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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1. 2020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

제퍼슨과 갤러틴 시대의 주요 사건 1

'루이스와 클라크 탐험대(Lewis and Clark Expedition)'는 루이지애나 지역을 탐사했던 원정대 이름이다. 


프랑스로부터 루이지애나 매입 이후 제퍼슨 대통령의 명령으로 이 곳에 보내졌다.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원정 경로  <출처 : 위키피디아>



시기는 1804년 5월부터 1806년 9월까지 진행됐다.


군인이었던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와 그의 동료인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의 이름을 딴 명칭이다.


시대적 배경


1803년 루이지애나 매입(Louisiana Purchase)이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대한 정보와 내용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탐험대 200주년 기념 우표  <출처 : 위키피디아>


제퍼슨 대통령은 루이지애나의 상업적 가능성과 자원의 양을 파악하고자 했다. 서쪽 대륙을 가로질러 태평양까지 이어진 경로도 찾고자 했다.


대통령 취임 전부터 이 지역에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개인적 호기심에 더해 태평양과 연결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고 싶어했다.


자금과 적절한 인물이 없었다. 포기하지 않았다. 대통령 취임 후 2년 동안 의회를 통해 기금 모집에 나섰다.


루이지애나 매입과 더불어 1803년 탐험대를 조직했다. 리더로는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1774~1809)를 임명했다.



메리웨더 루이스  <출처 : 위키피디아>


탐험대의 목적은 지리적 위치 파악과 경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동식물 연구천연자원 탐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퍼슨이 루이스를 콕 찍어 선정이유가 있었다. 끈기와 인내, 자연에서의 적응력, 인디언의 풍습 등에 최적화된 인물이었다.


루이스는 발탁 의사와 과학자로부터 필요한 지식과 교육을 받았다. 제퍼슨의 개인 서재에서 많은 정보를 습득했다. 수시로 탐험대의 방향성과 목적에 대해 토론했다.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1770~1838)  <출처 : 위키피디아>


중요한 동료로 윌리엄 클라크를 선정했다.


충분한 준비 기간 동안 장비를 꾸렸다. 장기간 탐험에 필요한  도구를 챙기는데 주력했다.


드디어 총 33명으로 구성된 탐험대는 출발했다.소식을 들은 루이지애나 부근 스페인 정착민들움찔했다. 무장병력을 보내 이들을 추격했다. 자신들의 영토에 무단 침입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탐험대는 너무도 빨리 이동했고(하루 평균 70마일), 스페인 무장병력은 추격에 실패했다.


탐험 도중 일원인 찰스 플로이드(Charles Floyd, 1782~1804)가 급사했다. 원인은 급성 맹장염이었다. 유일한 희생자였다.



찰스 플로이드(Charles Floyd, 1782~1804)  <출처 : 위키피디아>


탐험 도중 수많은 인디언 부족만났다. 그때마다 준비한 사절 선물을 제공했다.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한 것이다.


모두 우호적인 것은 아니었다. 호전적으로 대하는 종족도 많았다. 탐험대와 전투를 려는 이들도 있었다.


루이스와 클라크는 모든 내용을 기록하고 보존했다.


인디언 부족의 명칭과 위치, 관습과 무역방식, 식생활 해결 방법 등 사소한 내용들도 기재했다.


후에 이 자료는 지역 원주민들 연구와 신규 이주민들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다.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묘사  <출처 : 위키피디아>


후에 제퍼슨은 자료와 내용을 의회에서 발표하고 제출했다.


이들을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주민보다 추운 날씨였다. 겨울은 그 자체가 악몽이었다.


야영을 통한 생활은 언제나 위험을 갖고 있었다. 인디언들 습격에 대비해야 했다. 식량은 늘 부족했다. 지역 원주민의 도움을 받지 못하면 사냥을 하거나 멀리 떨어진 부족에게 구매해야 했다.


탐함대는 두 번의 겨울이 지나고 복귀 준비를 했다. 귀환 과정도 순탄치 않았다.


곳곳에 이들을 노리는 인디언들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하루 100마일(160km)을 이동한 날도 있었다.



루이스 클라크 탐험대 묘사  <출처 : 위키피디아>


드디어 1806년 9월 무사히 세인트 루이스에 도착했다. 이들이 수집한 자료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했다.


작성된 지도는 약 140여 장이었다.


아울러 200종 이상의 새로운 동식물과 72종 이상의 토착 생물을 기록하여 제출했다.


탐험대 보고 이후 연방정부에 의해 본격 개척되었다. 때로는 무력을 사용하기도 했다.



탐험대 작성 지도  <출처 : 위키피디아>


탐험대의 지도가 큰 역할을 했다.


확장되는 영토와 늘어나는 개척 토지로 미국의 힘은 비례하여 커져갔다.



 메리웨더 루이스(Meriwether Lewis) 이야기


루이스는 1774년 버지니아에서 태어났다. 1795년 미 육군에 입대했고, 1801년 제퍼슨의 비서로 임명되었다. 그는 태평양 연안으로의  대륙 횡단 탐험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었다.


루이스와 클라크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탐험대 복귀 후 공로를 인정받아 1,600 에이커 (6.5㎢)의 땅을 보상으로 받았다.


아울러 미주리 주지사로 임명받아 일했다. 1809년 밝혀지지 않은 총상 사건으로 사망했다.



윌리엄 클라크(William Clark) 이야기


클라크는 1770년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33살에 탐험대에 참여했고 귀환 후 결혼했다.


탐험대 150주년 기념 우표  <출처 : 위키피디아>


주로 민병대와 미 육군에서 군 복무를 했다. 한때 미주리 주 4대 주지사로 근무했다.


이후 1822년부터 1838년 까지 '인디언 사무국(Bureau of Indian Affairs, BIA)'에서 일했다. 세인트루이스에서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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