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의 결혼식이 있었다. 남편은 함께 가길 원했지만, 나는 마다했다. 결혼식장까지 가서 육아를 할 거라 생각하니 아득해서다. 나는 남편에게 아기와 둘만의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남편은 고맙게도 내가 외출을 준비하는 사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갔다. 나는 모처럼 여유롭게 화장을 했다. 평소 같으면 옷방에 아기가 들어와 난장판을 만들었을 테다.
결혼식을 참석한 뒤 지인들과 점심을 먹었다. 뷔페에는 와인이 있었다. 나는 레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화이트 와인까지 한 잔 더 마셨다. 아기가 있었다면 엄두를 못 냈을 일이다. 오랜만에 자유로움을 만끽한 나는 결혼식장을 나설 때가 되어서야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출발한다고. 아기가 배고플 수 있으니 이유식을 먹이라고. 그러자 남편이 하는 말.
"이...이유식?"
차마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고 싶지 않다는 말은 할 수 없지만, 분명 먹이고 싶지 않다는 소리로 들렸다. 아마도 "네가 와서 먹여라"라고 말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남편의 목소리에서 미세한 떨림과 주저함을 감지한 나는 "아니야. 나 30분 안에 도착해. 내가 가서 먹일게"라고 답했다.
남편이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인 건 손에 꼽는다. 하지만 나는 남편을 들들 볶지 않는다. 지금까지 나는 이런 내가 성격이 좋아서라고 생각했다.(참고 글=잔소리 대마왕) 제마 하틀리의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를 읽으면서 비로소 내가 잔소리를 하지 않는 진짜 이유를 알게 됐다. 나는 쓸데없는 감정노동을 하기 싫어하는 인간이었다.
하틀리는 커다란 수납함을 끙끙 거리며 선반 위에 올리고 있었다. 남편이 이틀 전 물건을 꺼내고 제자리에 올려두지 않은 수납함이다. 남편은 수납함을 올리는 그녀를 보며 "나한테 올려놓으라고 말하지 그랬어"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물을 그렁거리며 이렇게 답했다. "나는 당신한테 하나하나 시키기 싫단 말이야." 하틀리는 아내가 남편에게 집안일을 부탁하는 것조차 감정노동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나 요청하기, 좋은 말로 부탁하기는 추가되는 감정 노동일뿐이다. 이를 배분하고 지시하려면 반복적으로 요청해야 하고 그것은 종종 잔소리로 여겨진다. 가끔은 웃으며 좋은 말로 부탁하고 부탁하고 또 부탁하지만 그래 봤자 아무 소용없을 때도 많다(잔소리 좀 그만하라는 말만 듣고 끝난다). 그러느니 내가 알아서 해버리기로 한다.(p.17, 남자들은 항상 나를 잔소리하게 만든다, 제마 하틀리)
내가 그렇다. 남편이 화장실 청소를 자주 해주기를 바라지만 부탁하지 않는다. 안방 화장실은 언제 청소했는지 기억이 없다. 나는 그냥 안방 화장실을 안 쓰고 만다. 아기를 낳기 전에는 내가 거의 청소를 도맡았지만 남편에게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남편이 내게 "OO는 청소하면서 스트레스 풀리지?"라는 망언을 했을 때 그런 말 다신 하지 말라며 눈에 불을 켰지만, 속으로는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안방 화장실 변기는 잘 있는 걸까.(출처=unsplash)
하틀리의 책을 보며 난 정말 웬만하면 감정노동을 피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러고 보니 아기 이유식을 먹여야 한다고 말할 때 나는 남편이 지시처럼 느끼지 않도록 신경을 쓰며 얘기했다. 냉장고 오른쪽에 있는 이유식을 전자레인지에 1분 30초 돌리라고까지 알려줬다. 이 모든 게 하틀리가 말하는 가정 내 감정노동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감정노동은 여기까지다. 이유식을 먹이는 걸 달가워 하지 않는 남편을 좋은 말로 설득할 수도 있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이런 감정노동은 피곤해 한다.
책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들을 하는데 남편이 왜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걸 꺼려했는지 궁금했다. 나는카카오톡으로 남편에게 물었다. 남편이 답했다.
"아 자신이 없어서"
아기에게 이유식을 먹이는 건 정말 쉽지 않다. 아기가 잘 안 먹는 데다 엄청 흘리고 장난을 치기 때문이다. 나는 아기의 식사시간이 되면 수저를 2개 이상 준비하고, 아기가 좋아하는 장난감, 컵, 마그넷을 옆에 둔다. 오늘도 아기의 입을 열기 위해 장난감 자동차의 문짝을 수십 번이나 열었다. 아기는 내가 연 문짝을 닫는 데 집중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엄마인 내가 이럴진대 남편은 더 할 거다. 이유식은 엄마가 먹여야 한다거나, 먹이기 귀찮거나 따위의 이유였다면 가만 있지 않으려 했는데. 남편은 자기로 인해 아기가 덜 먹을까 봐 걱정을 하고 있었다. 남편이 이유식 먹이는 걸 어려워하는 데에는 내 탓이 크다. 지금까지 소모적인 감정노동을 하지 않기 위해 남편에게 부탁하기보다 내가 먹이는 걸 택했기 때문이다.
하틀리는 가정 내감정노동의 부담이 아내에게 치우쳐 있는 걸 지적하면서도 감정노동이 "우리의 유대를 강하게 하고 생활에 질서를 부여하고 서로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유지하게 한다"라고 말한다. 감정노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남편이 감정노동의 기술을 잘 활용하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녀의 조언이다.
지난 주말 산책을 다녀온 뒤 남편에게 아기 이유식 먹이는 걸 부탁했다. 나는 "OO야 밥 맛있게 먹어"라고 말하고는 스마트폰을 들고 안방에 들어갔다. 거실에서는 남편이 온갖 재롱을 부리며 아기의 입을 열기 위해 애쓰는 소리가 들렸다. 30분 가량 흘렀을까. "다 먹였다"는 남편의 말에 거실로 나와 보니 아기는 얼굴에 이유식 범벅인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남편은 산 정상에 오른 듯 녹초가 된 얼굴이었다. "우와 평소보다 많이 먹었네." 나는 한껏 응원하는 마음을 담아 남편을 치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