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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08. 2020

제퍼슨 대통령의 업적과 비판

토머스 제퍼슨 시대 4

그의 시대를 일명 제퍼슨 민주주의(Jefferson democracy)라고 부른다.


제퍼슨의 정치사상과 미국 민주주의 토대


그는 평생 계몽주의 사상에 입각한 정치 철학을 이어갔다. 벤저민 프랭클린과 더불어 '18세기 미국의 르네상스 맨'이라고 불렸다. 미국 민주주의의 토대를 마련했다.


제퍼슨은 상당히 높은 독서 수준과 지식을 가졌고 재능은 다재다능했다.


법률가이자 건축가였고, 고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작가이자 발명가이며 음악가이자 농장주였다. 가장 큰 자부심은 버지니아 대학의 설립이었다.


연방의회 도서관 중 토머스 제퍼슨 빌딩  <출처 : 위키피디아>


자신의 철학인 평등사상에 많은 정성을 쏟았다. 연방정부보다는 주 정부 권한 강화에 노력했다.


제퍼슨의 개인 생활


연방정부의 권한 축소로 경제 활동은 일부 위축되었다.


경제적 허점을 방어하고 유지한 사람은 재무장관인 앨버트 갤러틴이었다. 참고로 제퍼슨은 갤러틴의 의견을 대부분 수용했고, 지지했다.


제퍼슨은 인권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그의 농장에는 200여 명의 노예가 있었다.


백인 중심의 사고방식도 갖고 있었다. 흑인과 인디언 원주민의 인권은 부정하는 모순을 보여주기도 했다.


러시모어 산의 제퍼슨 상(왼쪽 두 번째)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인권 사상을 백인과 중산층 이상의 시민에게 한정 지었다. 사후 비판을 받았다.


그는 죽기 전까지 노예들을 해방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젠가 노예 문제로 큰 비극을 겪게 될  것이라는 예언도 했다.


대통령 재직 시에는 노예제도 폐 및 해방 문제에 대해 공개적으로 침묵했다.


샐리 헤밍스 스캔들과 역사적 논란


그의 사생활은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샐리 헤밍스 스캔들을 풍자한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은 1802년에 제기된 '샐리 헤밍스(Sally Hemings, 1773?~1835) 스캔들'이었다.


이 사건은 흑인 노예인 리 헤밍스 자식의 친부 논란이었다.


샐리 헤밍스가 출산한 아이의 아버지 논란이 발생했다. 주인공으로 제퍼슨이 지목되었다. 하지만 이를 회피하고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당시 헤밍스는 28살이나 어렸다.


그 외에도 몇몇 여성과의 적절하지 못한 관계가 제기되었다. 후대에 관련된 내용이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아메리칸 스캔들  <출처 : 위키피디아>


제임스 아이버리(James Ivory) 감독의 '대통령의 연인들 (Jefferson in Paris, 1995)'과 찰스 헤이드(Charles Haid) 감독의 '아메리칸 스캔들(Sally Hemings: An American Scandal, 2000)'이었다.


헤밍스는 자신의 아이들(성년까지 살아남은 자녀는 총 4명이었다. 이름은 베벌리 헤밍스, 해리엇 헤밍스, 디슨 헤밍스, 이스턴 헤밍스였다)이 제퍼슨의 후손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을 보고 눈을 감았다.


논란은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헤밍스의 아들인 매디슨 헤밍스(Madison Hemings, 1805~1877)가 제퍼슨의 후예라고 주장했으나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100여 년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1998년 유전자 감별법을 통해 Y염색체의 유전정보를 비교하였다.


진위여부에 대한 공방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헤밍스의 손자 존 웨이즈 제퍼슨 대령 <출처 : 위키피디아>


2007년 11월 학술잡지 네이처'(Nature)에 결과가  발표되었다. 제퍼슨가의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헤밍스의 일부 자녀가 자손으로 인정받았다.


제퍼슨은 사후 그의 노예 중 일부를 해방시켰다. 헤밍스 자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퍼슨의 퇴임 후 업적


1812년 미국-영국 전쟁 시에 워싱턴 DC 함락 후 의회도서관이 불에 타 소실되었다.


이에 제퍼슨은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을 기증했다. 일정 금액을 받고 약 6,500여 권의 책을 헌납했다.


연방 의회 도서관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책을 기반으로 의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이 본격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제퍼슨은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후,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제공하기로 마음먹었다. 교회의 종교적 영향을 받지 않는 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그 결과로 설립된 것이 버지니아 대학교(University of Virginia, 약칭 U.Va., UVA)였다.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사람도 자유롭고 공평하게 공부할 수 있도록 했다. 평등의 기회를 제공한 것이다.


건립 오래전부터 직접 건축과 운영 일정을 만들어 놓았다. 1819년 설립이 이루어졌고, 1825년 처음 편입생을 받았다.


버지니아 대학교 건물   <출처 : 위키피디아>


이 대학은 미국 최초로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 배울 수 있는 학교였다.


예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교육과 종교를 분리했다. 이 대학의 건축 양식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방식을 따랐다. 그의 많은 정성과 노력이 깃들여졌다.


제퍼슨 사후의 혼란


그는 1826년 7월 4일, 독립기념일 50주년 기념일에 사망했다. 많은 부채를 남겼다.


살아생전에 큰 부자였으나 죽기 직전에는 엄청난 빚에 힘들어했다. 장인의 죽음 이후, 토지와 함께 빚을 물려받았다. 이자에 이자가 붙으면서 빚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몬티첼로와 주변 토지  <출처 : 위키피디아>


독립 전쟁 이전에 빚을 갚기 위해 토지를 매각했다. 전쟁 중에 발생된 인플레이션으로 화폐 가치가 폭락, 큰 손해를 봤다.


여기저기 친인척의 급한 사정에 적지 않은 돈을 빌려주었다. 돌려받지 못했다. 결국 사후에 토지는 경매로 넘어갔다. 이러한 과오가 후대에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역사적 업적과 경제적 기반 유지


 세이스의 반란에 대해 역사에 남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과거나 현재나 ‘자유의 나무’는 독재자와 애국자의 피로 다시 태어난다. 그 피가 바로 ‘자유의 나무’에게는 천연의 비료인 것이다”


그는 시대를 통찰하는 지식인이었다. 일평생 민주주의의 이념인 인권과 자유, 평등에 대해 주장했고, 실천했다.



제퍼슨의 묘지  <출처 : 위키피디아>


아울러 '미국 금융의 귀재'라 불리는 갤러틴을 임명하고 그의 정책을 지지해 주었다. 해밀턴에 이은 갤러틴의 경제 정책은 초창기 미국 경제와 금융을 안정화시키는데 일등 공신이었다.


제퍼슨의 업적은 뒤를 이은 잭슨 대통령 시대에 '잭슨 민주주의(Jacksonian democracy)'로 거듭나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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