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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임리치 Oct 21. 2018

익스플로러보다 크롬을 쓰는 시간

시간부자 112화


이탈리아로 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로마의 한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고기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는데 함께 나온 샐러드에 드레싱이 뿌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양상추만 덩그러니 있었다. 당시 로마의 기운에 눌려서 그랬는지 나는 그 상황에 전혀 의심을 품지 않았다.


"여기서는 다들 이렇게 먹나보다. 드레싱이 없어도 나름 먹을만 하네."


이후 피렌체로 장소를 옮겨 어느 맛집 레스토랑을 찾아가게 됐다. 스테이크와 샐러드를 시켰는데 역시나 고기는 먹을만 했지만 샐러드에는 드레싱이 전혀 뿌려져 있지 않았다. 목넘김이 쉽지 않았으나 피렌체의 기운에 눌려서 인지 그 상황에 의문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나름 건강한 맛이라는 합리화를 되뇌이며 식사를 마쳤다. 그날 이후로 이탈리아에서 스테이크를 주문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국에 돌아와 그 식당의 후기를 찾아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점원이 실수로 우리에게 드레싱을 갖다주지 않은 것이었다는 걸 말이다.





책 '오리지널스'에 나온 이직률 연구에 대한 재밌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웹 서핑을 할 때 이용하는 웹 브라우저와 사직과의 연관성에 대해 고객센터 직원들을 대상으로 조사하다보니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크롬이나 파이어폭스를 사용하는 그룹이 익스플로러나 사파리를 사용하는 그룹보다 재직기간이 15프로나 더 긴 것이었다. 우연이었을 가능성이 있기에 다른 회사의 직원들을 대상으로 똑같이 조사를 다시 해보았다. 역시 크롬/파이어폭스 그룹이 익스플로러/사파리 그룹보다 결근 확률이 19프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두 그룹간에 기술적 지식이나 숙련도의 차이는 없었다. 그런데 크롬/파이어폭스 그룹은 업무 수행능력마저 보다 더 뛰어난 결과를 나타냈다. 두 그룹의 가장 큰 차이점은 웹 브라우저를 선택하는 과정 단지 하나뿐 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PC나 맥 컴퓨터를 사면 기본적으로 익스플로러나 사파리가 설치돼있다. 그래서 크롬이나 파이어폭스를 사용하려면 추가적으로 다운로드하여 설치해야 한다. 이미 웹 브라우저가 설치돼있는데 또 다른 웹 브라우저를 다운로드한다는 것은 현재의 주어진 상황이 뭔가 불편하다거나 새롭게 주어지는 상황이 좀 더 낫다고 느꼈기 때문에 현재를 개선하기 위해 실행으로 옮겼음을 뜻한다. 그게 뭐가 대수냐고 물을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데에 의미가 있다. 상황이 주어지면 문제가 있어도 그 상황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다.


드레싱이 없어도 좋다고 아무 생각없이 샐러드를 삼켜버린 필자의 모습처럼 말이다.


회사에서 제공된 컴퓨터, 그 안에 설치된 익스플로러와 사파리를 주어진 대로 이용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일하는 방식에도 같은 사고 방식을 적용했다. 그들의 직무를 고정 불변으로 여기어 불편감이 생겨도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결국 결근이란 방법을 택하게 됐으며 끝내 사직으로 이어지고만 것이다.



발명이란 단어를 떠올리면 굉장히 거창하고 쉽게 할 수 없는, 재능이 특별한 사람들의 영역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세상에 나오는 대다수의 발명품들은 혁신을 일으킬만한, 무에서 유가 창조되는 대단한 결과물들이 아니다. 그저 사소한 불편감을 해결하는 것에서부터 모든 게 시작된다.


어깨부위가 늘어나지 않는 옷걸이

비데를 대신할 수 있는 물에서 녹는 휴대용 물티슈

주차공간이 비었는 지 알려주는 천장등

줄이 꼬이지 않는 이어폰

약 먹는 시간을 알려주는 어플리케이션

잉크 번짐이 생기지 않는 볼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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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아주 소소한 아이템들일지라도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절대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의 시작은 현실의 불편감을 직시하고 그것을 해결해보려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러한 관찰력과 의지는 누구나 다 갖고 있다. 단지 그것을 실행으로 옮길 마음이 없을 뿐이다.


모든 사람이 발명가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마음만큼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상당히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그런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현재의 불편함을 그대로 수용하게 되며 어느 순간 그것을 당연시 여기게 되기 때문이다.


드레싱이 나오지 않은 샐러드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익스플로러에 문제가 있어도 모두가 사용하니까 괜찮다고 생각한다. 옷걸이가 옷을 늘어나게 해도, 비데를 쓰지 못해도, 주차공간이 비었는지 미리 알지 못해 헛걸음을 쳐도, 이어폰 줄이 계속 꼬여도, 약 먹는 시간을 잊어버려도, 글을 쓸 때마다 볼펜똥이 생겨도 당연한 현실이기에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게 된다.




정치 심리학자 존 조스트(John Jost)는 사람들의 부류에 따라 주어진 여건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그 차이에 대해 알아보았다. 조사 결과, 유럽계 미국인들보다 경제적 상황이 좋지 않은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경제적 불평등을 정당하다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더 높았다. 또한 최고소득 계층 사람들보다 최저소득 계층의 사람들이 경제적 불평등은 필연적이라고 여기는 비율이 더 높았다. 경제적 약자계층이 강자 계층보다 현상 유지를 더 지지한다는 결과를 보인 것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주어진 여건에서 가장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그 여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바꾸려고 할 가능성이 가장 낮다고 말이다.


내가 힘들어도 모두가 같이 힘들면 위안을 삼는다. 내가 힘들어도 환경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면 당연시 여긴다. '나만 힘든 게 아니니까'라는 생각은 현재의 고통을 완화시켜주지만 그것이 근본적인 고통을 없애주는 것은 아니다. 단지 무뎌지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모두의 일상인양 받아들인다. 고통의 본질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그저 위인들의 일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그렇지 않다. 아무리 소소한 의지도 결국 행동을 낳는다. 행동은 더 큰 의지를 불러온다. 커져버린 의지는 더 근본적인 문제에 접근하게 만든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이 바로 세상을 바꾸는 일이게 된다. 모든 것은...


익스플로러가 불편하면 크롬을, 크롬이 불편하면 파이어폭스를 써보려는 소소한 의지의 행동에서 시작되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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