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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임리치 Jan 09. 2019

내가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고민되는 시간

시간부자 138화

어떤 유명한 예술 작품을 보고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한번쯤 있을 것이다.


'생각보다 별론데...색감도 별로고...구성도 난잡하고...'


그러다 다시 생각한다.


'예술의 예자도 모르는 내가 어떻게 알겠어...뭔가 뜻이 있겠지...다시 보니까 괜찮은 것 같기도 하네...'


그 작품에 대해 적극적으로 비판을 하려던 순간 생각에 제동이 걸리는 이유는 아마도 어디선가 들어본 이 말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는 만큼 보인다


잘 모르는 사람은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일까


출처 : https://www.instiz.net/pt/1460563


어릴 적 신춘문예에 당선된 시를 신문에서 본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 시를 보고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그 실망감을 주변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그때 돌아온 대답은 내가 시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뒤로 나는 시를 꽤 많이 접해 보려 노력하고 습작도 많이 했다. 그리고 일정 시간이 흘러 그 신춘 문예 당선 시를 다시 찾아 읽어 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감흥은 오지 않았다.


프로그레시브 락 장르를 구사하는 락밴드가 있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팀이었다. 기타, 베이스, 드럼, 키보드, 드럼 각 파트의 연주 스킬이 모두 너무 화려해서, 이름없는 스쿨밴드들이 실력있는 팀으로 인정받기 위해 그 팀의 곡을 카피하곤 했다. 스쿨밴드에서 일렉기타를 치던 당시 나는 그런 엄청난 팀의 곡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곡이 너무 어려워서 노래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사람을 지치게 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흘러 밴드에서 기타로서 입지를 다진 후 나의 실력이 어느정도 무르익을 무렵 그 락밴드의 음악이 다르게 들리 시작했다. 정말 엄청난 팀이었다는 것을 제대로 깨우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알게 됐다. 아는만큼 보인다라는 말의 참 의미를 말이다. 그뒤로 십여년이 흘렀다. 지금에 와서 나는 그 밴드의 음악을 다시 찾아 듣지 않는다. 이유는 같다. 어려운 노래는 여전히 나를 지치게 하기 때문이다.


작곡을 하면서 생긴 버릇이 하나 있었다. 바로 곡의 화성의 흐름을 분석하는 것이다. 노래가 들리면 일단 곡의 화성을 분석하곤 했다. 그리고 평가했다. 이 곡의 흐름이 전형적인 흔한 패턴인지 , 전형적이지 않은 패턴인지를 말이다. 전형적인 패턴이라면 감동을 받지 못했고,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전형적이지 않은 곡이라면 충격같은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그 감동을 남들과도 공유하고 싶어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 반응이 대체로 비슷했다. 익숙하지 않아서 어렵고 그래서 별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니까... 음악적 수준이 낮아서 그러겠지' 


라고 폄하 아닌 폄하의 심정을 갖았다. 그런데 어느날 아무생각없이 음악을 듣던 중 노래가 너무 좋아서 잠시 음악에 취해 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전형적인 패턴의 흐름의 곡이란 걸 알았다. 그때 깨닫게 됐다.


나의 지식이 나를 틀안에 가두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출처 : https://www.instiz.net/pt/1460563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무언가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할 때 함부로 평가해선 안된다는 주장을 지지한다. 아는게 없으면 평가할 자격이 안된다는 뜻이다. 아는게 적은 만큼 볼 수 있는 것도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해한 예술작품이 보여도 유명하고 권위있는 작품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평가하기가 꺼려진다. 나의 느낌은 뒷전으로 밀어둔 채 전문가들의 평을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이러한 태도가 고착화되면 그 반대의 경우에도 영향을 끼친다. 어느 누구도 나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나에 대한 평가를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니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그래


내가 갖고 있는 100중 상대는 1만을 알고 있는데, 상대가 그것이 나의 전부인양 평가하고 비판할때 나는 그것이 불쾌할 수 있다. 그런데 그 불쾌함을 표현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상대는 더이상 나에 대해 평가하려 하지 않게 된다. 그가 알고 있는 1에 대해 더이상 말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바로...내가 1만큼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는 것이다.


1도 결국 나의 한 모습이다. 그 1들이 모이고 모여서 나의 100을 이룬다. 상대는 1이라는 단점을 얘기하는데 나의 99라는 장점으로 그것을 무마하려 한다면 나는 영원히 100을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상대를 평가하기 전에 상대를 신중히 파악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상대에 대한 예의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상대를 100분의 1이라도 파악한 나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귀를 귀울이는 일 또한 중요하다. 상대를 잘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상대를 통해 얻게 된 진짜 느낌과 진짜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반대로 상대가 나에 대해 느끼는 소박한 생각에도 귀를 귀울이는 자세를 갖게 한다.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해도 말이다. 100분의 1일지라도 상대가 느끼는 나의 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을 때 나는 비로소 101이 될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러나 몰라도 보이긴 보인다. 무언가를 아는 정도가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자격을 결정하진 않는다. 누구나 비판할 수 있다. 나의 눈에 보이는 한 말이다. 반대로 누구에게나 비판받을 수 있다. 내가 보여지는 한 말이다. 중요한 것은 작은 지식, 소박한 생각, 하찮은 의견일지라도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자세이다.


자신있게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있게 비판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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