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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3. 2020

1812년 미국-영국 전쟁

제퍼슨과 갤러틴 시대의 주요 사건 3

이 전쟁은 1812년 6월부터 1815년 2월까지 발생된 미국과 영국(인디언 동맹 포함) 간의 전쟁이다.


전쟁 지역은 미국 영토였고, ‘헨트 조약’에 의해 종결되었다.


앤드루 잭슨은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크게 승리하여 영웅으로 떠올랐다.


1812년 전쟁. 해상에서의 전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시대적 배경


미국 연안에 대한 영국의 간섭은 이어졌다. 미국 상선을 습격, 강제로 영국 해군에 편입시키는 사례도 빈번했다.


가장 큰 문제는 영국의 인디언 부족 원조였다. 미국의 영토 내 영국의 동맹이 있다는 것은, 잠재적 위협이었다.


앞서 발생된 '체사피크-레오파드 사건'으로 미국 내 영국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았다.


1811년 리틀 벨트 사건(Little Belt affair, 1811, 미 해군과 영국 해군과의 해전)으로 영국 해군 11명이 사망했다. 영국 내에서도 미국에 대한 부정적 감정이 불타올랐다.


리틀 벨트 사건(Little Belt affair, 1811)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의 선전포고와 '매디슨씨의 전쟁'


결국 1812년 6월, 12개 주 의회 지지를 받은 매디슨 대통령은 영국에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했다.


남부와 서부 농민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미국의 농산물을 영국의 간섭 없이 전 세계에 팔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었다.


미국의 전쟁 선언  <출처 : 위키피디아>


동부의 연방파는 전쟁에 반대했다.하지만 정치적 세력이 너무도 약했다. 선전포고를 막지 못했다.


이들은 ‘매디슨 씨의 전쟁’이라고 부르며 경멸했다.


막상 전쟁이 발생되자, 북부와 동부의 지원은 적었다.


캐나다 공략을 위한 전투(퀸스턴 하이츠 전투, Battle of Queenston Heights, 1812년 10월)가 패배로 끝나면서 추진 동력이 크게 약화됐다.



퀸스턴 하이츠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캐나다에 대한 미련은 ‘런디 레인 전투(Battle of Lundy‘s Lane)’에서 미군이 패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영국 해군의 봉쇄와 워싱턴 방화


영국의 강력한 해군은 미국 연안과 항구를 봉쇄하여 수출을 차단했다. 영국군이 미국 본토로 상륙하는 단초가 되었다.


미국에 상륙한 영국군은 1814년 워싱턴 방화(Burning of Washington, 1814년 8월)를 일으켰다.



1814년 워싱턴 방화  <출처 : 위키피디아>


매디슨 대통령과 행정부는 메릴랜드 주 몽고메리 카운티의 작은 마을 브룩 빌(Brookeville, Maryland)로 피난을 갔다.


이 도시는 "하루 동안의 미국 수도"로 알려져 있다.


나라 망신을 당한 미국인들은 불같은 열정과 애국심에 불타 올랐다. 뉴욕 주 북부에서 벌어진 플래츠버그 전투(Battle of Plattsburgh, Battle of Lake Champlain, 1814년 9월)에서 승리했다.



플래츠버그 전투  <출처 : 위키피디아>


제26대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 전투를 ‘1812년 전쟁에서 가장 큰 해전’이라고 말했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전투(Battle of Baltimore, 1814년 9월)'에서도 승리했다.


25시간 이어진 영국 해군의 함포 공격을 끝까지 버텨낸 것이다. 맥헨리 요새의 수비대가 안전하게 철수하면서 전략적 승리를 거뒀다.


맥헨리 요새의  성조기와 '별이 빛나는 깃발'


상징적 사건이 발생했다.


엄청난 포격을 견뎌낸 요새의 꼭대기에 성조기가 휘날렸다.


이 모습을 보고 감동한 프랜시스 스콧 키(Francis Scott Key, 1779~1843)는 ‘별이 빛나는 깃발(The Star-Spangled Banner)’이란 시를 지었다.



맥헨리 요새의 성조기를 바라보는 스콧 키  <출처 : 위키피디아>


차후 ‘볼티모어 아메리칸(Baltimore American)’이라는 소책자에 게재됐다.


이 가사에 음을 붙여 부르게 되었다. 이것이 1931년에 제정된 미국 국가이다. 우리에게는 ‘성조기여 영원하라’로 알려져 있다.


계속된 영국의 해안 봉쇄로 미국의 수출은 막혔다. 연방정부는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 유럽에서의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영국도 더 이상 미국인의 해군 강제 징집이 필요 없어졌다.


아울러 영국 내에서 미국과의 무역을 다시 해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다. 전쟁의 명분이 크게 줄어들었다.



헨트 조약(Treaty of Ghent)  <출처 : 위키피디아>


헨트 조약의 체결과 뉴올리언스 전투 


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들었다.


1814년 12월 벨기에 헨트에서 열린 ‘헨트 조약(Treaty of Ghent)’이 체결되면서 전쟁은 종결되었다.


다만 시간차(약 한 달)를 두고 몇몇 지역에 소식이 전달되지 못했다.


1815년 1월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에서 미군이 대승을 거두면서 마무리되었다. 주인공은 앤드루 잭슨(Andrew Jackson, 1767~1845)이었다.


뉴올리언스 전투(Battle of New Orleans)   <출처 : 위키피디아>


승전보가 전해진 이후, 미국 내 애국주의 물결이 크게 불었다. ‘제2의 독립’이라는 심리적 안정감도 얻었다.


미국은 중앙은행 없이 전쟁을 진행했다.


전비 부족으로 엄청난 고생을 한 매디슨 대통령은 바로 ‘제2 미국은행’ 설립에 승인했다.


‘제2 미국은행’은 20년 뒤, 뉴올리언스 전투의 주인공 앤드루 잭슨에 의해 면허가 종료됐다.



제2 미국은행  <출처 : 위키피디아>


1816년 점진적 해군증강법


헨트 조약 체결 이후 ‘전쟁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 bellum, 라틴어)’로 돌아갔다.


영국의 원조가 중단된 인디언 부족은 경제력이 크게 상실됐다. 연방정부에 저항을 이어갔지만 하나둘 종속되었다.


1812년 전쟁으로 불에 탄 의회의사당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의회는 1816년 '점진적 해군증강법'을 통과시켜 해군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매년 1백만달러를 투입하여 8년간 9척의 전함과 12척의 중프리깃함 건조를 승인했다.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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