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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두 Dec 30. 2020

녹아버린 버터

이제 좀 스스로를 챙기면서 살아요, 엄마

 어렸을 때, 종종 생각하곤 했다.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거라던데 엄마랑 아빠는 서로 좋아서 결혼해놓고 왜 저렇게 자주 싸우는 걸까?'

 당시에는 그 답을 찾지 못했지만, 내 나이가 삼십 줄에 들어서니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수십 년을 서로 다른 환경, 서로 다른 가치관 속에서 살아온 두 사람이 함께 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이제 둘 다 힘이 빠져서 그런지 서로 적응이 되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어느 순간부터는 두 분이 싸우지 않고 잘 지내시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어렸을 때 특히 부각된 두 분의 다른 점이 각각의 소비 성향이다.


 엄마는 8남매 집안의 막내로 자랐는데, 외할머니께서 워낙에 절약 정신이 투철하셨다고 한다. 엄마도 그게  그대로 몸에 배어서 우리 집은 외출 시에 항상 무조건 모든 조명을 끄고 가능한 모든 전기 플러그를 고 나간다. 그리고 여름이나 겨울에도 웬만해서는 냉난방 장치를 틀지 않는다. 여름에는 시원한 도서관이나 서점 가서 버티고, 겨울에는 여러 겹의 옷과 수면양말로 버티는 중 (친구 중에 무신경하게 불이나 보일러를 켜놓고 나가는 친구가 있는데 그 친구 집에 가면 내가 더 불편...) 가끔 엄마가 하셨던 얘기 중에 외삼촌 계란말이나 소시지 반찬을 싸줘서 서러웠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 기를 유추해보면 외가는 부자는 아니었어도 또 그렇게 찢어지게 가난한 집은 아니었던 듯하다.


 찢어지게 가난했던 쪽은 오히려 친가였다. 아빠는 원래 4남매였지만 어렸을 때 2명의 형제를 잃고 지금은 고모 한 과 아빠, 이렇게 둘 만 남았다. 달가운 얘기는 아니라서 자주 하지는 않지만 술 취한 상태로 할머니가 남의 집 가정부로 일하면서 본인 대학을 보내줬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었다.


 다행히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직했던 아빠는 어렸을 때 어럽게 살았던 것을 보상받고 싶은 심리 때문이었는지 돈을 좀 잘 쓰고 다니는 편이었다. 사춘기 때는 주변의 친구가 사고 싶으면 나도 따라 사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라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 이리저리 친구 따라 사고 싶은 게 많았었는데, 엄마는 절대 안 사주고 아빠는 엄마 몰래 사줬었다. 어린 마음에 아 엄마는 대체 왜 저렇게 짠순이일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건가! 생각도 많이 하고 원망도 많이 했었다.

 아빠가 돈을 잘 쓰고 다니던 시절에는 나도 아빠를 따라서 돈을 아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잘 박혀있지 않았다. 회사 입사하고 처음에는 아빠처럼 똑같이 그동안 못쓰던 돈 많이 쓰고 다녔다 ^^: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나는 회사 입사하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자산 불리기에 대한 개념을 세웠고, 다른 교육보다도 금융 조기교육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존봉장의 주장에 매우 동의!)


 이렇게 절약정신이 몸에 밴 엄마는 어디 가서도 뭘 잘 싸오고 또 얻어오 하는데, (덕분에 나도 사촌언니들 옷을 많이 물려받아서 입고 다녔다는......) 나는 그 모습이 쪽팔리기도 하면서 또 너무 안쓰럽기도 하다. 


 이번에 이직한 회사의 그룹 계열사 중에 호텔 체인이 있어서 회사의 복리후생 중 하나로 1년에 한 번 숙박을 하거나 호텔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게 해 준다. 숙박은 2인이 기준이라 가족 넷이서 다 같이 시간을 보내기 하기 위해 식사를 택했. 인터넷으로 찾아본 그 식당의 디너 코스 1인당 가격은 15만 원. 그렇게 비싼 밥을 다 같이 먹어본 건 그 날이 아마 처음이었을 거다. 호텔 가는 길에 후기를 찾아봤는데 식전 빵과 함께 나오는 버터가 그렇게 맛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자리에 앉아서 동생과 그 얘기를 하는데, 엄마가 얼마 전 자취를 시작한 동생에게 그 버터를 챙겨가 라고 했다. 아니, 버터 하나 챙겨가서 뭐하지 대체?


"챙겨가, 챙겨가."

"그냥 먹어, 뭘 이런 걸 챙겨가?"

"아니, 맛있다며. 하나 챙겨가면 어때."

"아 또 시작이네."

대화 도중에 '그 버터'가 등장했다. 개별 포장된 버터가 일인 당 하나씩 주어졌다. 소문대로 맛은 있었는데, 엄마가 버터를 뜯지도 않는 거다.


"엄마, 그냥 하나 더 달라고 하면 되지. 그냥 먹어."

"그럼 얼른 하나 더 달라고 해."

 직원분에게 하나 더 달라고 얘기를 한 후에야 엄마는 본인 앞에 놓인 버터의 포장을 벗기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새로운 버터가 나오자 바로 동생에게 건네며 주머니에 넣으라고 했다. 동생은 마지못해 하며 주머니에 버터를 넣었고, 우리는 나머지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를 마친 후 근처 쇼핑몰에 있는 카페에 음료수를 사러 갔다. 쇼핑몰은 난방을 세게 틀어놨는지 코트를 입고 돌아다니기에는 조금 후끈했다. 음료수를 사들고 헤어지는 길에 동생이 주머니를 만지더니 버터가 그 사이에 다 녹아버렸다며 결국 쇼핑몰 쓰레기통에 버터를 버리고 갔다. 그 녹아버린 버터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녹아버려서 버릴 것을 뭐 그렇게 엄마는 본인 것을 먹지도 않고 챙겨가라고 유난이었는지. 여태까지 고생도 정말 많이 했고 아직까지도 일하시는 엄마가 이제는 나랑 동생이 아니라 본인을 챙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좀 더 즐기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만.


 그래서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주려고 한다.

"엄마, 이제 스스로를 더 챙기고 좀 즐기면서 살아도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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