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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07. 2020

제퍼슨 대통령 시대(1801~09)

토머스 제퍼슨 시대 3

1793년 국무장관에서 물러난 제퍼슨은 버지니아의 몬티첼로(Monticello, 자신의 집)에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갔다.


몬티첼로   <출처 : 위키피디아>


공화파의 실질적 지도자


공화파의 정치인에게 편지를 부치거나 사람을 보냈다. 연방파와 대립을 지속한 것이다.


당시 유명한 사건은 제이 조약(Jay's Treaty) 체결이었다. 영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이었다. 미국 경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였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제퍼슨 편에 선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Jr., 1751~1836, 제4대 대통령)은 강력한 후원을 받았다. 젊은 시절 정치적 동반자였던 해밀턴 공격에 앞장섰다.


1796년 워싱턴 대통령 임기가 끝났다.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열렸다.


1796년 대통령 선거


제퍼슨은 공화파를 대표하여 후보로 출마했다. 하지만 연방파의 존 애덤스(John Adams, 1735~1826)에게 패배했다.

 


존 애덤스 대통령 <출처 : 위키피디아>


차점자 방식으로 부통령이 된 그는, 애덤스와의 견해 차이로 정치적 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


이후 ‘XYZ 사건(XYZ Affair)‘과 ’ 유사 전쟁(Quasi-War, 1798~1800)‘으로 프랑스와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았다. 친 프랑스 계열이었던 제퍼슨도 일순간 위축되었다.


하지만  1798년 승인한 ’ 외국인 규제 및 선동 금지법(Alien and Sedition Acts)’을 공화파 탄압이라고 맹렬히 규탄하며 재기했다. 이 법은 사실상 공화파의 입지를 약화시켰다.


1800년 대통령 선거와 당선


1800년 대통령 선거 때 연방파에서 공화파로 당적을 옮긴 애런 버(Aaron Burr, Jr, 1756~1836)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연방파의 본거지인 뉴욕의 표를 분산시켰다.



1800년 대통령 선거   <출처 : 위키피디아>


선거 결과, 해밀턴의 도움을 받아 제3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1804년 재선 때에는 부통령 후보를 조지 클린턴(George Clinton, 1739~1812)으로 바꾸었다. 해밀턴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버를 용서하지 않은 것이다.


제퍼슨은 해밀턴과 오랜 기간 정치적 논쟁을 벌였으나, 의 공로는 인정하였다.


때문에 당시 부통령인 애런 버가 해밀턴을 죽인 사건크게 분노했다. 다시는 그를 찾지 않았고 정치계에 발붙이지 못하게 했다.


이후 버는 루이지애나 지역에서 반란을 도모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재판 결과 존 마샬(John Marshall, 1755~1835)의 판결로 반역죄는 기각되었다.


존 마샬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1801년 이후 제퍼슨의 시대가 열렸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시대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앨버트 갤러틴(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1761~1849)을 임명했다. 국무장관에는 정치적 동지이자 버지니아주 후배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Jr., 1751~1836)을 임명했다.


갤러틴의 선택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다.

 


앨버트 갤러틴 초상  <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 대통령은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 의회를 장악한 공화파 의원들의 지지를 받았다. 연방파는 해밀턴과 애덤스 파로 나뉘어 영향력이 크게 축소되었다.


제퍼슨의 경제 정책은 작은 정부와 부채 감소였다. 연방정부의 예산을 줄이고 지출을 감소시켜 국가 부채를 줄이고자 했다.


아울러 해밀턴 때 만들어진 ‘제1 미국은행’과 관세법은 유지하였다.


소란스러웠던 '위스키 반란(Whiskey Rebellion)'의 근원이 된 위스키 세금을 철폐했다. 연방정부 재정의 수입 원은 관세만이 남게 되었다.


위스키 반란  <출처 : 위키피디아>


군대의 규모도 축소시켰다. 전쟁 시, 군인의 감소는 큰 위험이 있을 것이라는 연방파의 의견을 묵살했다. 민병대를 조직해 싸우면 된다는 논리였다.


루이지애나 매입과 대통령 재선 성공


당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었다.


1803년 7월 루이지애나 매입 내용을 공표했다. 미국의 영토는 2배 이상 넓어졌고, 제퍼슨의 인기도 올라갔다.


1804년 재선을 위한 대통령 선거에도 연방파의 찰스 핑크니(Charles Pinckney, 1757~1824)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연임에 성공했다.


좋은 일이 계속 생겼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의 승리


1801년부터 시작된 ‘제1차 바르바리 전쟁(The First Barbary War, 1801~1805)’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제1차 바르바리 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전쟁은 북아프리카 지역의 바르바리 국가에 인질로 잡혀 있는 미국 선원의 협상에서 시작되었다. 과도한 통행세로 연방정부의 재정이 흔들거리자, 미 해군을 파견하여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 최초의 해외 원정 싸움이었다.


해병대의 트리폴리 장악으로 1805년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승전보였다. 커다란 골칫거리를 정리했다. 미국의 위신을 높였다.


트리폴리를 함락한 데르나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근심거리도 생겼다.


이 시기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나폴레옹 전쟁이 지속됐다. 제퍼슨은 워싱턴의 의견을 이어받아 미국의 중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은 이를 무시하고 미국 선박들을 나포, 선원들을 강제로 영국군에 편입시켰다.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 풍자(영국)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영국 의회의 긴급 칙령으로 유럽의 모든 국가와 교역을 중단하였다.


이에 질세라 프랑스도 1806년 베를린 칙령(일명 대륙봉쇄령, Continental System, Continental Blockade), 1807년 밀라노 칙령(Milan Decree)으로 영국을 고립시키고자 했다.


1807년 체사피크-레오파드 사건과 '출항금지법'


이 와중에 1807년 미국에서 체사피크-레오파드 사건(Chesapeake–Leopard Affair)이 발생했다.


이는 영국 전함 레오파드호가 미국 선박 체사피크 호를 강제로 수색하는 과정에서 미국 선원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다친 사건이었다.


체사피크-레오파드 사건  <출처 : 위키피디아>


당연히 미국 여론은 뜨겁게 달아올랐고, 제퍼슨은 조치를 취해야 했다.


그 결과로 발표된 것이 ‘1807년 수출금지법 또는 금수조치법(Embargo Act of 1807)’이었다.


하지만 이 법의 시행으로 미국 경제는 바닥까지 추락하게 다.


제퍼슨 재임 시대의 가장 큰 경제적 오판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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