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dy Oct 18. 2019

피 같은 술

Essay_수필

며칠 전 ‘응답하라 1988’이란 드라마를 보니, 쓰레기통에 있던 깨진 화분을 우산꽂이로 쓰겠다며 챙겨가는 할머니가 나오더군요. 집집마다 물건이 넘쳐나는 요즘에 자란 사람들은 ‘드라마니까 그렇지, 설마’라 할 지 모르지만, 그땐 정말 그랬지요. 구멍 난 양말과 빤스는 꿰매 입는 게 당연했고, 깨진 냄비는 화분 삼고, 이 빠진 물컵은 연필꽂이, 수저꽂이로 썼죠.


음식물 쓰레기란 말은 그땐 없었어요. 음식을 버리다니요!

요즘엔 손님 떠난 테이블 마다 덜 비운 술병들이 그득하지만, 제가 처음 술을 배우던 시절엔 술처럼 귀한 게 없었죠. 오죽하면 ‘피 같은 술’이란 말이 나왔겠어요? 술 얘길 하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네요.


제가 다녔던 대학 근처엔 아주 유명한 술집이 하나 있었습니다. ‘고모집’이라고. “아, 거기, 나도 가봤지” 하시는 분들 계시지요? 네, 바로 거기 맞습니다.

보통은 친구들, 선배들과 함께 열댓 명이 우르르 몰려가서 파전 두어 장에 소주, 막걸리 마시고, 주머니 돈 모아 겨우겨우 계산을 치르곤 했죠. 그날은 왜 그랬는지, 늘 하듯 우르르~ 몰려가지 않고, 친구 놈 하나랑 단 둘이 고모집에 갔습니다. 그것도 시퍼런 대낮에요. 그날 무슨 일로 대낮에 술집에 가서 무슨 심각한 얘기를 했는진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처음으로 술집에 둘만 덩그러니 있자니, 그 놈도 저도 재미가 영 없었던 것 같아요. 소주를 반병도 채 못 비웠는데, 그 놈이 “에이, 재미없다. 야, 그만 집에 가자!” 하더라고요.

반 남은 파전은 그 놈이 챙기고, 남은 소주는 제가 챙겼어요. 소주병 뚜껑이 요즘과 달라서, 집까지 안전하게(?) 운반하기 위해선, 소주병 입구를 막을 것이 필요했지요. 전 두루마리 휴지를 돌돌 말아 입구를 꽉 막은 후 가방에 한 구석에 꾹 박아 넣었습니다. 쓰러지지 않게 꾹!


그리곤 각자 집으로 가는 버스에 탔습니다. 제가 탄 버스가 청량리로 막 들어서려 할 때였어요. 제 앞에 얌전히 서있던 여학생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어요. “앗! 내 지갑! 도둑이야!”

이 말을 들은 버스기사는 악당을 만난 돈키호테라도 된 듯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소리쳤습니다.

“그 도둑놈, 반드시 제 손으로 잡겠습니다. 이 버스는 곧장 청량리 경찰서로 갑니다.”

승객들은 웅성거리며 일제히 도둑맞은 여학생 쪽으로 시선을 모았습니다. 바로 제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도둑을 맞았으니, 가장 의심받을 사람은 저 아니겠어요? 전 정말 결백하지만, 제 가슴은 쿵쾅대기 시작했어요. 왜냐고요? 소주병이요. 하얀 휴지로 막은 소주병 때문에요!


당시는 ‘대학생=데모=화염병’의 공식이 통하는 시대였거든요. 제 가방 속에서 흔들대고 있는 소주병의 비주얼은 제가 생각해도 영락없는 화염병이었어요.

‘청량리 경찰서’란 말을 듣자마자 전 겁이 덜컥 났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화염병을 들고 만원버스에 탔느냐는 심문(?)을 받을 지도 모른단 생각에 머릿속이 하얘졌고, 데모 하다 경찰서에 끌려가 혼줄이 났다는 선배의 목소리가 생생했어요.

‘어쩌지? 그냥 사실 대로 말해? 그럼 믿어 줄까? 아니, 의대생이라고 할까? 실험용 알콜이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다 의대생 아닌 게 발각되면? 더 의심받는 거 아냐? 어떡하지? 아이, 참, 파전을 내가 가져오는 건데…’


어느덧 버스는 청량리 경찰서에 도착했고, 버스기사와 경찰은 승객을 한 명씩 내리게 해서 소지품검사를 했어요. 그러려니 시간이 꽤 많이 걸렸지요. 승객들 사이에 불평의 소리가 높아질 무렵, 누군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물었어요.

“그런데, 아가씨, 그 지갑엔 얼마가 들어있었는데요?”

여학생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5천원이요.”

“뭐요? 겨우 5천원 때문이 이 난리법석을 피운 거요?”

승객들은 일제히 그 여학생에게 불만을 표시했고, 김이 샌 버스기사는 운전석에 앉아 버렸습니다. 경찰도 대충 형식적인 검문을 하던 차에, 누군가 다시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대충하고 갑시다. 지금 시간이 도대체 몇 시요?”

승객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맞아요, 그냥 갑시다, 그만 하고 가요, 하며 모두들 맞장구를 쳤고요.


십년감수! 지갑도둑이라도 저보다 더 안도하지는 못했을 거에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전 가방에 든 소주병을 꺼내 ‘피 같은 술’을 개수대에 부어 버렸습니다.

지나고 나니 웃을 일이지만, 정말 그땐 그 버스 속에서 별의 별 생각을 다 했었거든요.

오늘은 그때 파전을 챙겨간 친구놈에게 오랜만에 전화나 한 통 해봐야겠습니다.<끝_좋은생각 2016년 4월호>

작가의 이전글 걱정, 그리고 팔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