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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정엽 Aug 19. 2020

매디슨 대통령 취임과  1809년 ‘통상금지법' 시행

앨버트 갤러틴 5

1807년 제퍼슨 대통령에 의해 수출금지법(금수조치법, Embargo Act of 1807)이 발효되었다.

그의 두 번째 임기 중 시행된 법률이었다.


당시 제퍼슨의 나이는 68살이었다.


잦은 편두통과 만성적 스트레스에 힘들어했다.


해상금지법 풍자 삼화   <출처 : 위키피디아>


신의 집 몬티첼로에서 자주 휴식을 취했다. 경제 관련 업무는 오롯이 갤러틴에게 부여되었다.


1807년 수출금지법 시행과 효과


수출금지법에 대한 갤러틴의 반대는 확고했다. 하지만  법이 통과된 만큼 이를 실행해야 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지키는 것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생계가 걸린 일인 만큼, 법을 피하기 위한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을 동원했다.


갤러틴은 사람들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제퍼슨의 확고한 의지로 밀어붙인 법안이라, 준수해야만 했다.



미국 해운업자의 피해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주요 수출품은 담배와 면화였다. 미국 상선의 출항 금지로 영국 배에 의해 운송되었다.


아울러 수입금지도 시행했지만, 발 빠른 정치인들로 인해 예외품목도 많았다. 당연히 영국 상선에 의해 들어왔다.


결국 미국 해운업자만 손해를 보는 상황이었다. 자국의 경제를 스스로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시행 초기 국무장관인 매디슨은 열렬히 환영했으나, 상황을 보고 발을 뻬기 시작했다.


제퍼슨 대통령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빠른 대처를 진행해야 했음에도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


정책 실행의 어려움과 난관


결국 갤러틴이 나서야 했다.


극렬한 해상 업자 들의 반대로 세관 직원에 대한 폭력이 이어졌고, 이들의 사표가 줄을 이었다. 밀수도 성행했다.


제임스 매디슨 초상   <출처 : 위키피디아>


결국 과도한 벌금 체계까지 이어지며 연방정부의 권위는 훼손되었다.


당시 해상 운송은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달이 걸리는 장기간 운행이 주를 이루었다. 하나하나 추적하고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막 성장을 시작한 미국 경제도 점차 내리막길로 돌아섰다. 관세 수입의 감소는 연방정부의 예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부채 감소율이 둔화됐다.  


수출은 1807년 1억 8000 천만 달러가 1년 뒤에 2200만 달러로 줄어들었다. 수입은 1억 3900만 달러에서 5600만 달러로 감소했다.


연방정부 수입도 1700만 달러에서 780만 달러로 급감했다.


 인기도 같이 줄었다. 결국 매디슨 대통령이 취임하는 시점에 이 법은 폐지되었다.


1808년 대통령 선거 결과  <출처 : 위키피디아>


매디슨 대통령 취임과 재무부 장관 유임


1809년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Jr., 1751~1836)이 제4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 시기에 갤러틴은 재무부 장관직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국무부 장관을 희망했다.


하지만 매디슨은 정치적 입장을 고려해 국무부 장관에 로버트 스미스(Robert Smith, 1757~1842)를 임명했다.


나중에 매디슨의 큰 실수로 밝혀졌다. 갤러틴은 기존 재무부 장관에 유임시켰다. 실망했다.


로버트 스미스   <출처 : 위키피디아>


당시 갤러틴이 처한 상황은 매우 힘들었다.


갤러팀의 어려움과 1809년 통상금지법 시행


같은 공화파 내에서 정치적인 공격을 받고 있었다. '필라델피아 오로라' 편집인의 윌리엄 두에인이 앞장선 '필라델피아 회(philadelphia junto)'가 갤러틴 정책 비판에 열을 올렸다.


프랑스 말투의 이방인이라고 조롱했다. 해밀턴이 받은 공격과 유사한 사례였다.


수출금지법에  이은 가적인 경제적 사건은 ‘통상금지법(Non Intercourse Act, 1809)’의 발효였다.


이 법은 기존 제퍼슨의 1807년 '수출금지법(Embargo Act of 1807)'을 철폐하고 새로이 내용을 조정한 법이었다.


미국은 영국·프랑스와 교역을 시행했지만 중립적 위치를 보장받아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프랑스와 영국의 미국 상선 나포가 계속하면, 중립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했다.


통상금지법 삽화   <출처 : 위키피디아>


미국의 중립이 훼손당할 경우, 통상을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상선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국제무대에서 미국의 위상을 알리겠다는 의미였다.


당시 미국은 최상급의 해상 화물선은 가지고 있었으나, 전함은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나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국무장관 스미스의 외교 실패로 영국과의 관계가 더 악화되었다. 결과적으로 '1812년 전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1812년 미국 - 영국 전쟁(이리호 전투 모습)  <출처 : 위키피디아>


난관 극복과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


이 시기 갤러틴은 해상운송의 책임자로 모든 것을 수습하고 관리해야 했다.


뒤죽박죽 된 상황을 헤쳐 나가는 것만으로 벅찼다. 더구나 늘어나는 국가 부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까지 들었다.


1808년에는 셋째 딸이 죽었다. 1802년, 1805년에 이어 세 번째로 자식이 먼저 세상을 달리 한 것이다.


감정적으로 버티기 힘들었다. 재무부 장관에서 내려오고 싶었으나 그럴 상황이 안되었다.


다시금 추스르고 일어났다.


그 과정을 거쳐 의회에 제출된 자료가 ‘제조업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the Subject of Manufactures)’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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