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드 보부아르, 제2의 성
이십 대 중반까지는 스스로를 ‘자기 생각’이 있고 ‘책임감이 강한 여성’이라고 여겨왔었다. 무슨 생각이 그렇게나 많으며, 왜 ‘그냥’이 없냐는 건 언제나 따라다녔던 나에 대한 평가.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고칠 생각은 없으면서도 또 그런 말들에 상처를 안 받을 정도의 자존감은 없었으므로 삶이 무겁고 어렵고 괴로웠다.
그런데 친밀한 관계에서는 일종의 퇴행이 나타났다. 나는 그걸 무장해제라는 표현으로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데, 평소에는 터질 것 같이 많은 생각들이 별로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다. 항상 곤두서 있었으므로 어쩌면 내가 믿고 싶다 여긴 이들에게는 세상 관대하게 굴었을지도 모르겠다. 네가 좋으면 나도 다 좋아, 혹은 그걸 원한다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 믿기로 했으면 믿는 거지 뭐. 의심이나 자기주장을 잘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같아지는 것이 사랑이라고 다른 것은 내 쪽에서 먼저 제거하거나 보이지 않게 감추거나 나조차도 잊어버리는 것이다라고 나는 그렇게 여겼던 것 같다.
의존했다. 책임감을 내려놓았다. 그건 편했다. 쉬웠다. 만사가 다 복잡한 데, 어떤 관계에서는 좀 내려놔도 되잖아? 삶은 이미 어렵고 불편한 것들로 소화되지 않은 채 널려 있는 데, 쉬운 걸 두고 굳이 어렵게 가는 걸 편한 길 두고 굳이 불편한 길을 가는 건 소모적이었다.
“(34) 사실, 모든 개인에게는 주체로서 자신을 확립하고자 하는 윤리적 주장과 더불어 자유를 회피하고 자신을 사물로 구성하고자 하는 유혹이 공존한다. 후자는 불행한 길이다. 왜냐하면 수동적이고 소외되고 길을 잃은 개인은 미래를 향해 초월하지 못하고, 모든 가치를 상실한 채 낯선 이들의 의지의 먹잇감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길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면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실존의 공포와 긴장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자를 *타자*로 만드는 *남자는 여자 속에서 뿌리 깊은 공모*를 만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여자가 자기를 주체로서 주장하지 않는 까닭은 그렇게 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고, 상호성을 세우지 않은 채 남자에 결부시키는 필연적 관계를 느끼기 때문이며, 흔히 타자의 역할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실존주의, 겁먹지 말자. 보부아르가 말하는 건 어렵지 않다. 어쩌면 단순한 이분법이다.
여자란 무엇인가? 타자(제2의 성)다.
대자-즉자(사물)/주체-객체/자아-타자/초월-내재/자유-단순반복/여타 등등 기타 등등. 의식을 가진 모든 존재(대자)는 자신과 같은 존재인 ‘타자(객체)’를 만나서 그를 ‘타자화’하는 성격이 있다. 주체의 입장에서는 타자이지만 타자의 입장에서는 주체 역시 타자다. 그런데 보통은 상호적인 대자-대자의 관계가 ‘같은 의식을 가진 존재’인 남-녀 관계에서 만큼은 왜 부인되는 가. 무슨 까닭에 여성은 스스로를 ‘타자’의 자리에 두기를 스스럼없어하는가. 그것을 밝히는 것이 이 책 <제2의 성>이다.
스스로만을 주체로 적립한 남성 주체(들)에 의해 여성이 사회/역사/문화적으로 타자로 존재해왔음을 논증하는 것이 이 책의 1권 <사실과 신화>이다. 인류의 모든 신화와 유명한 이론가, 작가들의 여성에 대한 ‘타자화’를 조목조목 따지고 들어 후두려패는 1권도 백미지만, 나는 2권 <체험>을 특별히 더 좋아하는 데(그러나 이 책이 나왔을 당시에 2권의 판매는 현저하게 저조하여 보부아르가 속상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실제 여성의 삶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여자들의 ‘상황’을 안팎으로 세세히 기술하고 있어, ‘여성 스스로가 스스로를 타자화’하는 과정을 섬세하게 읽어낼 수 있다.
그 말투가 적나라하고 비판이 신랄하기도 하여,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 혐오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는 건 내 솔직한 느낌이다. 만약 당신이 이 책이 두꺼워 너무 겁이 난다면 2권만이라도 읽기를 바란다. 혐오적인 상황, 그것이 바로 어찌할 수 없는 여자의 상황이니까. 나는 심리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들이 2권 <체험>을 읽기가 더 거북 할 거라고까지 생각한다. 그리고 현대의 여성보다는 우리보다 한 세대 앞선 여성들이 훨씬 더 읽기 어려울 거라고도 생각한다(우리 세대가 ‘역하지 않은 만큼까지’가 <제2의 성> 이후의 페미니즘의 ‘성취’ 아닐까).
이유는 간단하다. 노예는 자신이 노예임을 바로 보았을 때 노예에서 벗어나는 법, 나의 노예근성, 나의 거지근성, 나의 타자 의식 으음(-_-) 인정하기 쉽지 않다. 역하다. 보부아르는 그걸 썼다. (일전에는 몰랐는데, 전기를 읽고 나니 얼마나 절절하게 썼는지 알겠어서 눈물 난다 진짜) 내재에서 눈 뜨지 못하고 있던 타자(노예)가 현실을 바로 보면 사실 게임은 끝난다. 환상 없이 적나라한 현실을 끌어안는 것은 자유로운 주체의 특권이자 멍에다. 멍에를 지는 순간이 초월하는 순간이다. (둘 다 힘들다. 차피 인생 힘든 거다. 자기 스타일대로 알아서~)
“(42) 사람들은 행복이란 말의 의미를 잘 모르며, 그 말이 의미하는 진정한 가치는 더더욱 모르고 있다. 타인의 행복을 가늠하기란 전혀 가능하지 않고, *타인에게 강요하려는 상황이 행복한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은 언제나 쉽다.* 사람들은 행복이 부동성이라는 핑계 하에 특히 정체 상태에 있도록 강요당한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해 버린다. 그러므로 그런 개념은 우리가 참고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채택한 관점은 실존주의 윤리의 관점이다.* 즉, 모든 주체는 계획을 통해 자기 자신을 구체적으로 초월로 확립한다. 그는 다른 자유들을 향한 영속적인 초월에 의해서만 자신의 자유를 완성시킨다. 무한히 열린 미래를 향하여 자신을 확장하는 길 외에는 현 존재를 정당화시킬 다른 방도는 없다. (중략) 이러한 여성 조건 속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길이 열려 있을까? 어떤 길이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할까? 종속의 한가운데서 어떻게 독립을 되찾을 수 있을까? 어떤 상황이 여자의 자유를 제한하며, 과연 여자는 그것들을 넘어설 수 있을까? 그러한 것들이 우리가 규명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문제들이다. *우리는 개인의 기회에 관심을 가지면서 이 기회들을 행복이 아닌 자유라는 용어로 정의 내리게 될 것이다.*”
보부아르는 서론에서 행복이 아닌 ‘자유’를 이야기한다. 나는 그가 추구하는 것이 행복이 아닌 것이 좋았다.
언제나 자유는 두 가지다. 억압 혹은 무언가로부터 ‘벗어날’ 자유와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는 자유(동시에 나는 무언가를 능숙하게 잘 다룰 수 있을 때 자유롭다고도 느낀다. 이는 창조와 멀지 않은 개념이라 섞어 쓰겠다). 언제부턴가 나는 ‘자유’, ‘자유로울 것’, ‘돈은 나에게 자유를 준다’ 등을 내 집 방구석 구석에 써서 붙여두는 중인데, 지금 내게 자유는 후자의 의미다. 동시에 전자를 계속해서 선명히 인식하는 작업이기도 하다고 조심스레 덧붙여본다.
그러니까, 다시 돌아가서. 소싯적의 / 어렴풋한 / 이제 기억조차 나지 않는 (아 구차해) / 사랑에 빠진 나에겐 점(.)과 느낌표(!)만 있었다. 물음표(?)나 쉼표(,)는 없었다. 물음표 투성이에 끝나지 않는 쉼표로 스스로를 볶아쳐대던 나에게 마침표와 느낌표는 행복과 가까운 것이었다. 누구라도 잘 알 것이다. 나를 잠시 잊는다는 것의 그 감정적 강렬함. 그것에 취해있을 때만이 가질 수 있는 어떤 열의와 마취의 상태. 그게 너무 좋아서 그걸 뺀 삶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음. 사랑~더럽~폴인럽럽~
. ! . ! . ! . !
아주 진한 세상. 짙은 밀도의 삶. 그건 빠져야 해. 취해있어야만 해. 일상에서의 무기력함 혹은 경제적 무능력함을 잊어야 하고 때로는 그것들까지 포함해서 보상받아야 하니까 또 더욱더 흠뻑 취해야 하는 거겠지. 너무 많이 취하지 않았어야 했는데, 사랑이라면 응당 그래야만 하는 거라고 그때의 난 정당화했었어. 세상 앞에 서는 내가 너무 부족한 것 만 같고 자신감이 너무 없어서, 나는 쉬고 싶었으니까. 게으르고 싶었으니까. 사실은 나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책임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 순간만큼이라도 인생 좀 쉽게 살고 싶었으므로.
… ? , … ?, … ?
,
질문(?)은 언제나 ‘살짝’ 사랑에서 빠져나온 순간(,) 생겨났다. (그동안 미뤄뒀던 것 포함 한꺼번에 몰아쳤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그때 나는 도리어 내가 나답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하고 있지 않을 때가 나답다니, 사랑하지 않는 것이 어울리나.
어쨌든 사랑하면 나는 자꾸 나를 잃었다. 대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있고 싶었고, 그에 대한 자기주장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사랑 자체의 속성은 아니었다. 사랑할수록 자기주장이 세진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사랑하면 충만해진다는 사람도 있었다. 나를 잃어버리는 것은 내가 가진 사랑에 대한 편견이었을 것이다. 그저 나는 나는. 사랑을. 그것을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느낌이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헌신이었고, 내가 사랑이라 여긴 모습(엄마…ㅠ_ㅠ)이 그런 것이었으며. 무엇보다도 사실 평소의 나는 알 수 없는 책임감으로 언제나 과로 중이었기 때문에 그저 그냥 맹목적으로 의존한다는 것은, 혹은 통제권을 모조리 넘겨버린다는 것은 차라리 행복한 기분이었던 것이다.
또한 그것은 페미니즘을 빼놓고는, 사회-계급-경제적인 나의 ‘상황’ 혹은 조건을 제외한 추상의 세상에서는 (물론 그런 진공상태는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자아-타자/개인-개인 이라는 모든 것을 쳐낸 단지 단독자-단독자의 관계에서는) 확실히. 정확히. 명확히. 그 의존이 바로 나의 의지였으므로… 투명하게 (한)남 탓을 못하겠다. 음. 뭐래. 사랑이 살짝 풀렸을 때, 맨날 방긋방긋 웃다가 어느 날 갑자기 눈에 섬광이 번쩍하고 변해서 미친 듯이 물음표를 그려대는 나를 그들은 괴로워했었다. … 썩 미안하진 않지만 좀 당황하긴 했었을……. (으아, 쓰다 보니 끝없이 쓰고 있다… 현재 앞이 알려주는 글의 양은 5,000자 또 넘기 시작했다, 그만 써 그만 써 마무리하자 마무리!!)
“(880) 사랑의 길은 자립이 허용된 경우라 하더라도 역시 대다수 여성에게 가장 매력적으로 보인다.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진다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중략) 불행하게도 여자는 거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들에 둘러싸여 있다. 모든 것이 그녀에게 쉬운 언덕길을 따라가도록 부추긴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자기를 위해 투쟁하는 대신 미끄러지는 대로 가만히 있으면 황홀한 천국에 도달할 것이라고 권유한다.”
“(889) 사랑에 빠진 모든 여자에게서 유사한 특징이 발견된다. (중략) 그녀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그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이다.(중략) 처음에 그녀는 사랑 속에서 이제까지의 자기 자신, 자기의 과거, 자기라는 인물에 관해 확인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속에 자기의 미래도 포함한다. 즉, 의미 있는 미래를 위해 모든 가치를 보유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미래를 맡겨 버린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자기의 초월이라는 과제에서 해방된다. 그녀는 그 초월을 본질적인 타자의 초월성에 종속시켜 그 타자의 가신이자 노예가 된다. 처음에 그녀는 애인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고 자기를 구해 내기 위해서 자기를 상실했다. 그런데 사실은 거기서 조금씩 자기를 잃어 가고 있다. 모든 현실이 타자 속에 있게 된다. 초기에는 나르시시즘의 찬란한 개화로 정의되었던 사랑이 헌신의 가혹한 기쁨 속에서 완성되고, 이 헌신은 흔히 자해에까지 이른다.”
보부아르의 저 문장을 읽고 어찌 이불 킥을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어찌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있으랴. 저기까지 읽고 술을 땄다, 꼴꼴꼴~~ (쓰다 보니 과몰입하여 훌쩍 12시가 넘었네?) 어쨌든 <제2의 성>은 정말인지 훌륭한 책이지만, 이 책이 탁월한 부분은 바로 제3부 <정당화> 부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왜 탁월한 지는 예전에 읽었던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에서 긁어옴.)
“(306) <제2의 성>이 여타의 페미니즘 서적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남성들에 의한 여성 억압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에 공모하는 여성들의 책임을 같이 지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보부아르는 여성들이 스스로의 타자화에 동조하여 남성 지배에 공모하는 이유는 경제적 이익,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스스로 주체가 되기 위해 필수적인 실존적 투쟁을 회피하기 위한 목적 때문이라고 통렬히 지적한다. (중략) 2부 3편 ‘정당화’의 내용은 여성들이 자신을 타자화하는 남성의 시선에 스스로 굴복하고 정당화하는 심리적 기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여성의 공모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여성으로서의 보부아르 자신의 시선에서 이론화한 부분이라고 하겠다. 나르시시즘, 연애와 사랑으로의 도피 그리고 신비주의가 여성의 대표적인 자기 정당화 방식으로 논의된다. - <여성주의 고전을 읽는다, 배은경>, ”
언젠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한국 영화에서 사랑이 실종되었다며 광광 징징~ 댄 적이 있는 데 [글 링크 한국 영화에서 변하고 있는 ‘사랑’과 ‘섹스’ : (정성일) ] (한번 읽어보시라. 방금 찾아보니 2018년 글이라 격세지감. 모든 것을 거는 기투로서의 사랑… 정말인지 피곤하다) 그때 나는 사랑이 사라지는 것은 일종의 시대정신이며, 바람직한 현상(ㅋㅋㅋ) 생각했었다. 여전히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누군가는 신포도 논리라고 하겠지만,) 나는 사랑이 싫다. 로맨스 싫다. 너무 지겹다. 이성애에 국한된 것만도 아니다. 사랑할 시간에 차라리 자기 계발을!! 모르겠다. 걍, 나 자신에 대해 별로 자신이 없다는 생각만 든다. 정확히 말하면 사랑에 ‘빠진’ 내 자신에 대해 자신이 없는 것일 테지만, 하지만, 언젠가는 좋아하고 싶다. 아직은 보부아르 선생님이 말한 “(910)진정한 사랑은 두 자유의 상호 인정 위에 근거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때 연인들 각자는 자기를 자기 자신처럼 그리고 타자처럼 느낄 것이다. 둘 가운데 누구도 자기의 초월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누구도 자기를 훼손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믿고'는' 싶다.
지금의 나는 ‘쉬운 길’을 버젓이 눈앞에 세워두고 굳이 어려운 길을 선택할 자신이 없다. 그러므로 ‘쉬운 길’자체를 봉쇄시킨다. 초월은 초월인데 소극적 초월이랄까?
한 번 더 곱씹어보는 보부아르의 지적. *그것은 쉬운 길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길은 아니다.*
바꿔 말하면 실존 - 그것은 자유로운 길이다, 그러나 쉬운 길은 아니다.
자유롭고 싶다. 그냥 해방되고 싶다가 아니다. 만들어가고 싶은 거다. 사랑에 빠졌던(쉽게 살고 싶었던) 나는 전혀 나답지 않았고, 눈 질끈 감고 도망쳐 나오면서 사랑 자체를 포기한 것도 같다. 나에게 없으니 모두에게도 없길 바란 것은 부끄럽게도 사실이다. 있다면 잘 사랑하시라! 막지 않겠다! 없으면 나랑 함께해요! 사랑 없는 세상이여~~~ 내가 안고 살아가겠노라.. 껄껄... 자야겠다.
마지막으로 제2의 성 2권의 첫 문장 “(389)우리는 여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되는 것이다.”보다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만큼 영영 회자되어야 할 12장의 첫 문장을 공유한다.
“(877) [12장 사랑에 빠진 여자] ‘사랑’이라는 말은 남자와 여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는 중대한 오해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
* 해당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2021-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