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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06. 2020

제퍼슨의 이념과 인간 존중 사상

토머스 제퍼슨 시대 2

제퍼슨은 1779년부터 81년까지 버니지아 주지사를 역임하였다.


독립전쟁 당시 대륙 군의 군복 형태  <출처 : 위키피디아>


독립전쟁 당시, 군인이 아니었기에 직접 전쟁터에서 싸우지 않았다. 주로 후방에서 지원을 다.


버지니아 주지사와 프랑스 공사


한창 전쟁 중인 지역에서 주지사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의 임기 동안 2차례에 걸쳐 영국군의 침략을 받았다. 1781년에는 리치먼드에서 도망을 가는 수모를 겪었다.


사실은 지역 시민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겨주었고, 다시는 주지사로 당선되지 못했다.



제퍼슨의 초상화(1786년)   <출처 :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나자 1784년~89년까지 프랑스 공사에 임명되어 미국을 떠나 있었다.


프랑스에 있는 1787년에 미국에서는 제헌회의가 열렸고, 지지의사를 표시했다. 이후 개인의 인권 내용이 수정헌법에 반영될 수 있도록 매디슨에게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그는 프랑스 공사 재직 시, 혼란했던 국내 상황에 비해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했다.


불어에 뛰어나 프랑스 정치인 및 귀족들과 좋은 친분을 유지했다. 파리의 경관과 프랑스 문화의 고귀함에 많은 찬사를 보냈다.


초대 국무장관 역할


하지만 1789년 프랑스대혁명 때, 귀족이 아닌 시민 혁명군을 지지하였다. 정치적 친밀감을 떠나 본인의 이나 주장에 적합한 쪽을 선택한 것이다.



1792년 초상화 <출처 : 위키피디아>



프랑스에서 귀국한 그는 연방정부 행정부가 구성되면서 초대 국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재임 기간은 1789년 ~ 93년이었다.


간에 해밀턴과 많은 논쟁을 벌였다. 처음 부딪친 것은 주 정부의 부채 해결 문제였다.


당시 버지니아 주 정부는 부채가 거의 없었다. 전쟁을 치른 북부 지역의 정부는 부채가 많았다. 제퍼슨은 주 정부의 부채는 알아서 해결하자는 의견이었고, 해밀턴은 연방정부가 모두 떠안아 해결하자는 입장이었다.


옥신각신 논쟁 끝에 연방정부의 수도를 워싱턴 DC로 결정하는 것에 합의하면서, 해밀턴의 안으로 정리되었다.


'제1 미국은행' 설립의 충돌


이후 또다시 의견이 충돌한 것은 중앙은행인 ‘제1 미국은행(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 설립에 관한 건이었다.



제1 미국은행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은 중앙은행의 설립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주장했다. 해밀턴은 수정헌법 10조에 의거, '국민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연방정부가 행사할 수 있다' 라는 논리로 반박했다.


해밀턴은 워싱턴을 설득했고 성공했다.


결국 1791년 중앙은행인 '제1 미국은행'이 설립되었다. 이 시기부터 제퍼슨의 공화파와 해밀턴의 연방파 정치적 대립이 심화됐다.


공화파의 대표적 인물


제퍼슨은 친프랑스였다. 정치적인 모범을 여기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해밀턴은 영국을 통해 그 모습을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둘 간의 정치적인 다툼은 워싱턴을 매우 힘들게 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의 경제관념은 해밀턴과 달랐다.


농업만이 이상주의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자유를 가진 농민이, 아무 속박 없이 자신의 의지로 농사짓고 생활하는 방식을 동경했다. 당시 경제 구조로 가장 최적화된 모델이었다.


해밀턴의 연방파는 이상주의적 사고라고 낮게 평가했다. 상업과 공업을 통한 부의 증진만이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라고 보았다.



알렉산더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의 이념과 철학


제퍼슨은 유럽 국가가 치열하게 싸우는 장면을 보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가 무너지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렇기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개인의 자유는 그 어떤 것이라도 침범해서는 안 되며, 이는 절대적인 권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개인의 인권이 우선시되어야 하며, 정부는 이를 침범할 권한이 없다는 뜻이었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스스로의 도덕성으로 사회가 운영된다면, 정부는 필요 없다는 뜻을 내비치기도 했다. 소수의 학자들은 이에 대해 감상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이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원래의 취지를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인권 보장과 자유의 권리'라는 내용이었다.  



제퍼슨이 설립한 버니지아 대학교 아카데미 홀  <출처 : 위키피디아>


후대로 이어져온 인간 존중과 기본 권리


그는 냉엄한 정치 세계와 치열한 경제 구조보다 학문의 세계가 더 적합할 수 있었다.


성격 또한 대중 앞에 나서서 연설하기보다는 홀로 조용한 방에서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혀가 짧아 부정확한 발음으로 구두 연설보다는 글을 쓰는 방식을 좋아했다.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고, 명문장이었다.


그의 사상과 이념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후대로 이어지고 존중되어왔다.


현 미국 경제 구조에서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가 물질(돈) 보다 우선되어야 한다는 논리는, 제퍼슨 시대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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