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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5. 2020

앨버트 갤러틴의 젊은 시절

 앨버트 갤러틴 1

앨버트 갤러틴(Abraham Alfonse Albert Gallatin, 1761~1849)은 미국의 제4대 재부무 장관이다.


앨버트 갤러틴 (1803년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앨버트 갤러틴의 업적


제퍼슨 대통령과 매디슨 시대를 거쳤고 루이지애나 매입과 1812년 전쟁을 겪었다. 연방정부 부채 감소에 노력했고 은 성과를 이루었다.


단순히 재정정책에 머무르지 않았다. 


정치, 외교 분야까지 폭넓은 활동을 통해 초창기 미국 발전에 디딤돌이 되었다. 


하지만 이민자 출신의 한계로 관련 자료나 역사적 기록이 부족했다. 업적에 비해 평가가 약했다. 해밀턴에 비해 근거 자료를 찾기 힘든 것이 사실이었다.



재무부 앞 갤러틴의 동상  <출처 : 위키피디아>



워싱턴 재무부 앞에는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금융의 귀재라는 표현이 기록되어 있다.


갤러틴은 연방정부의 토지(공공)를 자산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 했다. 그 결과 서부지역 발전이 촉진됐다. 많은 공을 들였다.


알렉산더 해밀턴과의 비교


비교되는 대상은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둘 다 수치 계산과 경제 정책이 탁월했다. 동시대 누구와 비교해도 월등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노예 제도를 반대했고, 해방을 위해 앞장섰다.


초대 재무부 장관 알렉산더 해밀턴 <출처 : 위키피디아>


둘 다 수천 페이지가 넘는 보고서와 팸플릿을 보고하고, 발간했다. 미국의 초장기 경제와 금융의 틀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차이점이 한 가지 있었다.


해밀턴은 자신의 주장을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스타일이았다. 상대방을 압박했다. 기운차고 강하게 추진했다.


갤러틴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나가야 할 때와 물러나야 할 때를 파악했다. 주위 사람을 활용했다.



미국 재무부 로고  <출처 : 위키피디아>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마음속으로 큰 그림을 그리고 하나하나 실행했다.


운도 많이 따랐지만, 1801년부터 13년까지 12년을 넘게 재무부 장관으로 일했다. 그의 업무 능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줬다.


갤러틴의 탄생과 어린 시절


갤러틴은 1761년 스위스 제네바(Geneva)에서 태어났다. 해밀턴이 태어나고 4년 뒤였다.


그는 4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9살 때에 어머니도 돌아가셨다.


이후 카트린느 핏텍(Pictet)의 양자로 들어갔다. 14살에 제네바 아카데미(University of Geneva)에 입학했다. 지금의 대학 수준이었다.


제네바의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이 지역은 불어를 사용했다. 엄격한 존 캘빈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빈의 종교적 규율은 금욕적인 생활과 절약 정신이었다.


어린 시절에 이 습관은 평생을 가져갔다.


그의 교육열은 굉장히 높았다. 학교에서 수학과 라틴어, 자연철학(자연과학)을 공부했고 성적은 최상위였다.



제네바 아카데미(대학교)  <출처 : 위키피디아>


독립심이 무척 강했다. 답답한 이 곳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두 친구와 함께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건너왔다. 1780년으로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미국으로의 이주


가지고 간 얼마의 돈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경험이 부족했던 이들은 얼마 후 폭삭 망해 알거지 신세가 됐다.


불어 억양의 영어 발음으로 의사소통도 힘들었다. 아무 자본도 없이 굶어 죽기 직전이었다.


양어머니 핏텍(Pictet)의 도움으로 하버드대학의 프랑스어 강사로 취직했다. 이 생활을 통해 점차 미국 문화에 익숙해져 갔다.


그는 동부보다는 서부의 대농장주를 꿈꾸었다.


광활한 토지의 주인이 되어 지주로서의 삶을 가져가는 것이 희망이자 꿈이었다. 버지니아 주에서 이러한 꿈을 이룰 것이라는 희망에 1785년 미국 시민이 되었다. 나이 24살이었다.


프랜드쉽 힐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대농장주를 꿈꾸는 갤러틴


그는 버지니아주와 펜실베이니아주의 토지를 매입했다. 당시로는 황무지였다.


토지 대금은 성년이 되어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돈으로 납부했다. 석조 건물의 집을 짓고 ‘프랜드쉽 힐(Friendship Hill)’이라 이름 지었다.


그의 부동산 사업은 생각만큼 많은 돈을 벌어다 주지 못했다. 지역 자체의 발전도 더뎠고, 이 곳의 땅은 너무도 넓었다. 황무지보다는 이미 개간된 지역의 토지 가격이 상승했다.


이 무렵 펜실베이니아 주 페이에트 카운티(Fayette County, Pennsylvania)의 지역 대표맡았다. 이 생활을 통해 타협하는 방식을 터득했다.


그는 연방정부보다는 주 정부 정책을 지지했다. 공화파의 위치에 서게 됐다.



펜셀베이니아 주 위치  <출처 : 위키피디아>


결혼과 부인의 죽음, 쉼 없는 업무 처리


1789년 리치먼드 하숙집의 딸이었던 소피아 알레그레 (1789–1790)와 결혼을 결심하고, 진행했다. 그녀의 부모님 반대를 무릅쓰고 성공했다. 하지만 5개월 뒤 부인이 사망했다.


충격을 받았다. 이후 모든 열정을 업무에 쏟았다.


 ‘많은 업무를 해야 하는 재능을 타고났다’라고 표현될 만큼 쉼 없이 일을 처리했다. 꼼꼼한 업무 방식은 많은 이들에게 인정받았다.


얼마 후 펜실베이니아 주 정부의 대표로 올라서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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