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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타임리치 Aug 31. 2018

88화 - 창조의 시간은 늘 어리석다.

타임리치


친구 집들이 방문을 했다. 와인을 마실 예정인데 와인 오프너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자주 쓰던 오프너를 사갔다. 그 오프너는 방법이 매우 단순하여 누구나 쉽게 마개를 빼낼 수 있지만, 항상 끝 부분이 입구에 걸려 마지막 순간에 손 힘으로 마개를 당겨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것이 항상 귀찮았던 나는 한 번에 빼내기 위해 그날 처음으로 전형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마개 여는 시도를 했다. 그러자 친구는 왜 마개를 그렇게 바보같이 여냐며 타박을 했다. 순간 머쓱해진 나는 다시 원래의 전형적인 방법으로 마개를 열었다. 마개는 올라오다가 예상대로 끝 부분이 걸렸고 한번 더 힘으로 잡아당긴후 마개가 완전히 제거됐다. 그제서야 친구는 만족해했고 나의 새로운 시도는 다음 기회로 넘겨야 했다.


중학교 시절 농구에 미친 적이 있었다. 당시 하루의 일과를 농구로 시작해 농구로 마무리 했고, 머리 속엔 늘 농구 생각뿐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실력이 꽤 좋은 편으로 인식이 됐고 팀을 짜는 순간이 오면 항상 1순위로 나를 데려가곤 했다. 그런데 어느 시점부터 내 몸이 둔해지고 느려지기 시작했다. 링에 손끝이 닿을 정도로 점프력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 뒤로는 농구를 처음하는 애들보다도 점프력이 낮아졌다. 친구들은 요즘 몸 상태가 왜 그러냐며 타박을 했다. 결국 팀으로 데려가는 순위도 한참 뒤로 밀리게 됐다. 사실 나는 해보고 싶은게 있었다. 바로 덩크슛이었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덩크슛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친구들과 하는 일반적인 운동 수준으로는 점프력이 획기적으로는 늘지 않을 것이기에 완전히 새로운 훈련이 필요하다 생각했다. 그래서 실험을 했다. 양쪽 발목에 모레 주머니를 차는 것이었다. 그렇게 24시간을 생활하기로 했다. 몸은 당연히 둔해지고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덩크슛만 할 수 있다면 내 몸이 둔해지고 느려지는 것은 나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정작 견딜 수 없던 것은 친구들의 타박이었다. 지금 당장의 내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달 정도 실험을 지속하다가 포기하고 원래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어느날 감기 증상이 심해 학교에서 조퇴후 일찍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에 도착해보니 문이 잠겨있었다. 열쇠는 없었다. 부모님도 집에 계시지 않았다. 나는 그냥 아픈 몸상태로 부모님이 올 때까지 문앞에 주저 앉은 채 기다렸다. 2시간 정도 지나 어머니가 집에 도착했다. 몸이 아파서 조퇴를 했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왜 엄마한테 연락할 방법을 찾거나 아니면 다른 따뜻한 곳에 가있으려 하지 않고 추운데 바보같이 문앞에서 기다리냐며 타박을 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무 생각없이 문앞에서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시 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그 2시간동안 문앞에서 시상을 떠올리고 있었다. 머릿속에 하나의 시가 완성될 즈음 어머니가 집에 도착을 했기에 나는 그 2시간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그 시를 학교 과제로 제출했고 담임 선생님에게 불려갔다. 어디서 보고 베껴서 낸 시가 아니냐는 꾸중같은 최고의 찬사를 듣게 됐다. 지금 생각해봐도 그날 문 앞에서 떠올렸던 그 아이디어 만큼의 시상을 다시 떠올릴 수 있을 지 자신은 없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혼이 났을 당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 뒤로는 문앞에서 시상을 떠올리는 행위도 절대 하지 않았다. 나의 그런 행동이 바보같이 보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어리석다는 것은 무엇일까


사전적의미로 슬기롭지 못하고 둔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어리석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슬기롭고 빠릿빠릿해야 한다. 이것은 효율성과 관계가 있다. 인간의 역사는 항상 더 효율적이기 위해 발전해왔다. 그래서 현재의 기준으로 제시된 정답이 현재로서는 가장 효율적이다. 우리는 늘 그 정답을 따른다. 


현재로서는 가장 효율적이니까...


그런데 만약 지금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고 싶다면 기존의 정답을 따라서는 안된다. 완전히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 그러면 정답을 따르지 않는 과정에서 슬기롭지 못하고 둔해 보이는 상황이 초래된다.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얘기한다. 어리석다고...


여기서 항상 걸림돌이 발생한다. 바로 주변의 지적이다. 새로운 물건을 만들거나,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확립하거나, 새로운 장르의 문화를 만드는 것처럼 거창한 일이 아니라 아주 소소한 일상에서 가볍게 시도해보는 도전조차 기존의 정답을 거스르면 지적이 들어온다. 우리는 그런 환경에 파묻혀 있다. 그래서 창조의 과정은 인내가 필요하다. 그것은 창조 자체로서의 인내보다 훨씬 더 큰 주변의 과한 관심으로부터의 인내다.


기존의 정답에 도전하는 길...

남들이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길...

주변의 타박을 이겨내야 하는 길...


창조의 과정은 늘 그렇게 어리석다. 아니...어리석어 보인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답도 그 이전에 누군가가 제시한 하나의 아이디어였다. 당시에는 그것이 어리석게 보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정답은 애초부터 정답이 아니었다. 한 개인의 생각이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수긍이 됐을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창조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리석다는 판단은 금물이다. 판단 기준의 출처가 절대적인 신이 아닌 어느 개인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각이 꽤 설득력이 있어 널리 받아들여진다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람은 항상 틀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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