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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쟝쟝 Jun 28. 2021

혼자가 되었다 (드디어)

허새로미, 죽으려고 살기를 그만두었다

혼자가 되었다. 드디어. 정말로. 

일단은 박수를 치고 시작하자. 

짝짝짝짝짝!!

역시 박수로는 안 되겠다. 소리 질러!! 

예에에에에~

더 크게~~ 와아아아아!!!!~~~


삶은 각자 사는 게 맞고 원래 인생 혼자왔다 혼자가는 거지!!!라는 말에 고개 끄덕하면서도 언제나 ‘함께-곁-관계-연대-연결’ 등의 단어에 이미 눈물이 맺혀있는 나는 시골에 가까운 환경에서 자라왔고, ‘핵가족 사회로의 급변’이대세이던 90년대에 할아버지ㆍ할머니ㆍ삼촌ㆍ고모들이라는 대가족을 굴리느라 부모님만(!) 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살림밑천이 되어야 하는 건 아닐까 생각만(;)한 4남매의 장녀였다(느껴지겠지만 4남매란 아들로라도 자신의 갈린 삶을 보상받아야 했던 엄마의 슬픈 인정투쟁이었다). 내 무의식 속 가족이란 모부의 삶 모두를 갈아 넣어 봤자 겨우겨우 시끄럽게 골골대며 굴러가는 가성비 나쁜 고물기계의 모양이었다. 


삶을 갈아 넣을 필요가 있나? 고물기계는 폐기 처분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물론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 잘리듯 깔끔히 썰리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 아니더라. 고물기계는 싫었다. 그러나 모부의 삶까지 폐기 처분하고 싶지는 않았다. 갈린 건 내 삶이 아니라 모부의 인생이었을 따름이었고, 고물이었을지언정 그들이 세상에 따져 묻지 않고 성실히 몫을 다하는 책임감을 발휘한 덕에 난 성인이 될 수 있었으니까. ‘너 하고픈 거 하고 살아’라는 말을 주 양육자에게 들어보지 못한 채로, 어느 곳에서든지 너무도 쉽게 강한 책임감을 느껴버리는 성인으로 자란 것은 좀 문제였지만.




모부가 가족이라는 시끄러운 고물 기계를 부지런히 굴린 덕에 19년의 생존에 성공했다. 이따금 찾아오는 무기력의 나날들은 삶의 의미를 찾게 되면 괜찮아 질거라 다독였다. 너무 많은 양을 책임지려 하지만 않는다면 이 기계를 고쳐 써 볼 수도 있지 않을까?하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행사에 몇 차례 불려 가면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너를 사랑하고 말고가 아니라 내가 사라져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거야. 상견례까지 마친 상태였는 데, 파혼하고 함께 살던 집에서 뛰쳐나왔다. 갈 곳이 없었다. 마침 다니던 직장도 잠시 그만둔 시점이어서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2백만 원을 빌렸다. 누군가 내 삶을 내려다본다면 그 무렵이 가장 막막해 보이겠지만, 정작 나는 선명했던 것 같다. 혼자가 되자. 먼저 혼자가 되어본 뒤에 함께를 선택하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의 내가 대견하다.


“(196) 스스로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을 때, 타인에게 나의 무게를 너무 맡기기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 때 타인과 나 사이에 물리적, 정신적인 거리를 두는 것은 여자와의 관계에서도 좋은 전략이라 나는 믿는다. 헤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중심을 잡고 건강해지기 위해서다.”


나는 나를 믿기로 했고, 가끔 드는 비참한 기분에 취해있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노력했다. 쉬운 상대에게 심리적으로 기대거나 하소연으로 해소해버리는 것을 꾹 참았다. 그건 그냥 내 기분만 좋을 뿐 문제를 이성적으로 볼 수는 없게 했다. 혼자 웅크리고 앉아 판단을 내리고 책임을 지고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특히 동생들과의 연락을 자제하고 만남을 두 달에 한번 꼴로 한정했다. 굶어 죽지 않았다. 데리고 나온 고양이도 굶기지 않았다. 이따금 불안할 때는 책을 읽고 일기를 썼다.


그리고 이내, 정말로 혼자가 되었다. 


“(7) 추석에 추리닝 차림으로 집을 뛰쳐나왔을 때 나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물리적으로 더하여 정신적으로 혼자가 된 것은 정말로 지금이 처음이다. 나누어 쓸 필요 없는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도 처음인데다, 이 공간을 만들어내고 좋아하는 것들로 채우기 위해 2년의 시간 동안 죽어라고 일만 했다. 그러니까 혼자를, 내 공간을 만끽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까지 포함해 갖추게 된 것은 작가님처럼 나 역시 서른다섯이다. 남들은 혼자가 지겨워 결혼을 선택한다는 나이. 언제나 휩쓸리며 살아온 나에겐 이제라도 혼자되기 좋은 나이, 반칠십. 


피곤하지 않은 상태에서의 말똥말똥한 자립의 기분은 뭐랄까. 이대로 영원히 혹은 더할 나위 없다,라고 생각한다. 혼자는 외로움이 아니라 충만함이다. 약간의 심심함과 무한대의 자유다. 이러한 상태를 만끽해본 적도 없이 결혼제도에 편입되어보려고 했던 미련했던 그때의 나여, 이젠 정말 아디오스.


“(87) 딸들에게 하나의 위로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사명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은 그저 태어난 것을 기뻐하고 감사하기엔 지극히 복잡한 곳이다. 정상가족, 혈육의 정, 참고 용서하는 착한 딸, 그 무엇도 단 하나의 정답일 수 없다. 우리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우리 자신을 돌볼 의무가 있다. 혈육에서 떨어져 나온 딸도 혼자 잘 살아남아 제 길을 간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우리는 더 잘 살고 더 건강하고 더 우리 자신이 되어야 한다. 이제까지는 상상도 못 해보았을 만큼 더욱 그렇게 되어야 한다.”


물론 외로움에 유난히 약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맞벌이 부부의 외동으로 자라나 혼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는 친구들이 느꼈다던 고독감을 상상해본다. 상상이 잘 안 간다. 되려 곁을 내어주고 맛있는 걸 해 먹이고 옆에 뉘어 머리를 매만져주는 상상을 하게 된다. 뭘까, 고독감을 상상하는 것보다 돌봄을 내어주는 상상을 하는 것이 편한 뇌구조란(뭐긴, K-장녀 DNA). 그때까지 내가 겪은 관계에서의 고통은 외로움보다는 무거움이었는 데, 나는 사람들이 호소하는 괴로움을 내 것처럼(혹은 내가 해결해줘야 하는 것처럼) 느끼곤 했다. 그런 유형을 ‘조력자 증후군’이라고 호명하여 설명한 책을 읽고선 얼마나 속이 후련했는지.. 안쓰던 독후감을 썼고 그게 내 글쓰기의 시작이었다.




오늘의 내가 무려 한 달이 넘도록 고독한 1인 식사 메뉴를 고민하기까지(요즘 가장 고심하는 외롭고 힘겨운 정신적 노동이다)… 솔직히 난 혼자였던 적이 별로 없다(군중 속의 고독이야 많았다). 대학생활도 기숙사에서 시작했고, 거의 항상 자매들과 함께 살았고, 주변에는 외로움이 느껴질 때 쉽게 절취할 수 있는 우정과 우정 비슷한 관계들이 언제나 있었다. 소통이 수월하지 않아 차라리 혼자인 게 더 나을 가짜 관계들도 많았다. 혼자여 본 적이 없으니 부러 의식적으로 혼자가 될 필요는 느끼지 못했고 사람들도 나를 혼자 두지 않았던 것 같다. 혼자 있지 못한다가 아니라 혼자일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겠다. 


“(187) 원가정의 36평 집에서 신혼의 28평 아파트로 옮긴, 그런 인생을 사는 평행우주의 내가 있다면 지금의 나를 보고 인생 망했다고 슬퍼했겠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매트리스에서 침대로의 변화가 인생의 분수령이다. 어딘가에 뿌리를 내리고 마을을 짓겠다는, 지금 여기서부터 진짜 집을 만들어보겠다는 결심이다. 원룸이나마 내가 고른 집에서, 이만 원짜리지만 내가 조립한 가구를 들이고 내 방식대로 동선을 구성하고 배치한 집에서 나는 의외로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 내가 한 공간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그런데 나는 아주 작은 공간에서도 간단한 물건을 가지고 적절하게 살림을 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내게 공간을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오랜 무기력에서 빠져나오기만 하면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것을 가족으로부터 분리되고야 깨달았던 것이다.” 


혼자가 된 나만의 공간에서 난 의외로 청소에 진심인 사람이었다. 결벽증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어지른 것이 명확한 물건들을 보고 있으면 빨리 치워서 제자리에 두고 싶다. 동생이나 친구들이 왁자지껄 놀다 간 다음에는 바로 청소기를 돌려서 집을 원상복구 한다. 있을 곳에 있을 것이 있다는 것은 안정감이고 그 안정감이 좋아서 바로바로 정리한다. 


오랜 기간  정갈하고 단아한 사람들이 부러웠는 데, 정갈함 품위 뭐 이런 것들은 원래부터 자기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서 기능하기 쉽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가 어질렀는지 분명하지 않았던 대가족의 집, 아껴 쓰고 나눠 쓰는 것이 기본값이었던 물건들. 제자리에 두어진 물건을 가져다 쓰기보다는 마지막으로 쓴 사람을 찾아서 물건을 찾는 게 룰이었던 환경에서 아무래도 정갈하기는 어려웠겠지. ‘단정히 유지함’이라는 책임이 뒤따르는 소유에 대한 감각을 키우는 중이다. 좋아하는 걸 사야지. 기왕이면 좋은 것을 사야지. 취향 비스무리 한것들도 생겨나고 있는 것 같다. 


“(136) 혼자가 된다는 데에는 뭔가 상처를 후벼 파는 데서 오는 것 같은 쾌감이 있다. 내가 두려워하던 것이 이거구나, 결국 혼자가 되었구나, 하지만 나는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것. 나는 혼자가 되기를 택하는 사람들이야말로 그 어떤 MBTI 성격 유형이나 별자리보다 확실한 타입이 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공포영화에서 악당이 죽었을 때 그가 진짜 죽었을 거라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악당의 시체를 건드려보고 찔러보고 총으로 몇 번이나 쓴 다음에도 갑자기 살아나서 덤비지 않을까 주의 깊게 살피는 이들이 결국 혼자 살게 되는 사람들이다.”


혼자인 게 너무 좋아!라고 말하는 내가 이상한 사람, 불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왜 사람들은 혼자를 혼자로 그냥 두지 못하는 걸까(외로움의 투사?). 특히 혼자인 여자에게 어떤 사연을 기대하는 걸까(사연 없다고요). 그러니까 혼자가 됐지, 라고 후려치거나 어떻게든 짝지어주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걸까. 아무런 이유없이(지금까지 쓴 것들이 다 이유 아니던가?ㅋㅋㅋ) 살아보니까 혼자가 더 완전하고 좋았어요(!)도 존중받을 수 있는 그런 날을 꿈 꾼다. 물론 “나만 솔로..” 따위를 개그라고 하고 있던 시절을 내가 살아와버렸고, 나의 사회용 페르소나는 그런 드립으로 대처하는 것을 가장 수월하게 여기지만(이건 고쳐야겠다)...


몸이(마음 말고 몸이요) 외로워서 누군가의 체온이 그리울 때도  있었고, 결혼은 그렇다 치고 왜 연애는 안해요?라는 질문에 받아칠 워딩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아 심각해지기도 했었지만, 내가 느끼는 가장 밑바닥에 흐르는 ‘혼자’의 두려움이란 ‘앞으로 영원히 아무도 나를 안 좋아해 주면 어떡하지?’라는 질문인 것 같다. 이 책 136페이지를 읽으면서 이내 그 심연도 별거 아닌 것이 되었다. 맞네. 뭐, 아무도 나를 안 좋아해 주는 것은 원래부터 그랬네. 어떡하지?가 아니라 상태였다. 그냥 그런 상태로 계속 있었던 거라. 


앗! 유레카!!!! 어쩌지? 가장 큰 두려움을 나 방금 제거해버렸어!! 이제 더욱더 완전해졌다 우하하하!!




그리고 덧붙이면 아무가 나를 좋아하는 것도 싫다.


최근에 자매들과의 카톡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눴는 데

나 : 구남친이 결혼한대. A가 B랑 결혼했대. C랑 D랑 사귄대. 왜 나 빼고 다들 사랑하며 사는 걸까..

동생1 : 질문을 바꿔봐. 언니, 그들과 결혼하라면 절대 안 할 거잖아. 

나 : 어. 때려죽인대도 안 해.

동생2 : ㅋㅋㅋㅋㅋㅋ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동네 친구랑 이런 대화도 했었다.

나 : C가 나를 좋아하는 상상만으로도 C가 싫어졌어. B와 D가 대단한 거야. 사랑..뭘까...?

친구 : 짚신들이 제 짝을 찾은 거죠.

나 : 짚신으로 사느니 왼쪽뿐인 닥터마틴이 되겠어.

친구 : 갑자기,,, 닥터마틴?

나 : 은근 비싼 신발.

친구 : ㅋㅋㅋㅋㅋㅋㅋ


아무도 나를 좋아하지 않는 상태가 아무가 나를 좋아하는 상태보다 더 낫다는 것까지 밝혀져버렸고. 이제 남은 것은 돌봄이다. 노후와 돌봄에 대한 생각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주제이지만 최근 읽은 정희진의 문장을 인용해와 볼까 한다. 


“(203)그리하여 많은 이들이 팬데믹의 대안으로 돌봄 윤리에 관심을 보이지만, 이런 흐름은 지금 여기의 ‘여성 해방’과는 거리가 멀다. 팬데믹의 결과로 또다시 여성들이 강도 높은 보살핌 노동을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돌봄 노동의 내용은 그 자체로도 재평가해야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은 돌봄이 공적 영역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그 자체에 대한 찬양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현재 인류가 욕망하는 주된 가치인 물질적 풍요와 경쟁과 승부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고, 많은 가치 중에 ‘돌봄’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돌봄 노동의 의미와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 이해가 필요하고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론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 - 정희진,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 정희진, 편협하게 읽고 치열하게 쓴다


미래의 돌봄은 개인적으로는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착실히 준비해 가겠지만, 인생은 항상 뒤통수를 치는 법이니까 구조적으로도 인식론적으로도 고민해볼 것.




이 책의 백미는 정상가족(원가족) 안에서 저자가 느꼈던 분열과 그것에 대한 분노, 이해하려는 노동을 하지 않겠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선명한 선언들에 있다. 독후감으로 그 이야기를 써볼까도 생각했는데  내가 지난 몇 년 동안 맥락이 닿아있는 주장과 감상들을 거듭해서 써오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미 계속해서 선언을 해왔고, 그 다짐들의 결과로 ‘드디어 혼자’가 되지 않았나 하는. 그러니까 이제부터 나의 글쓰기도 다른 단계로 접어든 것은 아닐까. 


결국 원하는 것(=혼자)을 얻어낸 지금의 나는 모부에게 더는 이전과 같은 화가 나지 않는다. 방향이 분명한 섬세하게 분석된 화를 느끼고, 그래서 덜 억울하다. 용서했냐고? 글쎄.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용서할 필요는 없고, 가부장제를 용서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 용서한 건 아닌데- 해석이 달라졌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이 충만함의 시간이 지속되어 더 너그러워진다면 무식해도 책임감만큼은 강한 개인이었던 모부들에게 마음을 다해 감사해질지도 모르겠다고 막연하게 생각한다. 그 역시 먼 훗날의 일일 테다. 


“(137)나는 원가족을 떠나 여자들과 새로운 관계 만들기를 시도하고 있다. 모든 관계는 사실 등가교환이고 협상이고 거래라는 해석은 상당 부분 진실이다. 주기만 하는 사람은 없고 받기만 하는 사람도 없다. 어떤 대화도 한쪽이 떠들기만 해서 잘 굴러가지는 않는다. 어떤 관계도 매번 한쪽만 식사를 계산하거나 운전대를 잡아서는 동등해질 수 없다. 그러면 자원과 돌봄을 주고받을 대상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상호작용하고 거래해야 했던 이들이 우리가 여태 살아온 지옥을 만들어 왔다면, 혈연관계로 얽힌 누군가, 직장에서 마주쳐야만 하는 누군가, 혼인 관계에 있는 누군가와의 자원 교환이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했다면 이제는 누구와 무얼 어떻게 주고받을 것인지를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스스로 결정할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 시간이 내 편이라는 것을 믿지 않으면 많은 관계가 시작도 되기 전에 망가지고 말 것이다.”


용서할 필요도 없는데 시간까지 내 편이라고 말해주는 허새로미님 덕에 마음이 너어무 편해졌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매님 이젠 제가 이 복음을 전파하겠습니다. 


나는 이 책을 혼자가 되기를 두려워하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여남 상관없이 정상가족 혹은 혈연이라는 구조안에서 자기 자신을 해쳐본 경험이 있는 누구라도 읽었으면 좋겠다. 안 죽는다. 인연 끊는다고 패륜 아니다. 이해할 필요 없다. 이해하려는 순간이 상처 받는 순간이다. 상처를 허락하지 말 것, 특별히 더 친밀한 관계에서. 용기가 생겨난다. 그리고 여유가 된다면(여유가 없다면 만들어내서라도!!) 적극적으로 혼자되기를 “(92)뼛속까지 혼자가 돼”보기를 권한다. 혼자여서 좋은 것은 세상이 혼자를 반기지 않는 덕에 언제고 하산하고 싶으면 ‘함께의 속세’로 돌아가도 된다는 거다. 


나는? 


나 역시 열린 결말이다. 겨우 혼자가 되어본(만 2년이 좀 더 넘어가는 시점) 약소한 혼자력이지만 당분간은 하산할 생각이 없다. 어쨌든 혼자이기를 선택해 본 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남들에게는 너무 쉽다고 여겨지는 일이 내게는 어려운 일이었던 적이 많았다. 손에 뻗으면 닿을 수 있는 편하고 달콤한 관계들을 부러 제쳐놓고 고립되는 것이 특히 그랬다. 결과적으로 보면 나는 뼛속까지 혼자가 되고 나서야 함께 있을 때 가장 외로웠고 그 함께 있는 외로움의 상태가 가장 취약한 상태였다는 걸 알았다. 그러므로 외로울까 봐 혼자일 수 없다는 것은 나에게는 해당사항 없음이다. 


석 달만에 만난 동네 친구는 네가 혼자이기를 원하고 그 안에서 충만함을 느끼는 것만큼 누군가와 연결되어서 행복함을 느끼는 것을 적대적인 어떤 것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으면 한다고 이야기해주었다. 그러니까 두 가지는 다른 영역인 거라는 거지?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를 줄이는 게 아닌. 하지만 ‘나’라는 자원은 한정적인데? 느끼는 행복감에 대해서 말이죠. 질적으로 다른 행복감일 수도 있다는 거예요. 오케이, 그렇다면 열린 결말 하겠어. 그러나 대화와는 별개로 지금의 나는 충분히 더 혼자인 것을 잘 즐기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상태를 지속시키느냐 마느냐는 능력 밖의 일이 되지만, 이 상태를 만끽하지 못하는 것은 내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되었다. 혼자가 좋아. 봄날의 곰만큼. 



20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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