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정엽 Aug 12. 2020

1807년 체사피크-레오파드 사건

제퍼슨과 갤러틴 시대의 주요 사건 2

이 사건은 1807년 6월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 해안에서 발생한 영국 전함 레오파드(HMS Leopard)와 미국 프리깃함 체사피크호(USS Chesapeake)의 해상 교전을 말한다.



레오파드호의 체사피크호 공격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 해군의 공격으로 미국 승무원 3명이 사망하고 18명이 부상을 입었다. 영국군에 의해 끌려간 4명의 승무원(전직 영국 해군 탈영병)중 1명은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을 당했다.


시대적 배경


이 시기 나폴레옹 전쟁(1803-1815)여파가 있었다. 캐나다에 기지를 둔 영국 해군 전함은 미국 연안순찰하며 정찰 활동을 했다.


중립의 입장을 취한 미국을 감시하고 자국 탈영병을 단속하는 임무였다.


나폴레옹 전쟁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 해군 병사들은 장기간의 전쟁에 지쳤다. 군기도 엄해 탈영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이들은 자국(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미국 상선 승무원으로 취업하거나 미 해군으로 전향했다. 실제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도 많았다.


늘어나는 무역량만큼 인력이 부족했던 연방정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자유를 찾아 이민을 온 사람도 많았기에, 탈영병의 문제도 이와 유사하게 처리했다.


미국 체사피크호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 해군의 병력 부족과 탈영병 문제


영국 해군도 문제가 있었다. 탈영병이 증가하면서 병력이 부족했다.


프랑스와 교역 중인 미국 상선을 습격, 승무원들을 강제로 영국 해군에 입대시켰다. 빈번했다.


양 쪽 모두 암묵적인 방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탈영병 처리는 군기와 원칙의 문제였다. 이들을 찾아다니며, 미 해군으로 전향탈영병을 색출하고 다녔다.



슬루베리 프라이스 험프리즈 함장   < 출처 : 위키피디아>



영국 부총독이었던 조지 버클리 경(George Cranfield Berkeley, 1753~1818)의 명령을 받은 레오파드호의 슬루베리 프라이스 험프리즈(Salusbury Pryce Humphreys, 1778~1845) 함장은 미국 프리깃함을 아 수색을 진행했다.


미국 체사피크호의 수색과 교전


장거리 항해를 위해 버지니아 주 노퍽에서 준비하고 던 체사피크호(USS Chesapeake)와 마주쳤다.


영국 해군이 탈영병 수색을 위해 체사피크 호에 탑승했다. 미국 승무원이 강하게 항의했고, 옥신각신 끝에 되돌아갔다.


바로 교전 신호를 보냈다. 영국 레오파드호에서 대포를 발사했다. 아무런 준비를 못했던 체사피크호는 일방적으로 공격당했다.



체사피크-레오파드호의 갈등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3명이 죽고 10명이 경상, 8명이 중상을 당했다.


체사피크호 함장인 제임스 배런(James_Barron, 1768~1851)은 즉각 항복을 했다.


그러나 험프리즈 함장은 이를 무시하고 강제 수색했다. 4명의 탈영병을 발견, 이들을 끌고 갔다.


제임스 배런 함장 <출처 : 위키피디아>


4명의 탈영병은 과거 영국 해군 출신이었다. 이중 3명은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인이었다.


미국의 항의와 승무원의 귀환


군사재판 끝에 영국인 탈영병 젠킨 랫퍼드(Jenkin Ratford)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8월 캐나다 핼리팩스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나중 3명은 미국으로 돌아왔다


체사피크호와 승무원, 제임스 배런 함장도 미국으로 귀향했다. 이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처벌받았다.


이 사건을 접한 미국 여론은 분노했다. 국가 위신에 큰 손상을 입었다고 주장했다.


제퍼슨 대통령은 독립전쟁의 예를 들었다.


‘렉싱턴 전투(Battles of Lexington) 이후 이 나라가 지금과 같은 분노의 상태를 겪은 적이 없고, 하나로 뭉친 적도 없다’라고 표현했다.


1775년 랙싱턴 전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즉각적인 군사 행동을 주장했다. 전쟁을 불사할 만큼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하지만 빠르게 식어갔다.


당시 외무부 장관인 제임스 먼로는 미국 승무원 나포에 대한 부당함, 버클리 총독의 소환, 미국 해역 내에서의 영국 전함 정찰 금지, 미국 상선 승무원의 강제 영국 해군 입영 철폐 등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영국 정부는 별다른 유감을 표하지 않았다. 탈영병 처리에 대한 원론적인 입장만 전달했다.


아울러 미국 시민권을 가진 3명의 탈영병을 돌려보냈다. 체사피크 호의 수리비용도 제시했다.



체사피크호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1807년 통상금지법(Embargo Act of 1807)의 시행


연방정부는 강하게 밀어붙였지만, 원하는 결과를 못했다. 경제적 교전을 선택했다.


바로 ‘1807년 수출금지법(Embargo Act of 1807)’이었다.


경제적 압박을 통해 정치적 해결을 모색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실패로 끝났다.


이 사건은 '1812년 미국-영국 전쟁'이 발생된 하나의 계기로 기록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