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즈 루어만 감독의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2013)은 F. 스콧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의 동명의 소설(1925)을 기반으로 한 영화입니다. 20세기 영미문학을 논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작품이지요! 국내에도 여러 버전으로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작품의 제목에서 ‘위대한’ 이라는 형용사를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반어적 화법으로, 전혀 위대하지 않은, 오히려 속물적이고 단순한 인물인 개츠비를 희화화해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마치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같은 제목이라고 할까요?
<위대한 개츠비>는 1922년 미국 뉴욕 외곽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작품은 1940년 대공황 이전의 부유한 미국의 모습을 화려하고 성대한 파티와 흥청망청 먹고 마시며 즐기는 사람들을 통해 보여줍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자란 제이 개츠비(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장교 시절 상류층 여인인 데이지 뷰캐넌(캐리 멀리건)을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녀는 아무 미련 없이 풍족하고 넉넉한 자신의 인생으로 돌아갑니다. 이후 개츠비는 밀수와 불법적인 일들로 부를 축적하고, 데이지의 저택 건너편에 살면서 그녀의 마음을 다시금 얻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부유한 집안의 톰 뷰캐넌(조엘 에저튼)와 결혼한 그녀는 쉽게 개츠비에게 가지 못하죠. 이 모든 서사는 데이지의 먼 친척인 닉 캐러웨이(토비 맥과이어)의 시각에서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한, 오늘 살펴볼 작품은 이탈리아의 바로크 화가 체코 델 카라바조(Cecco del Caravaggio)의 <그리스도의 부활(The Resurrection)>(1619-20)입니다. 대저택에서 통화를 하는 개츠비의 모습 뒤편으로 볼 수 있는 수많은 미술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성경에 수록된 마태복음 28장 1~4절의 내용을 시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가 부활하는 장면입니다.
1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2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3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4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강한 빛의 사용과 그에 상반되는 깊은 그림자는 드라마틱하게 연출된 장면을 더욱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어두운 배경을 뒤로, 뒤틀린 신체가 복잡다단하게 화면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구름에 무릎을 두고 허공에 떠 있으며, 왼손에는 깃발을 들고 있습니다. 그 밑에 천사는 묘석을 들어올린 채로 서 있으며, 관객을 향해 머리를 돌리고 있습니다. 그 옆에는 묘지를 지키는 역할로 서 있던 군인들이 놀라서 흩어져서 있습니다. 이 작품은 바로크 시대의 전형적인 빛과 그림자를 다양하게 사용하며 화면 내에 균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바로크(baroque)는 르네상스를 뒤 이은 양식으로, 포르투갈어로 ‘찌그러진 진주’라는 뜻입니다. 이는 17세기의 예술 경향을 조롱하기 위해 18세기 후반에 비평가들이 썼던 단어인데, 세월이 지나면서 비하의 의미가 사라졌습니다. 바로크적이라는 단어는 특히 건축에서 그리스와 로마인들이 채택한 고대건축의 규칙을 무시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바로크적 작품을 제작한 화가들은 고전적 규범에서 벗어나고자 하였으며, 르네상스 시기 추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도 반대했습니다.
르네상스는 15~16세기 유럽의 미술 양식으로, 인간의 아름다움을 균형감있게 표현하였고, 부드럽고 섬세한 표현이 특징이라면, 17~18세기의 바로크 미술은 빛과 어둠의 대비를 이용한 강렬한 이미지가 특징입니다. 바로크 시기의 화가들은 역동적인 형태감을 포착하며, 인습을 타파하고, 관객에게 충격을 주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그리고자 하는 대상이 추하든 아름답든 자연을 충실하게 모사하고자 했으며, 이들에게 빛은 단순히 인체를 우아하게 보이도록 하는 장치가 아니라 진실을 보다 더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조화와 아름다움보다는 진실과 성실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데이지를 되찾고자 하는 마음으로 수많은 다른 잘못들을 정당화하며 지금의 위치에 선 개츠비. 그는 결국 톰 뷰캐넌의 거짓말로 인해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모든 정황을 알고 있는 화자 닉은 아무도 오지 않는 개츠비의 장례식에서 허망함을 느낍니다. 어쩌면 강렬한 빛과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존재하는 바로크적 회화와 마찬가지로, 피츠제럴드는 개츠비의 일생을 그 어떤 방식으로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그리려고 노력했다기 보다는 허무한 진실의 민낯을 낱낱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처럼 다시 태어나지 못하는 한 인간의 유한한 일생을 곱씹으면서 영화를 한번 감상해보시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