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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정여 Oct 23. 2019

아기 이름에 돌림자를 쓸 수는 있습니다만

남편의 이 태도는 무엇?

회사 선배는 삼대독자라고 했다. 마흔이 넘어 결혼한 선배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을 낳으면서 부모님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곧 위기에 봉착했다. 부모님은 당신네 아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손자의 이름에 돌림자를 쓰길 원했다. 반면 와이프는 아들에게 돌림자 상관없이 예쁜 이름을 지어주길 바랐다. "중간에서 난감해 죽겠어." 선배는 정말 울고 싶어 보였다.


나는 남편에게 선배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고 보니 임신한 지 수개월이 지나도록 아기의 이름에 대해 남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다. 나는 내심 남편의 반응이 궁금했다. 선배의 이야기를 하면서 남편의 의중을 떠보고 싶었다. 그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당연히 돌림자를 써야지."


내 남편은 OO O 씨 OO대 손이다. 남편의 집은 집안의 내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시아버지는 시골집에 방문한 나에게 조상들이 언제 어떻게 터전을 마련해 정착했는지 설명해주셨다. 결혼 후 첫 명절 때 시골집 주변 산에 모신 조상들의 묘를 찾아가 인사를 한 건 시아버지의 제안이었다.


나는 전통을 중시하는 남편 집안의 문화를 존중하고, 시아버지를 존경한다. 몇 년 전 제사를 합쳤을 때 직접 쓰신 축문을 읽으시는 걸 보면서 시아버지를 더 존경하게 됐다. 과거를 돌아볼 새 없이 세상은 빠르게 돌아가는데 묵묵히 옛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는 모습이 감동스러웠다.


아기의 이름도 돌림자를 쓸 수 있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남편의 태도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럼 O 씨 집안 애 낳아주는 기계야?"


남편의 태도는 내 예상을 한치도 벗어나지 않았지만, 나는 일부러 과하게 반응했다. 아기의 아빠와 엄마로서 우리는 동등한 의사결정 권한이 있다는 걸 환기시키고 싶어서였다.


화들짝 놀란 남편에게 나는 "이름은 우리가 부모로서 아기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는 중요한 결정이다. 돌림자를 쓰고 싶다면 아기 엄마인 나에게 동의구하고 설득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남편은 내 말에 바로 수긍했다.


아기는 양가 모두에 큰 기쁨을 안겨줬다.(출처=pixabay)


우리 부부는 결국 아기 이름에 돌림자를 썼다. 나는 아기의 이름을 두고 남편과 갈등하고 싶지 않았다. 돌림자가 촌스러웠다면 강력 반대했겠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동의하자마자 남편은 시아버지께 전화를 걸어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했다. 아버지에게 아들의 작명을 부탁하는 남편의 얼굴은 쑥스러우면서도 행복해 보였다. 이렇게 효도하는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화기 너머 들려오는 시아버지의 목소리 첫 손주의 이름을 짓는단 생각에 들뜬 듯했다. 시아버지는 사주 풀이 책을 직접 구입하시고는 아기가 태어나는 날 사주에 맞춰 이름 몇 개를 지어 우리 부부에게 보내셨다. 남편과 나는 한뜻으로 시아버지가 지어주신 이름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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