않은’ 여성들은 문 닫힌 집 안에서 노동하고 있다. 그들은 자본의 필요에 따라 다시 밖으로 불려 나가기 전까지는 계속 집 안에 머물며 일을 한다 (...) 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달리, 여성이 생산하는 상품은 인간, 다시 말해 노동자이다. (...) 그 자체로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결부되어 있다. 이 사회적 상황은 공장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규격화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사회적 공장’이라 부른다. ”
앞치마 질끈 동여매고, 햇살이 좋아 창문 활짝 열어놓고, K-POP 틀고 일요일 맞이 청소 시작.
분명 여름용 가전기기 집어넣는 것만 하고 <페미니즘의 투쟁>을 읽으려는 것이 나의 계획이었건만, 하다 보니 또 완벽주의 돋아서 온 집안의 먼지를 닦아내고 공기청정기 필터 청소와 세탁기 청소도 모자라 화장실 줄눈까지 닦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왜일까. 왜 청소는 하기 싫을 때는 더러운 게 암시랑토 않다가 하기 시작하면 미친 듯이 하게 되는 걸까.
혼신의 힘을 다해 청소를 마치고 나니 점심 먹을 때도 한참 지난 한시 사십 분. 집에선 에어컨 세정제 냄새와 화장실 락스 냄새가 진동하고…. 입맛이 뚝 떨어져서 도저히 집에서 밥 먹기가 싫어서 밥 차림 노동의 외주화! 동네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잡숫기로 했다. 떡볶이 먹으면서 드는 생각이 오늘 너무 화학약품 많이 쓴 것 같아 지구에 대한 미안함이 돋아나 세제 떨어져 가는 데 바꿔볼까? 무계면 활성제를 사용한 제로 웨이스트 친환경 타블릿형 세탁세제를 구입했고… 내친김에 패키지와 물 없는 알약 타입의 친환경 치약도 구매했다(비쌌다).
“(47) 소비는 여성이 가사노동을 할 때 갖는 강박적인 완벽주의에 정확히 상응한다.”
홀린 듯 결제를 하고 나니 작년 가을에 환경을 위해 비누 하나로 모든 것을 해보겠다고 (샤워, 머리 감기, 세수) 자발떨다가 얼굴이 다 텄던 악몽이 생각났(세수는 꼭 폼클렌징으로 합시다)고, 아니야 괜찮아, 대나무 칫솔은 그럭저럭 성공했잖아(하지만 역시 칫솔모가 흐물거려…)하면서 돈을 더 들여 친환경 제품을 사는 것이 친환경적인 것인가 하는 생각을 잠시 하다가, 더 쾌적하고 말끔한 공간에서 살고 싶다(즉, 청결한 청소상태 유지)는 욕망과 친환경은 서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청소에 집착할수록 쓰레기를 많이 배출하며 화학 약품으로 지구를 해친다면 청소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어떨까… 아, 그것은 절레절레… 집으로 돌아와 반짝반짝 빛나는 식탁 위에 앉아 본격적으로 <페미니즘의 투쟁>을 읽기 시작했다(가 십 분 만에 피곤해서 낮잠을 자고 일어나서 읽었다).
“(26)이 논평(여성과 공동체 전복)은 ‘여성 문제’를 규정하고 분석하며,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이 만들어 낸 전체 ‘여성 역할’ 속에 위치시키는 시도이다. 이 글에서 우리는 가장 먼저 *주부를 여성 역할의 중심인물*로 두려고 한다. 또, 모든 여성, 심지어 집 밖에서 일하는 여성까지도 주부라고 상정한다. 어디에 살든 어느 계급에 해당하든, 세계 어디서나 여성의 위치는 가사노동이 가진 독특한 성격에 따라 결정된다. … 따라서 여성이라는 카스트caste에 관한 분석은 모두 노동 계급 주부의 지위를 분석하는 데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70년대 가사노동 임금투쟁을 이끈 빡센 이탈리아 페미니스트 운동가인 마리아로사 달라 코스따는 이 글 <여성과 공동체 전복>을 통해 자본주의적 노동분업에서 기존의 맑스주의적 관점이 짚지 못한 ‘주부(저자에 의하면 여성 역할의 중심인물)’와 ‘가사노동’을 분석한다. 놀랍지 않은가. ‘주부’를 중심에 두고 자본주의를 분석한다니. (사실, 더 놀라운 것은 좌우파 막론하고 200년 넘게 ‘주부’를 경제 분석 단위 자체에 포함시키지 않았다는 것이지만…)
내 생각에 핵심 문단은 요 부분인 것 같다. 임금노동이 은폐하는 지점에 대한 비판.
“(32) 자본이 *남성*을 모집해서 *임금 노동자*로 바꾼 결과, 임금을 받지 않는 다른 모든 프롤레타리아(여성, 노인, 아동…)들과 남성 사이에는 균열이 생겼다. … 바로 이 임금을 통해서 임금 없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조직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이 착취는 임금이 없다는 점이 착취를 감추기 때문에 훨씬 더 효과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안의 독재를 가능하게 했으며, 가정의 범위에 들지 않는 이들을 사회적으로 배제하였고, 고립된 가사노동으로 여성들의 사회적 역할과 창조적 능력을 축소시켰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마리아로사 등이 주축이 되어 벌인 “가사노동에 임금을 지급하라”는 투쟁은 당시엔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들이 제기한 관점은 자본주의는 물론 전통 맑스주의 조차 은폐해온 여성의 가사노동, 즉 ‘재생산 노동(출산, 돌봄, 가사노동 등등)’에 대해 중요한 질문들을 던졌다. 이는 추후에 ‘노동의 성별 분업화와 노동의 위계화(차별화)가 바로 자본주의의 원리’라는 중요한 정치경제학적 통찰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캘리번과 마녀 링크 :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0828728 )
그뿐인가. 글에서 제시한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은 임금만이 생산체제가 되면서 생산체제가 배제하고 분리시켜온 전 사회적 노동의 착취를 환기하며 임금노동 여부와 관계없이 ‘사회적 임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이론 —어디서 보셨죠? 바로바로 *기본소득* 되시겠습니다—으로 나아가게 되고야 마는 데…. (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 링크 : https://blog.aladin.co.kr/jyang0202/10735810)
여기까지는 지난한 페미니즘 책 읽기를 통해 알고 있었던 부분이라서 오-! 하면서 읽었는 데, 내가 글의 후반부에 가서 흥분하며 소름 쫙 돋았던 이유는 글 자체가 가진 무지막지한 급진성 때문이다. 장난없다. 제목 <여성과 공동체 전복> 답게, 전복을 전복해버리신 마리아로사느님이랄까. (전복에 약한 편)
“(46) 노조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노동자를 보호하지만, 남녀 모두 노동자 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도 될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 계급 여성이 *가족에 저항*하여 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롸?!!!!! 주부여, 페미니스트들이여, 본격 가족파괴를 시작하자!!! 마리아로사는 가사노동 투쟁의 구체적 과정을 자본주의적 사회질서가 수립한 핵가족의 파괴를 거쳐야 한다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더 높은 계급투쟁의 차원이라 설파 하는데… (가족 파괴!!!! 마리아로사느님! 저 잘하는 중입니까? 나여, 힘죠!!!!!! 나 혼자 산다!! 아자!!!)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 술 더떠 주부를 거부하는 여성에게 예의 ‘임금 노동자’가 되라고 하는 것이야 말로 자본주의가 원하는 일이라며 돈 주는 일도 하지 말라고 하신다!! “(55)왜냐면 우리는 충분히 일했기 때문이다.”
여차저차 제3세계까지 포괄하시며 자본주의를 어떻게 뿌술건지 제안하시는 데…
여하튼 거칠게 정리하면 우리가 가야 할 길은 반성장, 탈노동 혹은 반노동의 투쟁인 것이다!
만세! 진정한 노동 해방이여!
“(57)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투쟁을 시작한다. -1971년 12월 29일”
뭐지. 이거. 너무. 너무. 팬데믹, 4차 산업 혁명과 기후위기와 페미니즘적 요구가 넘실대는 2021 지금의… 현대적 문제의식에 맞아떨어지는 해결책을 미리 품고 있는 50년 앞서간 글 아닌가. 아놔… 보봐르에 이어 이 언니마저 이러면, 나 페미니스트인 거 너무 행복하잖아요…(아찔)…. 그대 지금까지 고작 프롤레타리아 혁명만이 급진이라 생각했나? 훗, 진짜 혁명은 ‘노동’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거둬야 하는 거야. 그리고 현대사회의 노동윤리를 가능케 한 가족 ‘따위’를 없애버리는 거지. (성급한 일반화 ㅋㅋㅋㅋㅋ)
나만 알기 싫다… 이 책… 좋다 좋다 하더니 정말 좋은 책이다… 진짜 개 치인다. 띵문 대잔치여.
근데 저 지금 제대로 읽고 있는 거 맞죠?….ㅋㅋㅋㅋㅋㅋ 제가 읽고 싶은 대로 읽고 있는 걸까요? ㅋㅋㅋㅋㅋ
자본주의에서 생산되는 다른 모든 상품과 달리, 여성이 생산하는 상품은 인간, 다시 말해 노동자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상황은 따로 떨어진 별개의 요소, 즉 공장의 부속물이 결코 아니며, 그 자체로 자본주의 생산 양식에 결부되어 있다. 이 사회적 상황은 공장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규격화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를 ‘사회적 공장’이라 부른다. - P23
가사노동이 본질적으로 ‘여성의 노동’인 건 아니다. 여성이라고 빨래나 청소를 하면서 남성보다 자아를 더 많이 실현하거나 남성보다 덜 힘들진 않다. 빨래나 청소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므로 사회서비스이다. 자본은 정확히 자본주의 가족 구조를 제도화함으로써 남성을 이런 사회 서비스 역할에서 ‘해방’시켰다. 따라서 남성은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직접적으로 착취당하게 된다. 남성들은 자신을 노동력으로 재생산해 내는 여성을 부양할 충분한 돈을 자유롭게 ‘벌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본은 가정 내 여성에게 이런 서비스를 떠넘기는 데 성공했고, 그만큼 남성을 임금 노예로 만들었다. 동시에 여성이 노동시장에 유입되는 것도 통제했다. - P38
노동 계급 가족은 더욱 무너뜨리기 어려운데, 그 이유는 노동 계급 가족이 노동자를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동자로서, 그리고 노동자라는 이유로 노동 계급 가족은 자본을 지탱하고 있기도 하다. 노동 계급 가족은 계급의 유지 및 생존을 좌우하지만, 이때 계급의 유지 및 생존은 계급 자체에 반하여 여성을 희생시킴으로써 가능해진다. 여성은 임금 노예의 노예이며, 여성의 노예상태가 남성의 노예상태를 보장한다. 노조와 마찬가지로 가족은 노동자를 보호하지만, 남녀 모두 노동자 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도 될 수 없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 계급 여성이 가족에 저항하여 싸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 P46
그러나 가사노동을 통한 여성의 착취는 핵가족의 생존과 결부되어 특수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투쟁의 구체적 과정은 자본주의적 사회 질서가 수립한 핵가족의 파괴를 거쳐야만 하고, 그럼으로써 계급투쟁을 한 차원 더 높여야 한다. - P47
2021-1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