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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쟝쟝 Jun 29. 2021

나를 알기 위해 쓴다

엘렌 식수, 메두사의 웃음

동생이 차곡차곡 모은 스타벅스 쿠폰(?)으로 타다준 2020년의 몰스킨 일기장이 4/5는 채워져있지 않은 고로(작년에 거의 못씀) 2021년의 일기를 2020년 일기장 빈칸에 색깔이 다른 펜으로 적는 중이다(종이를 아껴 쓰는 착한 사람입니다). 가끔 작년의 일기를 읽으며 어제처럼 생생한 느낌을 받곤 하는 데... 2020년 4월 29일의 나는 맥주에 안주로 고로케를 세 개 먹었다. 


“고로케 세 개는 느끼하다. 과유불급. 두 개에서 딱 끊어야 한다. 내일부터 연휴다. 나는 맥주 책 영화 그리고 또 맥주 책 영화…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잖아. 너무 좋잖아!! 행복은 정말 언어가 없나 보다. 쓸 말이 없다. 그냥 어. 음. 행복하다.” 


휴일. 맥주. 책. 영화. 네 가지 조합으로 언어마저 잃은 행복감을 느끼던 나를 떠올리니… 오, 역시 서는 곳이 달라지면 풍경이 바뀌는 법. 요즘은 매일매일이 휴일인데 영화는 볼 생각이 안 들고, 책은 슬슬 지겨워지고, 맥주는(!) 주말 말고는 안 마신다!! (고도 적응형 알코홀릭에서 벗어나려 미세한 노력 중) 


매일매일 행복하긴 하지만 은은한 행복이라서… 고작 3일 연휴로 격렬한 행복함을 압축해서 느끼는 당시의 일기를 보니… 작년의 내가 너무 짠해ㅜ_ㅜ (정말 고생 많았다 과거의 나여) 어쨌든 일년이 흘렀고, 그 사이에 동네 고로케 집은 문을 닫았다. 코로나19의 영향이 컸겠지만, 생각해보니 그 후로 난 고로케를 사 먹지 않았던 것 같아, 친절했던 주인아주머니 죄송해요. 자주자주 조금씩 사 먹는 거였는 데, 무식하게 간식을 배불리 먹고 질려서 잊고 지내버렸…  모처럼 생각나서 찾았다가 문 닫은 게 어찌나 안타깝던지. 겨우 1년, 쉽게(그러나 분명히 매우 어려웠을) 사라져 버린 것들에 대한 잠깐의 애도를. 


또 이런 메모도 있다.

“나는 대체로 슬프고 아주 가끔 행복하다. 인생 뭘까.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  


작년 초봄에 술을 마시며 친구에게 이렇게나(!) 시적인 말을 해줬던 것도 떠올랐다. 당시 N번째의 시험과 면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트레스로 졸도를 해버린 썰을 풀며 인생 뭘까 진지하게 묻던 그를 나는 쉽게 위로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되었다. 스스로도 이 악문 채 하루들을 버텨내고 있었고, 친구의 상황도 나 못지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으니까. 이만했으면 그만두라는 말은 말이 쉬운 말이라서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때로는 견뎌야 하는 시기들도 있었고, 결국은 그만두는 결론을 내더라도 내가 나에게 지는 느낌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는 게 우리가 하는 위로의 암묵적 룰이었다.

솔직히 정말 너무너무 힘든 거야. 맨날 욕먹고 야근하고 야근해도 다 못하고. 집에 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자꾸 서러워서 눈물이 터지는 겨. 알지? 나 잘 우는 거. 어느 날 또 평소처럼 아 존나 힘들다 쓰바 엉엉 울고 싶다 이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차올랐는 데, 춥기도 하고 차마 눈물을 떨구기가 싫어서, 눈에 힘 꽉 주고 그렁그렁 한 채로 걸었다? 근데 가로등 빛이 반짝반짝. 그래서 울락 말락 하는 와중에 그 생각이 들더라. 어, 이쁘다. 하나만 하지. 슬프려면 슬프고 이쁠려면 이쁘고. 근데 슬픈 와중에 이쁘니까. 좀 살 거 같았어. 그러니까, 인생은. 인생은 원래 대체로 슬픈 건데- 눈물 꽉 찬 그 와중에 뭔가 가로등 빛 같은 게 눈물이 뿌연 대로 보이고, 그게 보이는 나는 울다 말다 울면서 빛 번지는, 찰나, 엉? 이러면서 콧물을 막 먹으면서 그 와중에 또 이쁘다 이러고 있는 나한테 피식 웃어주는 거. 상황은 눈물 나도 나한테 내가 웃어주는 건 할 수 있으니까. 그래. 오오. 근데 이거 내가 말해놓고 보니 그럴 듯한데? 나중에 써먹을 테다. 앗싸. 킵킵.

일 년 넘게 지난 시점에서 써먹기 위해 적어둔 두 줄짜리 메모 발견하고 그날의 불행 배틀 술자리를 생생하게 떠올려버렸다ㅋㅋㅋ. 그러고 보면, 기억… 뭘까? 작년에 먹은 세 번째 고로케의 느끼함은 기억이 나는 데, 무엇 때문에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기억이 잘 안 난다.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게 맞는 거겠지? 그런데 또 울면서 봤던 가로등의 반짝임은 어제 본 것처럼 잊히지가 않고.

무튼 아주 진심으로 그 이야기를 했다. 인생 밤길에 울다가 만난 가로등 빛 같다고. 엄청 슬픈데 또 슬퍼야만 보이는 것도 있는 것 같다고. 너나 나나 지독히도 의미를 찾아야 하는 의미 주의자인데 힘들고 슬픈 것 자체도 언젠가는 교훈이 되겠지..? (눈치) 알아, 위로 안 되는 거. 나도 위로 안돼. 미안해 ㅜㅜ 위로 안돼서.. ㅜㅜ.. 그냥.. 힘든 게 꼭 힘들기만 한건 아니라능.... 인생 단짠단짠... 내 인생 짠짠짠짠짠단짠... 니 인생은 짠짠짜라자라자짠짠짠단짠짠짠.. 뭐...? 술이나 마시라고? 알았어. (한숨) 취하자! 짠!! 이렇게 아마도 우리는 재빠르게 술이나 마시고 헤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날의 위로에 대해서 생각한다. 친구는 아마 잊었을 거다. 나도 저 두줄을 써놓지 않았다면, 저걸 꺼내서 다시 읽을 기회가 없었다면, 기억하지 못했을게 틀림없다. 어떻게든 친구를 위로해보고 싶은 마음에 아무말대잔치처럼 말로 꺼내 표현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내가 보았던 가로등 빛의 웃픈 반짝임 역시 영영 사라지고 말았을 거다. 


이 글의 시작은 어디일까? 가로등? 메모? 아니, 위로. 더 정확하게는 좋은 대화를 할 수 있는 상대와 진심이었던 내 마음. 덕분에 글이 보존시켜 줄 것들은, 얻어걸린, 웃펐던 겨울의 가로등. 



나만이 느낄 수 있는 무상한 것, 슬픈 것, 좋은 것, 아름다운 것, 불편한 것들을 일상에서 만나고 언어화시키지 않은 채로 마음 한 구석 어딘가에 담아둔다. (특히) 좋아하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내가 느꼈던 것들을 더 생생한 언어로 말하게 될 때가 있다. 입 밖으로 꺼내고 난 후에서야 안다. 내가 그것들을 그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구나 하고. 


잊어버리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일기장에 휘갈기듯 적어놓거나, 스마트폰 메모 어플에 메모해둔다. 짤막짤막한 단상들로 이루어진 메모와 문장들에 기대어 요즘의 나는 제법 긴 글을 쓴다. 썼던 글들을 읽어보면 그 느낌들을 온전하게 복구시킬 수는 없지만, 얼추 비슷하게 클라우딩 되어 있구나 싶어 진다. 


요 몇 년간 그런 식으로 글을 써왔다(기억이 맺히는 방식으로의). 기억해 둠직한 시간들을 후루룩 쓴 복사본(노트들과 메모장에)으로 잔뜩 가지고 있는 편이다. 예전 일기는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고발 리포트 느낌이 강했으나, 요즘의 일기는 행복해지는 방법에 관한 것들이 주를 이룬다. 아, 요즘의 나는 행복의 순간에 오래오래 머무르고 싶어 하는구나.


반대의 경우에도 쓴다. 어떤 대화의 순간이(좋고 싫고 와는 별개로) 인상적이었다면, 집에 돌아오는 길부터 때때로 길게는 한 달 까지도 내 안에서 미처 나누지 못한 말들이 빼곡히 쌓인다. 대화의 상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되짚어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라는 걸 알게 된다. 나는 또 그 질문들을 메모해둔다. 그리고 시간을 들여 질문 자체를 해석하는 글을 써본다. 


이 경우는 쓰면서 점점 더 명료해지는 편이다. 쓰지 않았다면 기분이나 인상으로 휘발되어버릴. 글로 적어 내리다 보면 열에 일곱은 엇비슷한 내용임을 알게 된다. 나 자신이 결론일 테니 결국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 쪽의 글 이란 쓰는 과정 자체가 즐거워서 시간을 잊어버릴 때가 있다. 즐겁다. 비슷한 방식으로 독후감을 쓴다. 어떤 책이나 문장을 만나고 왜 거기서 눈길이 멈추었는지 나에게 거듭 물어보면서 떠오르는 심상들을 적어보는 것이다.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 기억 - 사람 - 질문 - 해석 - 글



치킨을 먹기 위해 만난 독서가들은 소설 읽기에 각자의 포인트들을 가지고 있었고, 그 포인트를 듣는 것은 너무 즐거웠다. 각자들의 포인트를 훔쳐서 그런 기분으로, 그런 눈@_@을 하고서 읽고 싶어졌다. 아마 나는 또 내 멋대로 오독하겠지만, 오독과 오독 사이에서 확인되는 서로의 다름이 언제나 기꺼웠던 것은 우리, 책에 대해서 만큼은 진심이니까. 진심은 통한다. 아아, 상투적인 표현이라 서글프다... 상투적 ‘진심 통함’이 아니라 각자의 진심들이 있으면, 달라도 어딘가는 통해서 그 다름이 더 사랑스럽다는 그런 이야기다. ... (아, 이역시 상투적이야.. 지울까?)

몇 개 째의 닭 조각을 삼키고 배가 부를 때쯤엔 구관이 명관, 간장 맛이 나는 순살 치킨은 역시 교촌이 최고인 듯하며 속으로 궁시렁댔다. 톨스토이도 도스트도예프스키도 읽지 않았지만 여전히 읽을 생각이 없는 게 전혀 부끄럽지 않은 나는 오로지 최은영에 대한 팬심으로 “소설가는 맘 속에 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는 사람들 같아여!!!” 라고.. 말해.. 버렸다. 


톨스토이와 쿤데라와 제임스 설터와 줌파 라히리(이름도 어렵네) 사이에 갑분 최은영 던지기!!! (작가님 미안. 그래도 나에겐 톨스토이보다 당신이야…) 저는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읽기 위해서 소설을 읽는 것 같은 데, 이게 문학시간에 배운 주제 찾기 이런 학습효과 일지도 모르겠지만(쭈굴), 어쨌든 제가 좋아서 비명 지르는 소설은 제가 하고 싶었던 나 자신도 모르는 어떤 이야기를 정확하게 표현해 주는 소설이에요. 그래서 저는 최은영이 짱이예요. <내게 무해한 사람> 짱.... 


내가 전하는 소설 읽기 포인트에 한 이웃은 자기도 그런 식으로 좋아하는 소설가가 있는 것 같다고 동조했고 다른 이웃은 신기해했(던 것 같)다. 뭐, 나는 항상 그래 왔듯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가 그런 방식으로 소설을 읽고 있었구나, 하고 알아차려버렸고…. 어쩐지 최은영 까이면 내가 까인 것 같더라니…. (엉엉, 그런데 내 마음 같은 최은영 작가님 다음 소설 언제 나와요…?) 


나의 자랑(!)스러운 책에 미친(?) 이웃들은 자연스럽게 ‘쓰는 사람’으로서 읽게 되는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시작했는 데, 맙소사 그 이야기들도 너무 신기했다. 저렇게(방식) 읽으니까 그렇게(양) 읽을 수 있었구나. 우리 자주 만나요. 저랑 많이 놀아주세요!!! 우리 집에서 비록 1시간 45분 걸리지만 저 자주 놀러 올 수 있어여!! 전두엽과 측두엽에서 이 사람들을 붙잡아!!라는 신호를 보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 내 뇌를 알콜과 맛있는 것으로만 행복하게 할 수는 없지. 좋아하는 걸로 대화하는 거 너무 좋잖아!! (명랑한 은둔자 2달째.. 사람 그리웠구나 나..) 


엄청 행복해하며 이야기 듣다가 나는 그다지 ‘쓰는 정체성’을 가지고 글을 바라본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돼서 적잖이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쓰지?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물론 있었지만(cf. 정희진, 푸코, 양효실, 정성일, 보부아르, 엄기호, 김혜리, 신형철 - 대부분 에세이 or 사회과학, 순서는 애정도 순서)… 이것은 사실 ‘어떻게 이렇게 생각하지? 나도 이렇게 생각해보고 싶다!’는 말이었던 것이다. 

뇌에 즐거운 자극을 주는 이웃들로부터 파생되기 시작한 질문 하나.
쓴다.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니 ‘쓰는 사람’으로서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이 여기에 닿자 조금 소름이 끼쳤고, 어렴풋이 그것은 굉장한 자기학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질투와, 시기심과, 비교와, 약간의 안도와, 결국은 또 질투와, 자기 부정과, 시샘과, 질투와, 또 질투로, 점철된!!!!!!! 똑똑. 여보세요 들. 많은 작가님들? 혹은 작가 지망생, 예비 창작자님들아..? 당신들의 속 안에 어떤 독한 것이 앙금처럼 맺혀있을지 내 모르겠으나.. 인생이 뭐냐면요.. 아아, 그것은 눈물 사이로 비치는 빛이라오. 독기 빼려면 많이 우세요.. 토닥토닥.. (또... 슬퍼짐.. 아, 그 인생 살지도 않았는 데, 생각만으로도 너무 슬퍼)




난 다행스럽게도 나를 알기 위해서만 쓴다. 썼던. 것. 같다. 
내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제대로 인식한 서른 살 이후부터는 더 그랬다. 
질문을 조금 더 파고 들어가 보자. 내가 쓰는 중심 이유가 나를 알기 위해서였다면, 나는 왜 이토록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일까. 본격 일기 쓰기만 4년, 오늘에 와서야 슬쩍 대답해봐야겠다.

오랫동안 자신을 없애 나를 먹이는 헌신적인 사랑을 받으며 자라난 나는 성인이 된 후 사랑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랑이라 믿었던 것들을 어렵사리 폐기 처분하면서, 사랑하지 않고-존재하고-싶다 생각했다. 

‘사랑=(인어공주처럼)물거품이 되는 것.’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내게 체화된 사랑의 능력이란 게 그런 거였다. (바란다, 내게 인이 박힌 일종의 고정관념을 남을 생을 다 써서라도 바꿀 수 있다면.) 사라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어떻게 ‘있을’ 것인가? 이제와 끼워 맞춰 보는 것이지만 나는 내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 때마다 몰래 일기를 썼다. 나는 왜 이모냥일까로 범벅된, 대체로 사랑하는 게 힘들고 슬퍼서 쓰는 글이었다. 


어쨌든 글을 쓰고 있을 때라도 가장 선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또한 나는 기억하고 싶었다. 그 기억이 생생할수록 적어도 당시의 나는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기억을 글로, 글을 기억으로 남겼다. 그렇게 해두면 물거품처럼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있고 싶었다. 내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최근에 울컥한 아이유 노래 가사처럼) ‘겨우 내가 되려고’ 써왔다는 사실을 느끼는 지금, 안도한다.

나를 ‘있는’ 존재로서 자명하게 대하는 것이, 아주 오랫동안 나에게 큰 과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요즘 들어 공부하는 페미니즘과도 매우 맞닿아있는 것이라 앞으로는 의식적으로라도 ‘쓰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질끈 마음먹어 본다. 이는 스타일을 구축하는 문제라기보다는 ‘사라지고 싶지 않다, 존재하고 싶다’는 몸부림에 가까운 것이지만. 



“(19) 그대 자신을 글로 써라, 그대 육체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만 한다. 그러면 무의식의 거대한 자원이 분출할 것이다. … 글을 쓴다는 것은 행위이다.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에게 자기 고유의 힘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 여성과 그 성, 여성과 그녀의 여성으로서의 존재와의 탈-검열화된 관계를 ‘실현’시킬 것이다. 탈-검열화된 관계는 여성에게 여성의 행복, 여성의 기쁨, 여성의 기관들, 봉해진 채로 유지되어 왔던 여성의 거대한 육체적 영역을 되돌려줄 것이다. 또한 글을 쓰는 행위는 여성은 죄인이라는(여자는 매번 모든 것에 대해 유죄이다. 욕망을 가져서 죄, 욕망을 갖지 않아도 죄, 냉담한 죄, 너무 ‘뜨거우’ 죄, 동시에 둘 다가 아닌 죄, 지나치게 어머니인 죄, 충분히 어머니이지 않은 죄, 자식을 둔 죄, 자식을 갖지 못한 죄, 먹을 것을 먹인 죄, 먹이지 않은 죄…) 늘 똑같은 자리만 마련되어 있는 초자아화된 구조에서 여성을 끄집어 내 줄 것이다. ... 반이성적인 무기를 벼루어 가지기 위해 글을 쓰기. 모든 상징 체계 속에서, 모든 정치적 절차 속에서 여성 마음대로, 여성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이해 관계자, 전수자가 되기 위해 글을 쓰기.” - <메두사의 웃음/출구>, 엘렌식수 -

“(443)엘렌식수는 여성들에게 그들 자신들을, 즉 생각할 수 없는 것/생각되지 않는 것을 글로 표현할 것을 촉구했다. 엘렌식수가 여성 자신의 것이라고 확인한 그러한 종류의 글쓰기(표시하기, 낙서하기, 휘갈겨 쓰기, 메모하기)는 헤라클레이토스의 항상 변화하는 강을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내포한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엘렌 식수가 남성과 연관시킨 글쓰기는 이른바 축적된 인류의 지혜를 총망라한다. 남성적 글쓰기는 사회의 공식적 승인 도장을 받았기 때문에 너무나 큰 책임을 지고 있어서 변화하거나 이동할 수 없다. - <페미니즘,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이 글은 <메두사의 웃음> 때문에 썼다. 드디어 페미니스트들의 인용글로만 접하던 엘렌 식수를 만나버렸다. 통째로 밑줄을 다 그어서 그냥 안 긋는 게 낫지 않을까? 거듭 읽고 싶었고 문득 쓰고 싶었다. 끝없는 분열을 쓰면서도 명료해지길 원해 부끄러워하던 내 과거의 글쓰기가 사랑스러워지려 했다. 나는 불분명한 채로, (알 수 없음)의 괄호 속에 묶어놓고, ~인 것 같다로 언어의 끝을 애매하게 흐리면서, 아직은 잘 모르겠다로 판단을 유보시키더라도 글을 써보기로 한다. 


묶어두지 않은 채로 쓰기. 존재하기 위해 쓰기. 나 자신을 쓰기. 내 몸을 쓰기.


이미 쓰고 있었지만, 쓰는 사람이 되기.



2021-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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