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머리가 아파 약국에 갔다. 두통약을 달라 하자 약사는 듣도 보도 못한 약을 내놨다. 타이레놀이나 게보린을 줄줄 알았는데. 남편은 약사에게 물었다. 왜 이걸 주느냐고. 약사는 "요새 젊은 사람들이 많이 먹는 두통약이에요"라고 답했다. "제가 이쪽 분야에서 일하는데 이 약은 처음 봐요." 남편은 약사에게 한소리하고 약값을 계산했다.
"리베이트 받는 걸 모를 줄 알고."
남편이 얼마 전 약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전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약국에서 후하게 리베이트를 하는 제약사 제품을 팔면서 손님을 속이고 있다고 의심했다. 약사에게 굳이 한마디를 한 건 '나는 호구가 아니다'라는 걸 어필하고 싶어서였다. 당신의 이익을 위해 제품을 팔면서 마치 나를 위하는 척하지 말라. 남편이 약사에게 던지고 싶었던 메시지였다.
내 남편은 호구 잡히는 법이 없다. 나와는 정말 다르다. 나는 좋은 게 좋은 거라는 헐렁한 태도를 지녔다. 싫은 소리도 잘 못한다. 한 번은 화장실 변기에 휴지걸이를 빠뜨려서 기사를 불렀다. 전화로 문의했을 때 기사는 흡입만 하면 된다며 5만 원이라고 했다. 막상 집으로 온 기사는 휴지심이 너무 깊이 들어가서 변기를 분해해야 한다고는 10만 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나는 군말 없이 10만 원을 지불했다. 변기 물이 콸콸 내려가는 걸 지켜보면서 꼼꼼히 따져보지 못한 걸 자책했지만.
남편은 칼 같다. 얼마 전 남편이 갤럭시 패드를 구입했다. 당일 배송되어야 할 패드가 남편의 예전 집으로 배송됐다. 구입처에서는 다음날 퀵으로 보낼 테니 퀵서비스 요금을 남편 돈으로 지불하고, 계좌번호를 알려주면 요금을 송금해주겠다고 했다. 나라면 구입처에서 하라는 대로 했을 것이다. 남편은 달랐다. 그는 "당일 배송 약속을 어긴 건 그쪽이며, 그쪽 실수 때문에 왜 내가 수고스러워야 하느냐"라며 따졌다. 그러자 구입처는 남편 말대로 퀵서비스 요금을 선지불하고 다음날 우리 집으로 패드를 보냈다.
큰소리치면 인터넷 속도를 올려주는 게 정상인가요?(출처=pixabay)
쓴소리를 못하는 성격 탓에 하나하나 따지는 남편을 옆에서 보는 게 불편할 때도 있다. 가스건조기를 설치할 때도 가슴을 졸였다. 원래 건조기를 설치하려고 했던 장소가 애매해 베란다 선반을 뜯어내고 설치했는데, 자고 일어난 남편이 설치 기사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질문을 퍼부었다.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남편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집에서 필요한 물건을 구입할때에는 남편의 끈질긴 질문 세례를 감내해야 한다.그는 왜 샀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다른 곳에서는 얼마에 파는지, AS는 어떻게 하는지 등등 꼬치꼬치 캐묻는다. 남편과 다년간 결혼 생활에서 터득한 기술은 집안 살림을 마련할 때에는 남편을 시키는 것이다. 얼마 전 정수기 렌털을 알아볼 때도 남편이 팔을 걷어붙였다. 월 이용료부터 관리 주기, 관리 항목까지 꼼꼼히 따져본 남편은 L사 정수기를 낙점했다. 나는 속 편히 정수기 설치 기사를 기다렸다.
이런 남자가 내 편이 되면 득을 보면 득을 봤지손해 보는 일은 없다. 인터넷 속도가 떨어졌다는 걸 알아챘을 때가 그랬다. 남편은 인터넷 속도를 직접 측정하더니 고객센터에 연락해 문제를 제기했다. 인터넷 회사는 바로 속도를 올려줬다. 그런데도 남편이 보기에 만족할만한 속도가 나오지 않았다. 남편은 더 강하게 따졌다. 가입을 해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인터넷 회사는 속도를 더 올려주고, 월 이용료를 깎아줬으며, 80만 원어치 상품권까지 줬다. "와, 한국에서는 큰소리를 쳐야 손해를 안 보는구나."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남편은 의기양양한 표정을지으며 상품권 전부를 내게 건넸다.
(※이 글에서 약사와 관련된 내용은 남편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복약지도를 하지 않은 약사에 대한 남편의 판단은 사적 경험에 근거한 선입견 또는 오해일 수 있으며, 특정 직업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님을 밝혀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