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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캔두 Dec 09. 2020

비현실적인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 그래도 보길 잘했다

f.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영화관을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지 기억이 희미해서 열심히 떠올려보니 올해 설 연휴인 듯하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는 옆 나라에서 일어난 남의 일이었을 뿐 이렇게 전 세계인들의 삶을 바꿔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남산의 부장들>이 그때 영화관에서 본 마지막 영화이다. 원래도 그렇게 영화관을 자주 가는 편은 아니었지만, 코로나19가 바꿔버린 세상에서 영화관 가기는 더 어려워졌다. 많은 영화들이 개봉을 미루는 이 와중에 용감하게 세 명의 여성 주인공을 앞세워 개봉한 영화가 있었으니 바로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이다. 

코로나19 시대에 맞는 영화감상법, 자동차극장

 정상급 배우들이 무더기로 나오는 멀티캐스팅이나 제작비가 천문학적으로 드는 SF영화가 아니라서 손익분기점에 대한 부담이 비교적 적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래도 요즘 같이 다들 영화관에 가기를 꺼리는 시기에 개봉하기로 한 결단은 용감하거나 무모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는지.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과 제작사는 용감했던 것 같다. 아니 그보다는 영화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표현해야 맞으려나.




 영화는 1995년 삼진그룹의 영어토익반을 함께 듣는 수강생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한다. 그녀들이 살던 시대는 고졸에 여자라서 자신이 가진 실력 및 잠재력과는 상관없이 말단 고졸 여사원으로써의 역할로 제한되는 시대였다.(물론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에 비해 많이 달라졌는지 확신할 수 없다.) 그 유리 천장을 깨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토익 수업을 듣고 애사심도 넘치던 그녀들. 그런 그녀들이 회사의 비밀과 잘못, 회사에 위협이 되는 존재를 밝혀내고 회사를 지켜낸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우연히 회사 공장에서 남몰래 폐수를 방출한다는 것을 발견한 후. 폐수로 인해 발생한 피해를 은폐하기 위해 환경 검사를 조작했다는 정황까지 포착한 그녀들은 할 수 있는 방법을 총동원해서 회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애쓴다. 그 과정에서 회사와 관련된 더 큰 비밀을 알게 되면서, 폐수 방출 뉴스를 일부러 터트려 주가를 폭락시킨 후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인 외국 자본의 존재까지 밝혀낸다. 


 3명의 주인공(자영, 유나, 보람)이 주축이 되긴 했지만, 주변 사람들도 미약하나마 조금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힘을 보탠다. 환경검사 조작 사실을 밝히는 데 도움을 주는 조교, 방출된 폐수에 의해 몸이 아픈 사람들을 같이 돕는 생산 3부 대리, 경영권을 지키기 위해 소액주주들의 동의를 받아오는 토익반 동기들. 모두가 작지만 저마다의 큰 일을 해내며 영화를 결말로 이끈다.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은 자영(고아성), 유나(이솜), 보람(박혜수)뿐만 아니라 그 과정을 함께 했던 모두를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최종 보스'인 외국계 거대 자본과 맞서는 모습에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겹쳐졌다. 글을 쓰다 보니 퓰리처 사진전에서 봤던 Unsung Heroes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이야기의 과정 속에 함께한 등장인물 모두가 Unsung Heroes라 불릴 만했다.

 



 영화를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아쉬운 점도 있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는지 영화가 다룬 일련의 사회문제들이 조금은 얕게 다뤄지지 않았나 싶다. 고졸 여직원이나 임신한 여직원에 대한 차별, 폐수 방출로 인한 환경 문제, 외국계 자본의 돈놀이 등을 충분히 녹여내기에는 상영 시간이 조금 짧게 느껴졌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너무 무겁지 않게 다루면서도 위 문제들에 대해서 한 번쯤 생각해보게 만든 것은 이 영화가 가진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비현실적인 문제 해결 과정에 조금 힘이 빠졌지만 그래도 보길 잘했다 싶은 영화였다.  


P.S. 후기를 쓰면서 찾아보니 영화가 다행히 손익분기점을 넘겼다고 하는데, 유희열의 스케치북에 출연한 세 배우들의 귀여운 모습이 영화를 예매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성공적인 홍보 사례가 될 만하다고 생각

관련기사: www.mhn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9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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