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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쟝쟝 Oct 22. 2021

작년 가을보단 올해 가을이

황정은, 일기

이를테면 해가 비치는 창가에 앉아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몸집이 설계된 펜으로 사그락 사그락 글씨를 쓸 때, 혹은 유리잔에 담긴 아이스아메리카노 같은 것을 집어 들어 홀짝일 때 말이다. 그러면 집안의 그늘진 어느 곳에 반사된 빛이 얼굴을 드러내며 돌아다니고 발치에 앉아 제 몸이나 핥던 H는 느닷없이 고개를 휙휙 돌리더니 빛 자국을 잡아보겠다고 뛰어다니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 그거였어? 몇 해 전 언젠가 그의 광폭한 튀어 오름 덕에 벽에 세워둔 책들이 우르르 쏟아질 뻔한 경험을 한 뒤로는 내 움직임이 만들어내는 빛 자국을 조정하며 살살 놀아준다. 그리고 오늘, 뭘 쳐다보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배 위에서 한참을 저러고 두리번대며 햇살 자국인지 그것에 반사되는 먼지 자국인지모를 무언가에 꽂혀 쳐다보느라 내려가지를 않는다. 그를 배 위에 올려두고 남은 책을 다 읽었다.


[사진 설명: 내 뱃살 위에 고양이 한 마리, 창밖의 햇살을 구경하지요. 살짝 벌어진 입술과 촉촉한 건포도 같은 코와 싱싱한 늦여름 포도알갱이같은 영롱한 녹색 눈.] 




가을. 

황정은의 첫 에세이가 가을과 함께 내게 당도했다.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하는 편인데 신작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편은 아니며 실은 한 권 건너 한 권 정도를 읽어왔다. 특별히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가끔은 부담스러워서 읽기를 미루다 보니 그리 되었다. 어떤 소설가라도 그러하겠지만 황정은의 소설은 황정은만 쓸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황정은 문체 흉내)


그것은 작가가 통과해온 어떤 시간일지도 모르고 더 정확히는 그가 통과해온 시간(잊어버려도 상관없었을) 들을 집요하게 헤집는 시선에 있다는 느낌이다. 이해를 일종의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사람들의 ‘방어기제 남용’의 좋은 예랄까. 


나를 포함해 이런 방식의 방어기제를 가진 사람들을 몇 알고 있다. 그들은 나의 좋은 대화 친구이며, 이들과는 하나마나한 소리나, 남들 이야기로 가득한 가십을 거의 하지 않으면서도 끝없이 즐거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다. 우리는 사적인 이야기로 시작하더라도 금세 사회적(혹은 우주와 대자연;;)인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다가 다시 일상의 이야기. 맥락 없는 말들이 이어지는 것 같지만 대체로 사색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야기라 흘리듯 듣고 넘겨버리기는 어렵다. 대화 도중에 언뜻 파괴적 시니컬함을 내비치기도 하지만 내 생각에 그건 아주 일부다. 드러나기도 전에 차겁게 식힌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다). 나는 친구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나 자신이 따뜻한 종류의 사람이라고 느끼지만 나는 그런 종족을 알아볼 수 있고, 호감과 동시에 호기심을 느끼는데 이건 무슨 감정일까. 알면서 뭘 물어, 동족이라는 뜻이란다. 아, 동족. 정확히 계산된 서비스용 미소로 너도, 나도, 그들도, 따뜻한 사람이야. 맞네. 때때로 집요하고 신랄해진다는 것이 따뜻하지 않다는 증거일 수는 없다. 나는 그들에게 혹은 우리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기로 한다. 


이해라는 방어기제 남용 종족. 


이 카테고리에 추가되는 첫 번째 소설가.는 단연코 황정은.  

전체는 단순한 부분의 합이 아니고, 그렇다고 부분이 전체를 이루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덩어리의 상처를 쪼개고 낱낱이 분석하면 덜 아프다. 상처는 나 자신이지만 억지로 떨어뜨려 놓아 보고자 하면 일단은 떨어뜨려진다. 먼저 이것을 이해하자. 아마도 알 수 있는 것이 되면 아프지 않아 질 것이다. 분석에 맞춤한 언어와 단어 문장을 찾아낸다. 때로는 철학의 개념이기도, 심리학적 용어나 사회학적 방법론일 때도 있다. 


그러나 사적인 경험들을 지우지는 않는 상처의 아나토미가 가닿는 것은 결국은 (말하기는 조금 허망한) 구조라는 진실이다. 공염불 같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각조각 이어 붙인 진부한 결론(해결책은 사회의 섬세한 법과 제도)에 다다르고 만다. 


별 수 없잖아. 내 상처는 해결되었는가? 글쎄, 아무것도. 그저 나는 조금 더 많이 깊게 이해하는 사람이 되었어. 이해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이해한다고 밉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덜 화내게 된다. 때때로 나는 화내기 위해서 부러 이해하려 하지 않는 상태에 돌입하기도 한다. 그것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151) 쿠키를 먹는 것처럼 읽을 수 있는 일기를 목적하고 썼다.
내용으로 읽히지 않고 입에서 발음으로 부서져도 괜찮은.
성공했을까.” 


아니오.

단연코 아니오.


그의 글은 발음으로 부서진다 한들 내용이 없지 않고, 아무리 사소한 일기라고 한들 아주 대소해져 버렸다. 그런데 그래서 참 좋았다.


어디선가 작가 황정은처럼 —어느 시기의 고통을 통과해왔으며, 고통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고, 그 자신이 가진 능력과 시간적 여유와 갈고닦은 사유력을 가다듬어 글로 쓰고, 문학으로 예술로 만들어내고, 그 와중에 자신을 잃지 않고, 세상의 그늘진 어딘가를 여전히 바라보고, 담론을 만들고, 언어를 벼리고, 그리하여 어떤 것은 먹지 않으며, 어떤 말은 조심하고, 누군가는 의식적으로 만나지 않으면서— 고통과 폭력을 제대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와 같은(혹은 같았던) —사유를 다듬기엔 생각할 여유조차, 읽고 쓸 시간조차, 어쩌면 고통을 느끼고 감각할 겨를 조차 없는— 사람들의 삶을 버틸 수 있게 하는 언어와 구조들이 만들어져 왔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때때로 강박처럼 느껴지는 그녀의 깊은 사색의 언어에 기대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나의 기벽을 존중하게 되었다. 

저마다 다른 지옥의 온도를 잴 필요는 없다. 모두 차갑고 모두 뜨거운 지옥들을 견디는 시간 동안, 누군가는 또다른 지옥에서 겨우 빠져나온 누군가의 한 문장을 부여잡으며 그 시기를 통과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황정은의 소설은 <계속해보겠습니다>인데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들이 공룡이 멸종하는 이야기를 한다. 한번에 꽝 멸종한 것 처럼 생각되지만 천만년이 걸려서 서서히 멸종했대. 우리도 천천히 망하자는 이야기야? 아니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야. (소설의 주인공은 이런 식의 대사를 읊으며 엄마가 되지 않기로 굳은 결심을 하는 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본격 비혼 비출산 다짐 소설인 것이다. 당시의 나는 인류 멸종을 주문하는 급진적 소설로 읽으며… 왜 제목이 계속해보겠습니다?이지 하고 의아해했다는 후문.) 현생 엉망진창이라도 그렇게 금방 망하지는 않는다는 황정은의 소설을 읽으며, 조금은 다른 선택을 하는 소설 속의 그녀들을 힘껏 응원하며, 나 역시 어떤 시기를 거쳐왔다. 

그러니 자칫 진부한 이야기가 될 위험을 감수할지라도(나의 본격 독서년식은 그다지 길지 않은데 한국 문단이 너무 사회적이라 하루키 류의 사적(?)인 이야기에 한국 독자들이 환호했다는 식의 글을 최근에 읽은 적이 있다. 요즘엔 너도나도 하루키니까 작가님 굳이 그길 안가셔도 될 듯) 그가 계급을, 가난을, 현대사를, 여성을, 사회를 꾸준히 써주셨음 한다. 필요하다. 그리고 적어도 작가님의 소설은 고통에 빠진 어떤 삶들을 쉽게 사유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들이 우려먹어 진부해져 버린 소재들을 생경하게 다시 해석하는 시선. 그것은 지옥을 가까스로 탈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니 작가님 그냥 계속 부지런히 써주시기를. 복직근, 복횡근, 기립근, 둔근, 단련하시어. 


“(162) 괜찮지는 않고 여전히 흔들리지만 진폭이랄지 파형이랄지 그런 것을 어느 정도는 내가 조절할 수 있다.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는 가장 가까운 이들의 나쁜 말과 태도와 행동에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을 누군가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를 향해 당신을 손상시키면서까지 자기가 살고자 하는 이를 거절하고, 멀어지라고, 어떤 형태로든 그를 돌볼 수는 있겠지만 그의 비참을 자기 삶으로 떠안지 말라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그러나 그 대신 가물치를 물에 돌려두었다고 썼다. 해당화를 심고 작약을 두고 보았다고 썼다. 그것이 너무나 개인적인 이야기는 아닐까, 너무 이른 이야기는 아닐까, 누군가를 너무 상처 입히는 이야기는 아닐까 망설이다가.”




아침에는 다정한 이의 전화를 받고 늦게 눈떴다. 그저께 화이자 2차 접종을 완료했고, 약간의 근육통과 미열 외에는 괜찮았다. 다만 어제까지 마무리지어야 할 일이 있어 좀 바빴고, 일을 끝내고 나니 기진맥진하여 연락할 틈이 없었다. 주사 맞는다는 소리만 있고 이후의 이야기가 없어 혹시나 하고 안부차 전화했다고. 아아. 나는 혼자니까 나 자신은 내가 지켜야 해! 떠들어대다가 크게 한방 맞은 느낌이다. 안부 전화에 이렇게 흐늘흐늘 마음이 녹아 울컥할 거면서. 급기야 조금 후 엄마의 막 담가 보낸 생김치가 도착하고 있다는 택배문자가 도착하고야 마는데. 


“(167) 크리스티앙 보뱅의 책을 다 읽고 데버라 리비의 책으로 넘어왔다. 책을 어떻게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었을까. 이렇게 아름다운 사물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 때문에 내가.”


아, 아름다운 세상이여. 안부, 김치, 책. 그렇지, 난 혼자니까 더욱더 그런 것들을 적절히 섭취해줘야한다. 

싱긋한 공기를 마셔야 할 것 같아 창문을 활짝 열었다. 

가을이다. 


생각해보면 나는 가을이 항상 힘들었던 것 같다. 정신없이 살다가 찬 공기가 불기 시작하면 감기든 장염이든 일자목이든 몸에서 꼭 신호를 보내서 병원 신세를 졌다. 몸만 힘든 건 아니었다. 사실 마음 힘든 일이 더 많았다. 작년 가을을 생각해보면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고, 재작년 가을을 떠올려보면 정말인지 돌아가고 싶지 않고, 그 전의 가을을 떠올려보면 너무도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작년의 나를 떠올리면 (과로로 링거맞고 회사 가던 그 날, 반차의 행복을 느끼며) 아프니까, 가을이구나! 하면서도 올해는 가을인데 참 좋다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음. 


올해의 내 몸은 악명 높은 화이자 2차에도 별 후유증 없이 거뜬하다. 시간도 많고, 게다가 읽을 것도 많고, 아직 읽고 싶은 것도 많다. 생각해보면 삼십대가 되고 나서는 매년 가을마다 작년 가을보다는 올해 가을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내년 가을도 좋을 것 같다. 내 삶은 완만한 상승곡선 상태에 진입했다.



덧, 

1.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나는 황정은이 나오는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의 애청자였다. 작가님의 목소리가 가을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에세이를 읽으면서 가만가만한 작가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행복했다. 

2. 작가님이 쓴 <넷플릭스 : 빨강머리 앤 Anne with an E>의 감상문과 내가 그 시리즈를 사랑하는 이유가 많이 겹쳐서 좋아서 울었다. 이게 울 일인가 싶은 데도 그랬다. 넷플릭스는 앤 시즌4를 내놓아라.

3. 에세이 끝부분 록산 게이의 <헝거>를 읽고 쓴 <흔>도 그랬다. 어떤 에세이는 내게 에세이(비스무리한 것을)를 쓰게 하며, 그런 에세이가 좋은 에세이라고 생각하는 나로서 <헝거>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좋은 에세이였다. <헝거>를 읽고서는 무언가를 너무 쓰고 싶었지만 도저히 쓸 수가 없었고… 황정은 작가는 내게 불러일으켜진 그 마음을 황정은 작가의 방식으로 쓴 듯 하다. 그리하여 나는 볕이 드는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아 이거라도 써보는 중인 것이다.

        

2021-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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