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나 May 25. 2023

이유 없이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 1

노크도 없이 내 인생으로 훅 들어온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그런 적이 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섬나라 '쿠바'에서 무언가에 홀린 듯 세기의 사랑을 찾았다고 생각했던 때가. 젊은 날의 패기라고 해야 할지, 순진한 용기였다고 해야 할지. 그때의 나는 가지고 있던 전재산 200만 원을 털어 다시 쿠바행 티켓을 사서 그 친구를 만나러 떠났다. 물론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말렸고, 나의 친한 친구들은 내가 미쳤다고 했으며, 심지어는 나도 내가 미쳤다는 걸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그 당시의 내가 떠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진실을 모른 채 계속해서 쿠바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빠져 현실의 삶에 집중하지 못했을 게 뻔하다. 하고 후회하기와 안 하고 후회하기 중에 늘 하고 후회하기를 선택하는 나라는 사람은 '선택에 대한 결과는 내가 지면 되는 거니까' 라며 아주 쿨하게 (사실 속으로는 알 수 없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비행기에 몸을 싣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나의 예감보다도 더 불행했으며, 한 달정도 쿠바에서 행복하게 쉬다가 오겠다던 계획을 수정해 거의 2주 만에 그 친구와 헤어져 쿠바의 수도 '아바나'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경험들 속에서 나는 환상으로 가득했던 쿠바의 맨얼굴을 마주하게 되었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깊은 고찰을 하게 되었다. 깊은 슬픔과 우울 속에서 불면증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던 나는 다행스럽게도 같은 까사(일종의 게스트 하우스)에서 머무는 다른 한국분들의 케어로 조금씩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행들과 함께 혁명광장으로 가기 위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유창한 한국어로 '한국인이세요?' 하고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너무 놀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고, 그곳에는 '나미나'라는 여자친구가 있었다. 쿠바에서 한국말을 하는 쿠바인을 만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뿐더러 세 번이나 쿠바 여행을 하는 동안 그 정도로 한국말을 잘하는 쿠바사람을 만나지 못했던 나는 그 친구와 한국말로 스몰톡을 나눴다. 그 친구는 대학교에 수업을 들으러 가는 중이었고, 아쉽게도 우리가 타야 하는 버스와 다른 버스를 탄다고 했다. 대화를 나누던 중 혁명광장으로 가는 버스가 먼저 도착했고, 우리는 작별인사를 하고 버스에 올랐다. 그렇게 버스가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와 다른 버스를 탄다고 했던 '나미나'가 만원 버스 안의 사람들을 뚫고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걸 발견했다. 무슨 일이지 싶었는데 우리와 이대로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탔다며 자기는 이 버스를 타고 가다가 내려서 학교까지 좀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우리는 수많은 쿠바사람들의 신기하다는 눈길 속에서 한국어로 조금 더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나미나'가 우리에게 왜 쿠바에 왔냐는 질문을 던졌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외면하고 있던 감정이 터져 나와 울어버리고 말았다. 쿠바의 만원 버스 안에서 눈물이라니 정말 지금 생각해도 창피한 상황이었는데, 그 상황에서 '나미나'가 또박또박한 한국말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언니 그런 사람 때문에 슬퍼하지 마세요. 언니는 소중한 사람이에요.


이 말 한마디에 더 펑펑 울어버린 건 나미나의 따듯한 마음이 자책감과 슬픔에 잠겨있던 나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기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그 말을 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면 너무 신기하면서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


내가 눈물을 흘리던 사이에 버스는 어느샌가 혁명광장에 도착했고, 우리 일행은 나미나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버스에서 내렸다. 나는 눈물을 그치고 다시 관광객 모드가 되어 두 번째로 방문하는 혁명광장 이곳저곳을 눈에 담았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막 혁명광장을 벗어나려고 할 즈음 저 멀리서 희미하게 '언니~~~'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분명 학교에 간다던 '나미나'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나미나'는 내가 운 게 마음에 걸려서 다시 왔다면서 나에게 또 다른 말들로 위로를 전했다.


이 날 헤어지면서 '나미나'가 우리 일행 모두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해 주었는데, 덕분에 그다음 날 아침에 다 같이 아바나 중심지에서 차로 40분 정도 떨어진 근교 바닷가에 살고 있는 나미나의 집에 놀러 가 볼 수 있었다. 그날 '나미나'네 집에서 후한 손님대접도 받고, 집 앞에 있는 해변에서 수영을 하면서 놀았던 기억은 상처받은 추억들 위에 덧입혀져 여전히 쿠바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순간이 되었다.


이쯤 되면 믿지도 않는 신이 나를 위해서 '나미나'를 보내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드는데, 더 신기한 건 우리가 지금까지도 SNS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여전히 '나미나'는 나를 이유 없이 좋아해 준다. 올해 초에 대학교 졸업 축하선물로 가족들이 한국에 보내주기로 했다면서 연락이 왔었는데,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올해엔 못 오고 내년에 올 것 같다고 했다. 내년에 한국에서 나미나를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모르겠다. 그러나 진짜로 내년에 '나미나'가 한국에 온다면,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그녀가 나에게 쿠바에 대한 좋은 추억을 만들어 주었던 것처럼 말이다.

작가의 이전글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